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것이 그것뿐이었다

막막함은 추상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린다

자작숲, 5호 (소재 : Water color) 

 

 

 

사람들이 묻는다

"갑자기 왜 작품이 바뀌었나요?" 

동료 작가들은 조금 더 솔직하게 묻는다. "뭔 일 있어?"

 

산불이 한 번수해가 한 번.

생명의 위협이라는 말이 뉴스에서나 쓰이는 단어인 줄 알았다두 번 겪고 나서야 알았다그건 냄새가 나고소리가 있고몸에 새겨진다연기가 목을 조이는 감각물이 바닥을 삼키는 속도그런 것들은 기억에 저장되는 게 아니라 몸에 각인된다.

 

손을 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다그냥 손이 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끄적거렸다남은 것으로할 수 있는 것을수채화로 뭔가를 그리고 또 그린다.

그게 작품이 '바뀐이유다선택이 아니었다

남은 것이 그것뿐이었다.

 

내가 서식하는 이 마을로 이어지는 유일한 다리—자양교—는 무너진 지 오래됐다

그런데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아무도.

처음엔 공간이 갇혔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아니었다공간이 갇힌 게 아니라 사람들이 갇혔다

각자의 스트레스에각자의 일상에그 안에서 무심코 던지는 말들이 있다

악의는 없다그냥 모르는 거다이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를 악물었다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설명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그래도 그린다허락된 것만 가지고지금 할 수 있는 표현으로.

막막하다는 말이 이렇게 구체적인 줄 몰랐다.

 

그것은 냄새가 났다—젖은 나무와 곰팡이와 흙소리도 있었다—삐걱거리는 경첩어딘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그리고 무게가 있었다가슴 한가운데를 짓누르는아무리 숨을 들이켜도 바닥에 닿지 않는 무게.

 

욕이 나왔다소리 내어 뱉지는 않았다목구멍 안에서 뜨겁게 끓었다가 가라앉았다그리고 그 자리에—아주 조용한 무언가가 남았다무너지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는 아직 여기 있다손이 있고눈이 있고이 개같은 상황을 통째로 기억하는 몸이 있다.

그게 지금 내가 가진 전부다그리고 어쩌면그게 작업의 시작이기도 했다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린다.

 

 

 

 

작성 2026.04.27 11:04 수정 2026.04.2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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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