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심 국제 질서의 변화
지난달 이란과 이스라엘 간 긴장 고조 국면에서 휴전 협상을 중재한 주역은 미국이 아니라 파키스탄이었다.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roject Syndicate)에 2026년 4월 하순 기고한 페드로 아브라모베이(Pedro Abramovay)는 이 사건을 미국 헤게모니 종식의 상징적 장면으로 해석했다.
"미국의 군사력보다 파키스탄의 외교적 중재가 더 결정적이었다"는 그의 지적은 세계 질서의 무게 중심이 이동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같은 시기 가디언(The Guardian)과 런던정경대학교(LSE) 블로그에 게재된 나탈리 토치(Nathalie Tocci), 아누 브래드포드(Anu Bradford)의 칼럼 역시 유럽이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주의에 대응해 미국으로부터 전략적 자율성을 본격 추구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이들 석학의 논평은 미국 중심 국제 질서가 빠르게 약화되고, 글로벌 사우스와 유럽이 독자 행보를 강화하는 다극화 시대가 도래했음을 다각도로 입증한다. 페드로 아브라모베이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기고문 '미국 헤게모니의 종언'(The End of American Hegemony)에서 "냉전 종식 이후 30여 년간 유지된 미국 단극 체제가 사실상 막을 내렸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란 휴전 협상 과정을 상세히 분석하며, 과거라면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가 주도했을 중재 역할을 이번에는 파키스탄 외교부가 떠맡았고, 역내 주요국들이 파키스탄의 제안을 미국의 입장보다 우선시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더 이상 미국의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며, 브릭스(BRICS) 확대, 상하이협력기구(SCO) 강화, 아프리카연합(AU)의 G20 정식 가입 등을 글로벌 사우스 부상의 증거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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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는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네시아 등 중견국들이 기후변화, 팬데믹 대응, 디지털 거버넌스 등 글로벌 의제 설정에서 점차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대전 양상의 변화 역시 전통적 안보 개념을 뒤흔들고 있다. 재팬타임스(Japan Times)에 2026년 4월 23일 게재된 다우드 쿠탑(Daoud Kuttab)의 칼럼 '이스라엘의 레바논 완충지대 주장은 허상'(Israel's Lebanon Buffer Zone Claim is a Mirage)은 "미사일, 드론, 사이버 공격이 주류가 된 현대전에서 물리적 영토 완충지대는 더 이상 방어 수단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쿠탑은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에 완충지대를 요구하는 논리가 1970~80년대 냉전 시기 사고방식에 갇혀 있다고 비판하며, "드론 한 대가 수백 킬로미터를 날아 정밀 타격하는 시대에 10~20킬로미터 완충지대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이는 기업과 정부가 물리적 국경 방어뿐 아니라 사이버 보안, 디지털 인프라 보호, 공급망 회복력 등 새로운 차원의 안보 전략을 수립해야 함을 시사한다.
는 서방 동맹 내부의 역학 변화를 상징한다. 가디언에 2026년 4월 24일 실린 나탈리 토치와 아누 브래드포드의 공동 칼럼 '유럽은 깊은 위기에 처해 있지만, 해결책은 우리 안에 있다'(Europe is in Profound Crisis, but the Solution Lies Within)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나토(NATO) 경시 발언과 일방적 관세 정책이 역설적으로 유럽 통합과 자율성 강화의 촉매제가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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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저자는 유럽연합(EU)이 2024년부터 본격 추진해온 독자 방위산업 육성, 유럽 반도체 법안(European Chips Act), 디지털 주권 확보 정책 등을 사례로 들며, "유럽이 미국 의존도를 낮추고 기술·경제·안보 전반에서 자립 기반을 구축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런던정경대 블로그에 같은 날 게재된 관련 논평은 "미국에 대한 두려움이 EU와 중견국들로 하여금 새로운 균형 추구(balancing) 전략을 택하게 만들었다"며, 프랑스·독일 주도의 유럽 독자 방위 구상, 인도·호주·일본 등 인도-태평양 중견국들의 쿼드(Quad) 협력 강화를 그 증거로 제시했다. 이러한 국제 질서 재편은 한국에 도전과 기회를 동시에 안긴다.
첫째, 글로벌 사우스 시장 접근 기회가 확대된다. 브릭스 회원국이 2024년 이집트, 에티오피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등을 추가하며 11개국으로 늘어났고, 이들 국가의 합산 인구는 35억 명을 넘어 세계 인구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국제통화기금(IMF)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브릭스+ 국가들의 구매력평가(PPP) 기준 GDP 점유율은 이미 G7을 추월했다.
한국 기업들이 전통적 서방 시장 편중에서 벗어나 인도, 브라질,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신흥 시장으로 수출·투자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할 여지가 커진 것이다. 특히 인프라, 디지털 전환, 재생에너지 분야에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어, 한국의 건설·ICT·배터리 산업에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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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강화는 한-EU 협력 심화의 계기가 된다. 유럽이 미국 의존도를 낮추고 독자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과정에서 한국은 핵심 파트너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EU는 2023년 한국을 반도체·배터리 분야 '전략적 파트너'로 지정했고, 2024년에는 디지털·그린 파트너십을 격상했다. 한국의 반도체·배터리·수소 기술은 유럽이 미국·중국 의존도를 줄이고 자립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필수적이다.
또한 유럽 방위산업 재편 과정에서 한국산 무기 수출(K9 자주포, FA-50 경전투기 등) 기회도 확대되고 있다. 폴란드, 루마니아, 핀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이 한국산 방산 장비를 대거 도입한 것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
글로벌 사우스의 부상과 국제 시장
하지만 위험 요인도 만만찮다. 다극화는 필연적으로 강대국 간 경쟁 격화와 진영 논리 강화를 수반한다. 미국과 중국 간 전략 경쟁이 무역, 기술, 안보 전 영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한국은 선택의 압박에 직면할 수 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인휘 교수는 "미국 동맹과 경제적 실리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지속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며 "다극 질서에서는 명확한 원칙과 가치 기반 외교가 더욱 중요해진다"고 조언했다. 또한 글로벌 사우스 내부도 결코 단일 블록이 아니다. 인도와 중국, 사우디와 이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역내 경쟁과 갈등이 상존하며, 한국이 이들 시장에 진출할 때 복잡한 지정학적 계산이 필요하다.
안보 차원에서도 전략 재조정이 시급하다. 다우드 쿠탑이 지적했듯 영토 중심 사고를 넘어 사이버, 우주, 디지털 영역의 안보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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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지만, 동시에 북한발 사이버 공격, 중국·러시아발 해킹 시도에 상시 노출돼 있다. 국가정보원 사이버안보센터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을 겨냥한 사이버 공격 시도는 연간 170만 건을 넘어섰고, 이 중 국가 배후 공격이 15% 이상을 차지한다. 물리적 군사력 강화와 함께 사이버 방위 역량, 핵심 인프라 보호, 공급망 보안 강화가 병행돼야 한다.
한국 정부와 기업은 다극화 시대에 맞춰 전략적 유연성을 극대화해야 한다. 첫째, 중견국 외교(middle power diplomacy)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호주, 캐나다, 네덜란드 등과 연대해 다자주의 규범을 강화하고,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 개발 협력·기술 이전을 확대하며, 아세안(ASEAN)·태평양도서국 등과 협력 네트워크를 넓혀야 한다.
둘째, 경제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가속화해야 한다. 대중국 수출 의존도를 낮추고 인도·아세안·중동·아프리카·중남미 시장 비중을 늘리며, 공급망 리스크 분산을 위해 니어쇼어링(nearshoring)과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을 병행해야 한다. 셋째, 가치 동맹을 공고히 해야 한다.
민주주의, 인권, 법치, 투명성 등 보편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를 강화하되, 이념 잣대만으로 파트너를 가르는 편협함은 지양해야 한다. 세계 질서가 요동치는 지금, 한국은 수동적 관망자가 아니라 능동적 행위자로 나서야 한다.
페드로 아브라모베이는 "다극 세계는 혼란이 아니라 기회"라며 "중견국들이 창의적 외교와 가치 제안으로 영향력을 키울 여지가 과거 어느 때보다 크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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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 첨단 기술력, 문화 소프트파워, 민주주의 경험을 두루 갖춘 중견국이다. 미국 헤게모니 쇠퇴를 한탄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 설계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한국의 국익과 가치를 반영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다극화 시대는 이미 시작됐고, 한국의 선택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FAQ Q.
글로벌 사우스의 부상이 한국 경제에 구체적으로 어떤 기회를 제공하는가?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추구
A. 브릭스+ 국가들의 인구는 35억 명을 넘어 세계 인구의 40% 이상을 차지하며, IMF 자료에 따르면 이들의 PPP 기준 GDP 점유율이 이미 G7을 추월했다.
인프라·디지털·재생에너지 수요가 급증하는 인도,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 시장에서 한국의 건설·ICT·배터리 산업이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Q. 미국 헤게모니 약화가 한국 안보에 미칠 부정적 영향은 무엇인가?
A. 미·중 전략 경쟁 격화로 한국이 선택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커지며, 동맹 안보와 경제 실리 사이 균형 유지가 더욱 어려워진다.
또한 다극화는 국가 간 갈등과 불확실성을 높여 공급망 리스크, 사이버 위협, 역내 긴장 고조 등 복합 안보 도전을 가중시킬 수 있다. Q.
한국은 다극화 시대에 어떤 전략으로 대응해야 하는가? A.
중견국 외교를 적극 활용해 다자주의 규범을 강화하고, 경제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며, 민주주의·인권 등 보편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를 공고히 해야 한다. 동시에 사이버·우주·디지털 영역 안보 역량을 강화하고,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 개발 협력·기술 이전을 확대하며, 창의적 외교로 새로운 국제 질서 설계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