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2일 오전 8시, 남산공원에 100여 명이 모였다. 짙은 초록이 올라오기 시작한 숲길 아래, 오렌지 빛 조끼를 입은 가이드러너들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회(VMK)의 정기훈련 현장. 올해로 세 번째를 맞은 이 만남은 처음과는 분명히 달랐다.
VMK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매주 남산공원이나 한강에서 정기훈련을 이어가는 단체다. 시각장애인 회원들이 가이드러너와 손을 맞잡고 달리는 이 훈련은 조용하지만 꾸준하게 계속되어 왔다. 세상이 바쁘게 돌아가는 주말 아침에도, 그들은 그렇게 달려왔다.
올해 VMK 이민규 회장은 보스턴마라톤을 완주하고 돌아왔다. 세계 최고 권위의 레이스를 시각장애인 러너로서 완주한 그 자부심이 이날 100여 명의 참가자 모두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우리가 응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용기를 얻어가는 자리였다"는 봉사자들의 말이 괜한 겸손이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VMK와 미생이야기의 인연은 작은 우연에서 비롯됐다. 2024년 4월, 미생이야기 한 회원이 자원봉사 활동 중 VMK의 정기훈련 소식을 접했다. "이건 함께해야 할 행사"라는 직감이었다. 별다른 준비도 없이 후원금과 간식을 챙겨 훈련 현장을 찾아갔다. 그 소박한 첫 방문이 씨앗이 됐고, 미생이야기는 이듬해부터 이를 매년 이어가는 정식 후원사업으로 가꿔나갔다.
변화는 '함께 뛰면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돕는 사람의 자리에 머물렀던 봉사자들이, 준비운동을 같이 하고 숲길을 나란히 달리고 결승선을 함께 넘으면서 달라졌다. 달리기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는 언어임을 몸으로 깨달은 것이다. 참여 만족도는 해마다 높아졌고 "몸으로 함께 뛰는 행사는 다르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즐거움이 의무를 앞선 순간이었다.

유기창 이사장은 "이런 활동들이 많아져야 사회가 건강해집니다. 세대 차이와 격차가 벌어지는 시대일수록,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기회의 장이 필요합니다." 라고 전했다.
후원금이나 물품 전달에 그치지 않고 함께 땀을 흘리는 방식으로 나눔을 실천해온 미생이야기의 철학이 한 문장에 담겼다.
올해 행사에는 기업, 시민단체, 개인 후원자까지 자발적으로 합류했다. 취지가 사람을 불러 모은 셈이었다. 이 자리는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위안의 문법이 아니라, "함께 건강한 사람을 찾겠다"는 연대의 문법으로 쓰인 행사였다. 시각장애인 참가자들에게 전해진 것은 동정이 아니라 존경이었다.
조은시스템 김승남 명예회장(잡코리아 창업주)은 미생이야기를 통해 이런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소중하고 감사하며, 시각장애인 마라토너 분에게 무한한 존경의 뜻을 전했으며, 참가자들에게 진심 어린 응원을 건넸다. 직접 현장을 찾은 그의 모습은 후원이 단순한 금전적 기여가 아님을 말없이 보여줬다. 서초라이온스클럽 김준영 회장 역시 이런 자리는 참여 그 자체로도 행복하다며 앞으로도 지속적 동행을 약속했다.
행사는 후원자들과 미생이야기가 함께 준비한 간식과 선물을 나누며 따뜻하게 마무리되었다. 남산 숲은 여전히 초록이었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올 때보다 조금 더 가벼워진 것 같았다.
세 번의 봄을 함께 달렸다. VMK의 훈련은 오늘도, 다음 주에도 계속된다. 그 조용한 달음질에 함께하는 사람이 한 명씩 늘어갈수록, 우리 사회는 그만큼 더 건강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