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피안의 섬, 소매물도 등대섬 가는 길

여계봉 대기자

 

'욕지(欲知) 두미(頭尾)하거든 문어(問於) 세존(世尊)하라.' 

'처음과 끝을 알고자 하거든 세존께 물어보라.' 

 

선문답 같은 이 글에 등장하는 한자어가 모두 통영 근해의 섬이나 포구의 이름이다. '욕지'와 '두미', '세존'은 통영 앞바다의 섬 이름이고, '문어' 역시 통영 앞바다의 섬 한산도의 포구 이름이다. 호수처럼 고요한 바다 위 징검다리 같은 포구와 섬 이름을 이어 붙이니 불가의 선문답 같기도 하고, 한 편의 시 같기도 한 문장이 완성된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여행은 꿈같은 약속이 든 마법의 상자'라고 했다. 5월 초 어느 날, 동화 속 섬을 찾아서 '마법의 상자'에서 나와 '꿈같은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통영을 향해 달려간다. 서울을 벗어나자 소경의 눈뜸처럼 모든 것이 새롭다. 한려수도 남해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통영. 문화와 예술의 향기 은은하게 펼쳐지는 육지와 더불어 통영 바다에 뿌려진 보석 같은 섬들이 반짝이는 고장. 그가 품은 수많은 섬들 가운데 기암절벽과 등대섬, 그리고 '신비의 바닷길'이 펼쳐지는 소매물도로 떠난다. 

 

섬으로 떠나는 여정은 늘 뱃전에서의 설렘으로 시작한다. 거제 저구항에서 소매물도로 향하는 카페리의 갑판에서는 벌써부터 따가운 햇살이 눈이 부시게 다가온다. 뱃전에서 갈매기와 하나 되는 순간, 자연과의 친화력이 사람을 더욱 사람답게 만든다. 섬들은 물길 따라 흐르다가, 한순간 멈칫 서 있다. 그래서 '섬'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섬과 섬 사이에는 물이 흐른다. 배가 화살처럼 그 물을 가른다. 

 

 

저구항을 출발한 지 50분 만에 소매물도항에 도착한다. 섬에는 차가 들어갈 수 없어 두 다리로 걸어야만 섬 곳곳을 돌아볼 수 있다. 썰물 때는 소매물도의 몽돌밭으로 모세의 바닷길이 열려 등대섬까지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데 하얀 등대가 서 있는 등대섬의 전경을 바라보는 것은 소매물도 여행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소매물도에서 바라본 등대섬'은 <통영 8경>에 포함되는 아름다운 비경으로 알려져 있다. 소매물도에 도착하니 마음도 싱싱해진다. 등대섬 트레킹은 총 3.6km로 3시간이면 넉넉하게 원점회귀 할 수 있는 코스다. 약간 가파른 언덕에 펜션과 식당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둣가를 지나 트레킹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섬의 허리를 따라 난 바닷가 산길로 방향을 잡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해안 길은 그림이요, 시요, 감미로운 해조음이다. 파도소리와 산새소리가 번갈아 들려 귀가 즐겁고, 갯 내음과 숲 내음이 어우러져 코가 상쾌하다. 나무가 우거진 숲을 걷다보면 땀 식혀주는 그늘이 고맙고, 바다가 보이는 길로 들어서면 시원한 바닷바람이 반갑다. 드디어 바다가 뻥 뚫리는 섬의 산정에 서면 등대섬과 남쪽 망망대해의 그 시원한 풍광에 잠시 소스라치는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등대 왼쪽으로 옛날 중국 진나라 시황제의 신하 서불이 불로초를 구하러 가던 중 그 아름다움에 반해 ‘서불과차(徐市過此)’라고 새겨놓은 글씽이굴이 있으며, 등대섬의 랜드마크 병풍바위가 보인다. 그뿐이랴. 아래로 더 내려가면 소매물도와 등대섬을 잇는 열목개 자갈길도 모습을 드러낸다. 산으로 올라오는 해풍이 이마를 스치자 몸에 배인 땀과 함께 일순간 마음속의 삼독(三毒)도 사라진다.

 

 

매물도는 대매물도와 소매물도, 그리고 등대섬 이렇게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다. 이 중 소매물도와 등대섬은 사이좋게 마주해 하루에 두어 번 바다 위에 길을 내어 만난다. 바다 한가운데 자리해 서로 의지하듯 마주한 두 섬은 거센 파도와 바람이 그려놓은 암벽들 덕분에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CF에도 자주 나온 소매물도에서 등대섬 가는 길은 '동화 속의 섬'만은 아니다. 완급과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몇 구비의 고갯길을 거쳐야 갈 수 있는 피안의 세계다. 소매물도와 등대섬은 원래 80m쯤 떨어져 있는데 하루에 두 번 썰물 때면 이 둘 사이에 아담한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다. '열목개 자갈길'이라고도 불리는 몽돌해변이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배 시간과 물때를 잘 맞추어야 등대섬과 소매물도를 오가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몽돌해변 주변은 둥글둥글한 몽돌과 모나지 않은 큰 바위들이 해변을 가득 메우고 있어 섬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몽돌해변을 지나 등대섬 나무데크를 따라 주위 경관을 두루 살피며 유유자적 걷다 보면 어느새 등대 위에 올라와 있다. 등대에서 내려다보면 우측 아래로 명물 촛대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소매물도, 매물도의 이름은 유래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조선 초기의 한자 지명은 '매매도', 후기에는 '매미도'와 '매물도'로 표기했다고 한다. 이러한 '매', '미', '물' 등은 물을 의미하던 옛말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육지로부터 아주 먼 바다에 놓인 섬'이란 뜻풀이가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린다.

 

 

포구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망태봉을 들린다. 망을 보던 봉우리라는 이름에 걸맞게 먼바다까지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소매물도 북쪽 500m 거리에 맏형격인 대매물도가 자리 잡고 있고, 남쪽으로는 대마도가 불과 70여㎞ 거리에 있다. 망태봉 정상에 있는 관세역사관은 1970~80년대 남해안 일대의 밀수를 감시하던 곳이다. 이곳 감시초소는 첨단시스템이 도입되면서 폐쇄되었고 지금은 관세역사관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포구로 내려서는 언덕길 대밭에서 "쏴아"하는 댓잎 소리에 담긴 죽향이 온몸에 스며드니 마음이 여유롭고 평온해진다. 섬 모퉁이 휘어질 때마다 저만치서 꿈속에서 보는 풍경처럼 아련하다. 포구 위로 솜털이 촘촘히 박힌 채 움직임 없는 푸른 하늘을 보니 청적(淸寂)이 인다. 다인(茶人)들이 차를 마실 때 느끼는 최고의 경지가 바로 화경청적(和敬淸寂)이라고 하는데 지금 소매물도 하늘이야말로 바로 청적이 아닐까.

 

눈길 닿는 곳 모두가 비경인 소매물도에서 일탈을 마음껏 누리고 ​비움과 사색의 묘미를 즐긴 후 육지로 돌아가는 배에 몸을 싣는다. 여행이란 일상에서 벗어나 나를 찾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는 것.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여계봉 대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

작성 2026.05.04 12:14 수정 2026.05.04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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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