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숙 칼럼] 93%의 전사들

민은숙

글은 글쓴이의 피와 같다. 같은 혈액형은 줄이 없어도 쉽게 수혈된다. 누군가의 고백이 내 안으로 스며들어 맥박을 다시 뛰게 하려면, 내 상처와 결이 같은 체온을 지녀야 한다. 그래서일까. 요즘 짧은 영상으로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를 마주하면 잠시 멈칫했음에도 뒤끝이 길었다. 나의 정서적 고립이 보편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안도와 서늘함이 썰물처럼 함께 밀려온다.

얼마 전 '감정 워치'를 검색했다. 불안, 우울, 무기력을 실시간으로 측정해 수치로 보여주는 기기의 가격이 합리적이라면 기꺼이 손목을 구속하고 싶었다. 그것이 드라마 속 설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허탈함이란. 웃음이 나오다가 곧 멈췄다. 우리는 정말로 그런 도구를 원한다. 마음의 상태를 객관적 숫자로 확인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지금 당신의 불안 지수는 58입니다"라는 표시가 있다면, 적어도 지금의 나를 오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대가 픽션이었다는 사실보다 실재하기를 바란 욕망이 더 묵직하다.

이 욕망의 배후에는 현대 사회의 냉정한 구조가 놓여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성과와 가치로 평가받는다. 어느 날 퇴근길에서 오늘 한 일이 무엇인지 떠올리려다 멈추었다. 뭔가를 종일 했으나 남은 것이 없었다. 그 공백이 불안으로 채워지는 속도가 무서웠다. 나는 가치가 있는가. 질문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문제는 안정된 답이 없다는 데 있다. 불안해지면 그 불안을 약함으로 간주하며 자신을 책망한다. 이 회로가 하루를 잠식한다.

드라마 대사로 등장한 '7%의 간절한' 수치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극히 일부만이 온전히 괜찮은 상태에 있다는 암시 혹은 진짜로 자유로운 이들의 비율 같다. 그렇다면 나머지 93%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무가치한 감정과 싸우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우리는 그 93% 안에 있다. 매일 자기 자신과 싸우는 전사들의 대열이다. 위로가 되면서도 황색 신호로 깜박인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면서도 이 고통은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구조적 현상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서늘한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안심하기엔 수가 많고 이상하다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보편적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짜 싸움은 어디에 있는 걸까. 외로움이 아니라 무가치하다는 잣대에 있다. 외로움은 관계를 통해 일부 완화될 수 있으나 무가치하다는 열감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으로 회귀한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내가 하는 일은 의미가 있는가, 나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가. 답을 유보한 채 우리는 일상을 지속한다. 출근을 하고, 좋아요를 확인하고, 비교당하며 버틴다. 전사에겐 버티는 것이 곧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그것을 품고 오늘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오늘이다.

이 싸움은 분명 피로하다. 그럼에도 무의미하지 않다. 불안을 감지하는 게 정상이라는 자각은 이미 작은 승리이기 때문이다. 감정 워치가 없어도 우리는 서로의 문장과 목소리 그리고 제스처를 통해 같은 피임을 확인할 수 있다. 누군가의 솔직한 고백이 내면으로 흘러들어와 다시 맥박을 뛰게 한다. 이 공명이 숫자로 된 7%를 넘어서는 방식이다.

어떤 드라마가 진주 같다고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눈부시진 않아도 빛을 받으면 은은하게 영롱하다.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아도 "너도 싸우고 있구나" 라며 조용히 어깨를 감싼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기부여의 구호보다 낮고 단단한 공명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확인 도장과 불안해도 괜찮다는 허락이다.

우리는 각자의 무가치함과 싸우는 93%의 전사들이다. 체온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물들여보자. 같은 혈액형이면 거부반응 없이 스며들 정서의 수혈이 될 터이다. 93%가 서로의 맥박으로 알음알음 자유로워지는 날을 꿈꿔본다.

 

 

[민은숙]

시인, 칼럼니스트

제4회 코스미안상

제3회 문학뉴스 &시산맥 기후환경문학상

2024 중부광역신문신춘문예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지도 강사

꿈다락학교 시 창작 강사

문화재단 & 예술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이메일 : sylvie70@naver.com

 

작성 2026.05.06 11:17 수정 2026.05.0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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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