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수필가들은 사건(에피소드) 장치에 몰입한다. 이는 문학상 공모에 유효하기에 전략적으로 공략한다. 교과서에 실린 수필의 교훈적 사건이 한국 수필가들을 이렇게 유도한 것일 수도 있다.
사건 장치는 수필(隨筆)이라기보다 수기(手記)에 가깝다. 사건에 몰입하다 보면, 기억의 오류, 기억의 변형으로 말미암아 허구로 변화한다. 이런 허구의 글을 수필의 이름으로 발표한다면, 짧은 엽편 소설이라고 칭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수필에는 사건을 장치할 이유가 없다. 수필은 사유의 글이다. 글쓴이의 철학을 담은 글이다. 체험, 사색, 통찰, 확장, 여운으로 이어지는 글이다. 이게 수필의 본질이다. 왜 한국의 수필가들은 사건에 집착하는가? 그 이유는 다층적이다.
한국에서 수필은 오랫동안 학생들의 작문 교육이나 교양 글쓰기의 모델로 소비해 왔다. 여기서 중심이 된 건 교훈적 체험담이다. 초중등 교육에서 수필은 거의 늘 어린 시절의 기억, 깨달음, 교훈의 구조였다.
이 구조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감동적인 이야기’, ‘나의 생각’이라는 형식으로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사건’이 곧 ‘글의 주제’로 변질해 버리는 오류가 생긴다. 결국, 사건 중심의 글쓰기 습관이 수필에 녹아 들어간다.
한국 독자들은 수필을 읽을 때, 이 글 속에서 어떤 인생 이야기를 듣게 될까? 즉, 수필을 하나의 소비 가능한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수필가들은 일화 혹은 체험 서사 없이는 독자를 끌 수 없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자연히 사건 중심의 글쓰기로 흐른다. 사건은 글을 잡아끌지만, 생각은 멀어진다.
한국 문단은 오랫동안 수필을 비문학적인 글쓰기, 혹은 소설을 쓸 능력이 없으면 쓰는 갈래 정도로 취급해 왔다. 수필가들은 수필을 문학화하거나 진지한 사유의 글로 끌어올리기보다는 쉽고 감성적인 글로 포장한다. 이는 시장성을 추구하는 경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결과 자기 경험이라는 사건에 집착하기에 이른다.
한국은 유난히 경험 중심, 공감 중심, 정서 중심의 문화이다. “나도 그런 적 있다.”라는 감정의 교류가 글의 가치를 결정하기도 한다. 글 속에 개인 경험이 없으면 공감할 거리가 없다고 느끼는 독자가 많다. 수필가들도 이러한 정서에 기대어 개인적 사건을 통해 보편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한다.
한국의 수필가들이 사건에 집착하는 이유는 교육적 전통, 독자의 기대, 문학 단체의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사유 중심의 수필’이 등장하기 어렵다. 등장하더라도 외면받기 쉽다.
훌륭한 수필은 반드시 자전적일 필요도, 사건이 있을 필요도 없다. 훌륭한 수필은 일상적 경험조차 생략한 채, 사색(사유)과 통찰의 맨살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일화를 거의 쓰지 않고, 사색만으로 세계를 여행한다. 그는 개인적 경험을 출발점으로 삼지만, 그 경험을 사건으로 재현하기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철학적 사유로 확장했다. 파스칼의 『팡세』는 인간의 이성과 신앙,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단편적 사유로 기록한 수필집이다. 사건의 연쇄 대신, 파편적 생각들이 모여 하나의 통찰을 수렴하는 구조이다.
니체는 ‘아포리즘’ 형식의 글로 유명하다. 짧은 문장으로 깊은 통찰이나 사상을 전달한다. 현실의 일화보다 사유의 긴장으로 이루어진 철학적 단편들이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드러내기보다, 세계와 언어의 본질을 해체하며 새로운 사유의 문장을 구축했다. 직관적이고 날카로운 메시지를 독자에게 던졌다.
한국의 김형석, 법정, 안병욱 등은 개인적 체험을 출발점으로 삼지만, 언제나 존재론적, 윤리적, 철학적 사유로 나아갔다. 법정의 『무소유』는 소유의 부재에서 삶의 본질을 탐구하고, 김형석의 수필집 『인생이여, 행복하라』는 아름다운 인생, 행복, 추억의 의미를 통찰해 나간다.
이처럼 유럽이나 한국의 대표적 수필가들은 모두 사건보다 사유, 체험보다 통찰에 무게를 두었다는 점에서 수필의 본질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보여 준다. 체험 없는 사유, 사건 없는 통찰, 기억 없는 여운만으로도 충분히 수필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 앞으로 수필은 읽기 좋은 사건에서 생각하게 만드는 글로 옮겨 가야 한다. 사건은 선택 가능한 장치일 뿐 필수 요소가 아니다.
그것이 수필을 단순한 감상문에서 깊이 있는 문학으로 끌어올리는 길이다. 이제 수필은 감동 실화의 틀을 벗고, 사유와 통찰의 언어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수필은 감정의 전달보다 사고의 여백을, 사건의 재현보다 진실한 독백을 담아야 비로소 문학으로서의 품격을 회복할 수 있다.
[신기용]
문학 박사
도서출판 이바구, 계간 『문예창작』 발행인
경남정보대학교 특임교수
저서:평론집 10권, 이론서 4권, 연구서 3권, 시집 6권
동시집 2권, 산문집 2권, 동화책 1권, 시조집 1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