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담한 위로다. 마치 저녁에 먹은 된장찌개 같은 담백하고 느끼하지 않으면서 몸에 좋은 그런 담담한 위로를 담은 영화다. 태어나면 살아가야 하고 살아가면 죽어야 하는 자연스러운 여정 앞에 담담한 위로는 위로가 아니라 그냥 삶이다.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는다. 죽음은 좇는 것이 아니라 맞이하는 것이라고 한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 우리에게 그렇게 말한다. 시간이 지나가고 계절이 지나가고 사람이 지나간다. 유럽의 풍경은 때론 따뜻하고 때론 차갑게 흐르면서 사람들의 이야기는 소박하고 격동적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삶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삶일까 생각하는 동안 영화는 이미 내 안으로 무언가를 자꾸 밀어 넣고 있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만나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가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떠올릴 때쯤 안토니아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모계로 이어지는 4대의 이야기는 희로애락조차 지문처럼 삶에 무늬를 새긴다. 안토니아, 다니엘, 테레사, 사라로 이어지는 흐름은 단순한 혈연 이상의 의미를 넘어 여성들이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자신의 재능과 욕망을 숨기지 않으며, 다음 세대에게 자유를 물려주는 과정을 통해 삶 자체로 증명한다.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중년이 된 안토니아는 딸 다니엘과 함께 오랫동안 떠나 있던 고향 마을로 돌아온다. 안토니아는 보수적인 질서 속에서 남편 없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당당하게 살아간다. 안토니아는 마을의 작은 농장을 일구며 상처받고 힘없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집을 내어준다. 그들과 한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마을의 중심이 되어간다.
안토니아의 집은 점점 독특한 공동체가 된다. 지적 장애가 있는 남자, 폭력적인 남편에게 시달리던 여성,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외톨이, 철학을 탐구하는 사색가까지 마을에서 따돌림을 받거나 질서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그녀의 곁에서 따뜻하게 살아가기 시작한다. 딸 다니엘은 총명하고 자유로운 여성으로 자라난다. 다니엘은 결혼제도에 얽매이지 않은 채 스스로 아이를 갖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태어난 손녀 테레사는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지닌 아이로 자라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성폭행을 당한 테레사에게 철학자 아저씨가 말한다.
“세상은 고통받는 영혼과 악마로 가득 찬 지옥이란다”
안토니아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계보와 그녀들이 만들어가는 삶의 흐름은 세대를 넘어 인간사의 질곡의 역사를 만들어낸다. 그 안에는 폭력이 도사리고 있고 죽음이 있으며 슬픔이 있고 사랑이 교차한다. 안토니아가 만들어가는 공동체 안에는 늙고 병들어 세상을 떠나고 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죽고 죽이는 비극적인 사건들도 일어나지만, 안토니아는 그런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 죽음조차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끝내 인간다운 존엄과 유머를 잃지 않는다. 안토니아는 죽음 앞에서 말한다.
“미친 마돈나가 같이 놀자고 부르고 있구나”
파란만장한 인생을 거침없이 산 안토니아의 죽음 앞에 사람들은 경건하게 죽음을 바라본다. 다니엘은 엄마의 죽음을 조용히 바라보며 슬픔을 삼키고 손녀인 테레사는 안토니아의 마지막 숨결의 무게를 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증손녀 사라는 안토니아의 죽음을 지켜본다. 모두 죽음이라는 기적이 안토니아를 데려가려는 그 순간을 지켜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삶은 누구의 것인가. 사회가 정해놓은 질서의 것인가, 아니면 끝내 자기 자신으로 살아내려는 한 인간의 것인가. ‘안토니아스 라인’은 이 질문 앞에서 아주 단단하고도 따뜻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대답한다. 삶은 물 흐르듯이 세대를 이어가는 것이라고, 한 여성의 삶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세대의 흐름을 통해, 인간과 공동체 사랑과 죽음의 의미는 헛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모계로 이어지는 삶은 단순한 혈통이 아니라 정신의 계보로 남는다는 메시지는 그래서 따뜻하면서도 강렬하다.
여성은 강하고 어머니는 더 강하다. 타인의 시선보다 자신이 만든 윤리 안에서 고통에 저항하고 가부장적인 질서에 맞선다. 안토니아의 삶은 놀랍도록 우리네 어머니와 닮아있다.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자식을 지키고 가정을 지키며 공동체를 지키는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놓지 않고 계절처럼 찾아오는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안토니아는 삶을 충분히 살아낸 사람의 고요한 얼굴로 죽음을 받아들인다. 영화가 끝나도 안토니아의 온화한 얼굴이 기억 속에 오래 남는다.
‘안토니아스 라인’이 아름다운 이유는 공동체를 바라보는 방식에 있다. 안토니아의 집에는 ‘정상’의 기준에서 벗어난 소외받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각자의 상처와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충분히 존엄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특히 여성의 계보를 통해 삶이 더 단단해지는 것을 보여 준다. 안토니아, 다니엘, 테레사, 사라로 이어지는 흐름은 단순한 혈연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삶의 의미를 준다. 온갖 인간 군상들을 통해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는 걸 깨닫게 한다.
[최민]
까칠하지만 따뜻한 휴머니스트로
영화를 통해 청춘을 위로받으면서
칼럼니스트와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경제학을 공부하고
플로리스트로 꽃의 경제를 실현하다가
밥벌이로 말단 공무원이 되었다.
이메일 : minchoe29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