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서 칼럼] 감응은 어떻게 사유가 되는가

감응비평의 철학과 윤리

비평은 오랫동안 '이해의 기술'로 가르쳐져 왔다. 작품의 주제를 파악하고 상징을 해독하고 작가의 의도를 추적하는 일이 비평의 핵심처럼 여겨졌다. 자연스레 읽기는 해석을 위한 준비 단계였고, 독자의 '감응'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감응은 정말로 개인적이고, 모호하며, 객관화할 수 없는 것일까? 우리의 독서경험은 그렇지 않음을 증거한다. 우리는 어떤 문장에서 이유 없이 멈추고, 어떤 장면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불편함을 느끼며, 또 어떤 문장은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의미 파악과 해석은 보통 그 과정 이후에나 가능하다.

 

감응비평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몸이 먼저 읽는다"는 명제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텍스트는 분석되기 이전에 이미 독자의 신체에 도달해 있다. 설명하기 어려운 잔여감이나 이상하게 오래 남는 한 문장을 우리는 종종 단순한 감상으로 흘려보내지만, 감응비평은 바로 그 지점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응비평이 감상주의와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 이래의 정동(affect)이론은 정동과 감정(emotion)을 구별해왔다. 정동은 명명되기 이전의 강도이고, 감정은 그 강도가 어떤 이름으로 이미 봉합된 결과다. 감응비평이 거부하는 것은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감응을 너무 일찍 감정으로 닫아버리는 일이다. "느낀 대로 쓰면 된다"는 식의 즉흥적 자기표현은 사실 감응을 가장 빨리 소멸시키는 방법이다. 감응비평은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뭔가 이상했다"는 감각이 먼저였다면, 그것을 성급히 개념으로 봉합하지 않는다. 감응을 제거하는 대신 정밀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응을 사유로 옮기는 과정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막연한 직관의 영역이 아니라 세 겹의 층위를 가진다. 먼저 '멈춤'이다. '읽는 몸'이 어디서 반응하는지를 정확히 짚어내는 일이다. 다음은 '언어화'다. 그 멈춤의 질감을, 그것이 어떤 결을 가진 흔들림인지를 끝까지 추적하며 언어로 옮기는 작업이다. 마지막은 '맥락화'다. 그 감응이 어디서 왔는지 텍스트의 어느 장치가, 독자의 어떤 역사가, 어떤 사회적 배치가 그 감응을 가능하게 했는가를 묻는 단계이다. 

 

가령 어떤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까닭 모를 답답함이 올라왔다면, 멈춤은 그 답답함이 어느 문장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되짚는 일이다. 언어화는 그것이 슬픔이 아니라 '갇힘'에 대한 개인적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진술하는 일이며, 맥락화는 왜 그 갇힘이 독자에게 그런 방식으로 전해졌는지를 따져 묻는 단계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감응비평은 비평의 의미 자체를 다시 묻게 한다. 오랫동안 우리는 창작과 비평을 별개의 영역으로 간주하면서 비평가는 창작자의 의미를 해석하는 이로만 인식해 왔다. 그러나 어떤 글쓰기도 예외 없이 쓰는 과정속에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의미를 생성한다. 비평이 단순한 해설일 수만은 없는 이유이다. 단순히 텍스트를 소비하는 존재가 아닌, 자기 언어 안에서 텍스트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독자의 탄생은 감응비평 생성의 순간이다. 비평은 또 다른 창작이다. 

 

비평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읽기 자체를 민주화한다. 비평이 더 이상 특정한 지식을 가진 전문가만의 권한으로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감응비평이 비평의 무조건적인 대중화나 감정의 즉흥적 표출을 용인하진 않는다. 누구나 비평은 가능하지만, 아무 말이나 비평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감응은 출발점일 뿐, 비평은 그 감응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유의 윤리 속에서 비로소 성립한다.

 

이 윤리가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자리는 공감의 문제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할 때 종종 "이해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타자의 경험은 동시에 내 감정 속으로 흡수될 위험에 놓인다. 그럴 때 타자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니라, 나의 감동을 구성하는 재료가 된다. '이해'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작동하는 자리일 수도 있다. 감응비평은 이 위험을 놓치지 않는다. 감응비평은 완전한 이해를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끝내 남아있는 거리, 번역되지 않는 잔여를 향한다. 윤리는 완전한 동일시가 아니라 끝내 동일화될 수 없는 차이를 견디는 데 있기 때문이다. 감응을 정밀화한다는 것은 결국 이 차이 앞에서 자기감응이 '지나치게 빨리' 이해라는 이름을 갖지 못하도록 절제하는 일이기도 하다.

 

감응비평이 향하는 곳은 분명하다. 감응을 인정하되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감응을 따라가되 타자를 삼키지 않도록 스스로를 절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감정에서 사유로의 이동이며, 동시에 자기에서 타자로의 이동이다. 이럴 때 비로소 비평은 텍스트를 설명하는 기술을 넘어선다. 비평은 인간이 자기 안에 도착한 흔들림을 끝까지 추적하면서, 그 흔들림의 실체를 통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다. 감응이 사유가 되는 순간도 바로 그때이다. 자기 감동에 도취되지 않으면서, 이해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끝내 도망치지 않을 때, 감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살아내는 하나의 윤리가 된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제6회 코스미안상 수상

lsblyb@naver.com

 

작성 2026.05.19 10:49 수정 2026.05.19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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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