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선배들(1) 하나님의 밀알이 된 노병,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사형장 향하는 축제의 발걸음… 사슬 속에서 피어난 '일곱 통의 편지'

"내 고통이 가짜인가"… 가현설(Docetism) 무찌른 노병의 사자후

맹수 이빨에 갈린 자존심… 일상의 밀알이 만드는 '평화의 빵'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만약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길인데, 마치 잔칫집에 가는 사람처럼 들떠 있다면 어떻게 보일까요? 우리가 만날 첫 번째 인물은 초대교회의 거물,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 35?~107?)입니다.

 

그는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세 번째 감독이었죠. 안디옥은 지금의 터키 안타키아(Antakya) 지역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처음 시작된 유서 깊은 곳이지요. 2023년 대지진으로 많은 아픔을 겪은 그 땅이 바로 이그나티우스의 고향이자 사역지였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 치하에서 체포되어 로마의 원형 경기장으로 압송됩니다. 그 먼 길을 쇠사슬에 묶인 채 끌려가면서도, 그는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에 일곱 통의 편지를 남깁니다. 그 편지들에는 죽음을 앞둔 노병의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신앙이 고스란히 박혀 있습니다.

 

당시 교회 안에는 '가현설(Docetism)'이라는 이상한 가르침이 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진짜 몸으로 고난받은 게 아니라, 그냥 홀로그램이나 유령처럼 나타났을 뿐이라는 주장이지요. 이그나티우스는 분노했습니다. "주님이 가짜로 고난받았다면, 지금 쇠사슬에 묶여 죽으러 가는 나의 이 고통도 가짜란 말이냐?"고 사자후를 토했습니다.

 

그는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전율이 돋는 고백을 남깁니다.

 

"나는 하나님의 밀알입니다. 짐승의 이빨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에게 순교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온전한 제자가 되는 최종 단계였습니다. 맹수의 이빨이 나를 갈아버릴 때, 비로소 나는 가짜가 아닌 진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확신이었지요.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밀알'로 정의하며, 세상을 먹이는 거룩한 빵이 되길 갈망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나'라는 자아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웁니다. 직장에서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날을 세우고, 온라인상에서 내 존재감을 증명하려 애를 씁니다. 그런데 이그나티우스는 거꾸로 말합니다. "갈려라, 그래야 빵이 된다."

 

일상에서의 순교는 거창한 게 아닙니다. 가정에서 배우자의 거친 말 한마디를 내 안에서 삭여내며 부드러운 대답으로 돌려주는 것, 일터에서 나의 공을 동료에게 양보하고 묵묵히 뒤처리를 감당하는 것,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내 자존심이 짐승의 이빨에 갈리듯 찢겨나갈 때, 원망 대신 축복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현대판 '하나님의 밀알'입니다. 내가 갈려야 공동체가 먹을 수 있는 '평화의 빵'이 나옵니다. 이그나티우스가 꿈꿨던 미래는 죽음 너머의 천국만이 아니었습니다. 성도가 스스로 밀알이 되어 세상을 배불리는, 지독하게 역설적이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나라였습니다. 

 

우리도 조금씩 갈려봅시다. 사나운 세상의 이빨에 비명이 나오겠지만, 그 틈에서 향긋한 빵 굽는 냄새가 진동하게 될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보다 더 밝은 내일을 만드는 길입니다.

 

 

 

허동보 목사(Rev. Huh Dongbo) | 수현교회(Suhyun Church)
저서 | 『왕초보 히브리어 펜습자』, 『왕초보 헬라어 펜습자』, 『왕초보 히브리어 성경읽기』, 『고난, 절망의 늪에서 피어난 꽃』, 『부와 기독교신앙』, 『그와 함께라면』, 『만남』, 『AI시대, 히브리어로 답하다』 외

 

 

 

작성 2026.05.23 05:37 수정 2026.05.23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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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