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들어가기
디카시가 사진 기호와 문자 기호를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사진 이론의 정합성이 필요하다. 디카시 창작론을 설명하는 글을 보면, 롤랑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 1915~1980)의 사진 이론을 오해석하거나 과잉 해석한 경향이 있다. 이런 이론 착오의 글이 인터넷상에 수없이 떠돌아다닌다. 롤랑 바르트와 관련한 대표적인 세 예문을 든다. 앞의 장에서 다룬 주요 골자를 반복하는 이유는 이론의 오해석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함이다. 다음은 디카시 창작론을 내세우는 이론가들의 롤랑 바르트를 해석한 방식을 다시 살펴본다.
롤랑 바르트가 사진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사진을 바라보는 것이 스투디움이고 주관적 개입이 들어간 것이 푼크툼이라 했는데 디카시는 피사체가 스투디움의 범위를 넘어 푼크툼이라는 주관적 개입이 활자로 나타나 시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스투디움이라는 단순한 피사체에서 푼크툼이란 메시지를 얻고 이미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시와 마찬가지로 피사체를 편리상 대상과 배경으로 나눈다면 대상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디카시는 완전 달라진다.
- - 김왕노, 「김왕노의 시와 디카시 시작법(詩作法)」, 웹진 『시인광장』 2022년 5월호.
구조주의 철학자고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을 보는 법 2가지를 말했다. 작가적 시점에서 보는 스투디움과 독자가 자신의 체험과 연관시켜 보는 푼크툼이다. 당연 디카시를 쓸 때는 푼크툼 즉 피사체를 두고 자신의 체험과 연관시키거나 자신의 창의력을 쏟아붓거나 감정을 이입해 디카시를 완성시킨다.
- - 김왕노, 「디카시의 사진 찍기」, 웹진 『시인광장 디카시』.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에서 푼크툼과 스투디움이란 말에서 디카시의 이론으로 사진을 액면 그대로 보는 스투디움 즉 포토 포엠 측면이나 주관 개입으로 해석되는 푼크툼에 가까운 것으로 디카시를 구분한다.
- - 배선숙, 「사진과 5줄의 힘- 생활시로 시인이 되는 법」, 블로그 『다올 메시저의 책』.
이들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같은 오류 주장이 더 많다. 이들 예문은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을 차용한 디카시론이다. 롤랑 바르트의 사진 보는 법, 즉 사진 해석 이론 용어를 끌어와 디카시 창작이나 해석 이론으로 사용한 대표적인 예이다. 이론적 정합성을 찾을 수 없다.
김왕노와 배선숙이 디카시 이론을 설명하면서 언급한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La Chambre claire)』에 대한 해석 중 일부는 사실과 다르다. 해석의 오작동이다. 심지어 롤랑 바르트의 책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내용을 사실인 양 주장하였기에 이론 왜곡으로 읽히기도 한다.
한국에서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La Chambre claire)』를 번역한 책은 두 권이다. 조광희가 번역한 『카메라 루시다(La Chambre claire)』(설화당, 1986), 김웅권이 번역한 『밝은 방』(동문선, 2006)이다. 이 두 권의 번역서를 토대로 보면,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을 오해석하여 디카시 창작론에 대입하고 있음이 명백해 보인다.
이 글에서는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을 디카시 창작론에서 오해석하여 사용하는 부분을 지적하고자 한다.
2. 김왕노·배선숙 글의 주요 주장 요약
두 사람이 디카시 관련 글에서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요점은 다음과 같다. “스투디움은 작가적 시점에서 보는 것이고, 푼크툼은 독자의 주관적 개입이다.”, “디카시는 푼크툼이 시적 언어로 표출된 것이다.”, “바르트의 이론에 따르면 피사체에서 푼크툼을 얻어야 디카시가 완성된다.”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의 개념을 인용한 것처럼 보인다. 내용상 심각한 착오와 오류가 존재한다.
3.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 개념의 철학적 토대
『카메라 루시다』에서 롤랑 바르트는 사진 감상을 지식의 차원(스투디움)과 상처처럼 다가오는 차원(푼크툼)으로 나눈다. 『밝은 방(La Chambre claire)』(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에서 “사진의 푼크툼은 나를 찌르는(뿐만 아니라 나에게 상처를 주고 완력을 쓰는) 그 우연이다.”(42쪽)라고 강조한다. 이는 분석적 언어가 아니라 순간적 감응에 속한다는 말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를 ‘말로 설명하지 않는 것, 오직 느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라는 말이다.
가, 언어 불가능성과 기호의 한계
롤랑 바르트는 푼크툼을 설명하면서 언어가 경험을 완전히 붙잡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기호학자였지만, 푼크툼을 “분석의 바깥에 있는 감각”으로 남겨 두었다. 푼크툼을 말로 완전히 번역하려는 디카시론은 사진의 본질적 침묵을 깨뜨리고 의미의 잔여를 지워 버린다.
나. 디카시 창작론과의 충돌 지점
디카시론은 푼크툼을 시적 언어의 원천으로 해석한다. 이는 롤랑 바르트의 언어 불가능성 전제와 배치한다. 푼크툼은 창작의 재료가 아니다. 언어 이전의 ‘느낌’이다. 그것을 억지로 언어화하면 푼크툼은 퇴색한다. 따라서 ‘푼크툼 → 언어화 → 디카시’라는 도식은 롤랑 바르트가 강조한 침묵의 철학을 무시하는 해석이다.
4. 명백한 오류 및 착오
첫 번째 오류는 “스투디움은 작가의 시선, 푼크툼은 독자의 감정 개입이다.”라는 식의 해석이다. 스투디움과 푼크툼을 ‘작가와 독자’ 시점으로 나눈 것은 분명한 오류이다.
롤랑 바르트는 스투디움과 푼크툼 모두 관람자(자신)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경험의 차이를 설명한 것이다. 스투디움은 사진을 문화적·사회적 맥락에서 지적으로 감상하는 차원이다. 푼크툼은 예기치 않은 감정적 찔림이나 비자발적 충격이다. 즉, 롤랑 바르트는 둘 다 사진 감상자의 경험 범주로 제시한다. 작가와 독자 프레임으로 분리하지 않았다.
두 번째 오류는 “푼크툼은 언어로 표현되고 시화되어야 한다.”라는 주장이다. 이는 푼크툼이 시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롤랑 바르트는 푼크툼이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적 상처라고 명확히 말한다. 푼크툼은 말로 설명하는 순간, 그 본래성이 손상되며, 침묵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하는 감각이다. 『밝은 방(La Chambre claire)』(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에서 “사진의 푼크툼은 나를 찌르는 그 우연이다.”(42쪽)라고 주장은 말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음에 대한 명시적인 강조이다.
세 번째 오류는 “디카시는 푼크툼에서 출발해야 한다.”라는 전제이다.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 개념은 창작적 원천이 아니다. 사진 감상의 비언어적 결과이다. 롤랑 바르트는 푼크툼을 시적 언어로 옮기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회피한다. 따라서 푼크툼을 언어적 시 창작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바르트 이론과 본질적으로 충돌한다.
네 번째 오류는 “푼크툼은 작가의 창의력으로 디카시화되어야 한다”라는 주장이다. 『카메라 루시다』에 없는 개념이다. 이는 과잉 해석한 결과이다. 또한, 디카시가 주장하는 “사진 속 메시지를 푼크툼이라 한다.”라는 말도 롤랑 바르트는 명시적으로 언급한 바 없다. 롤랑 바르트는 푼크툼을 메시지로 규정하지 않았다. 푼크툼은 감정, 직관, 충격, 감각이자 비체계적인 순간적 감응이다.
5. 나가기
푼크툼은 침묵의 자리이다. 이를 언어화하려는 디카시론의 시도는 바르트의 철학과 배치한다. 롤랑 바르트는 “푼크툼을 지각하는 데 아무런 분석도 나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미지가 충분히 크고, 내가 그것을 자세히 관찰할 필요가 없으며, 내가 사진에 가득한 이미지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60쪽)라고 주장한다. 이는 사진을 ‘설명할 필요가 없음’과 ‘언어 불가능성’에 관한 주장을 강조한 것이다.
푼크툼은 롤랑 바르트에게서 사진의 감각적 핵을 지칭한다. 언어의 제약을 넘어서는 잉여의 영역이다. 푼크툼을 시적 언어로 전환하려는 디카시 창작론은 롤랑 바르트가 말한 ‘상처의 순간’을 설명 가능한 기표로 환원하는 셈이다. 롤랑 바르트의 논의가 지닌 철학적 긴장을 고려할 때, 푼크툼을 언어가 멈추는 자리, 시가 시작되기 이전의 침묵으로 이해해야 한다.
김왕노와 배선숙의 디카시 이론에서의 『카메라 루시다』 해석은 텍스트에 대한 명백한 오해석이다. 해당 내용은 원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롤랑 바르트의 철학적 침묵성과 언어 불가능성의 전제를 완전히 무시한 채, 푼크툼을 언어화 가능한 시적 감흥으로 오해한 것이다. 디카시 창작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롤랑 바르트를 이용한 듯하다. 디카시 창작론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바르트의 사진론이 제기한 ‘언어가 닿을 수 없는 상처의 순간’을 전제 위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디카시 창작론은 바르트 이론을 정합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추가적인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디카시 창작론에서 반복되는 스투디움과 푼크툼 해석이 원전에 근거하지 않은 오독임을 밝혔다. 특히 푼크툼을 ‘주관적 창작 자원’으로 간주하는 해석은 바르트의 언어 불가능성 전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바르트에게 푼크툼은 창작의 출발점이 아닌 설명이 중단되는 지점이다. 디카시 창작론은 이 침묵을 언어로 점유함으로써 이론적 정합성을 상실한다.
[신기용]
문학 박사
도서출판 이바구, 계간 『문예창작』 발행인
경남정보대학교 특임교수
저서:평론집 10권, 이론서 4권, 연구서 3권, 시집 6권
동시집 2권, 산문집 2권, 동화책 1권, 시조집 1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