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서 칼럼] 갈등 이후, 혹은 갈등과 함께

이진서

선거를 앞두고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읽힐지, 나는 약간의 긴장 속에서 이 글을 시작한다. 어느 쪽 편을 들기 위한 글이 아니라는 말조차, 오히려 또 다른 편들기의 언어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오히려 그 긴장을 감추지 않는 것이, 이 글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직함이라고 생각한다.

 

선거가 끝날 때면 늘 같은 말이 반복된다. 승자는 통합을 말할 테고, 패자는 승복을 말하거나 혹은 가열찬 투쟁을 선언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글에서 그들의 진정성을 평가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의 진심이 어떤 정치적 행위로 표출될지, 그것이 우리 사회에 또 어떤 자국을 남길지를 예의주시 중이다.

 

사회는 원래 갈등 속에 존재한다. 서로 다른 삶의 조건, 서로 다른 이해관계,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공간을 살아가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갈등은 병리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공존의 흔적이다. 우리가 돌아갈 온전한 상태란 애초에 없다. 문제는 갈등 자체가 아니라 갈등이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는가이다.

 

사회가 극단화될 때, 대다수의 우려는 극단적인 사람들만을 향한다. 그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극단적 사유는 진공 속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이 벼랑 끝으로 몰릴 때, 제도가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쌓일 때, 사람들은 자주 극단의 언어에 도취된다. 이러한 맹신은 정보 부족이나 왜곡된 인식에도 기인하겠지만, 보다 깊게는 처지의 절박함 속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행태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 선동에 가장 먼저 포획되는 사람들이 대개는 조건이 열악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극단은 정교한 언어와 제도적 외피를 두르고 작동된다. 그러나 그 언어에 가장 깊이 감염되고 가장 큰 대가를 치르는 이들은 늘 그것을 필요로 할 만큼 절박한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가 갈등을 해결해온 방식을 다른 시선으로 성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보의 위치에서는 변화의 요구가 더 절실할 수 있다. 부조리하거나 낡은 관행을 바꾸려는 욕망이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반면 보수의 입장에서는 급격한 변화가 초래할 불안 속에서, 일정한 안정의 지속을 바라는 심리가 더 클 수 있다. 나는 이 두 시선 모두 부분적 진실이라 믿는다. 문제는 이 에너지들이 극단적으로 분출될 때다. 이럴 때, 정치는 서로 다른 부분적 진실들이 상대를 제거하지 않은 채 경합하도록 만드는 기술이어야 한다.

 

나는 오랫동안, 갈등을 해결하려는 선의의 언어조차 때로는 새로운 폭력의 씨앗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숙고해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타자를 '완전히' 이해하려는 욕망이다. 지금 우리 정치가 서로를 향해 구사하는 언어를 성찰해야 하는 이유는, 어느 쪽이든 힘을 갖게 되었을 때 자신과 다른 이들과의 공생을 위해 어떤 정치적 기획을 가지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과연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은 채, 상대를 제압하지도 자기편으로 만들지도 않으면서 함께 살아갈 수는 있는 방편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독재를 포함한 극단의 언어들이 공동체 전체를 잠식하는 시기는 이 위험성을 인지하지도 방안을 모색하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높을 때이다. 진정한 공동체의 위기는 평화와 안전을 가장한 침묵 속에서, 서로 다른 것들이 충돌하고 수정되고 다시 연결되는 그 자리를 소거해버릴 때 비로소 발생한다.  

 

정치철학자 이졸데 카림은 자신의 저서 《나와 타자들》에서 타자를 이해하려는 욕망 자체가 하나의 폭력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타자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타자를 나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고, 번역이 완성되는 순간 타자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동화된 타자, 포섭된 타자, 설명이 끝난 타자 — 이 세 형태는 형식은 달라도 본질이 같다. 타자성의 소거다. 카림이 주목하는 것은 오히려 번역되지 않는 것, 끝내 나의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 그 잉여야말로 관계를 살아있게 한다는 역설이다. 타자가 타자인 채로 곁에 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공동체는 침묵이 아닌 긴장 속에서 지속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태도를 하나의 실용주의적 노선이라고 부르고 싶다. 실용이란 타자를 자기화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타자인 채로 함께 긴급한 문제를 향해 움직이는 능력이다. 상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동시에 인정하는 것. 차이를 지우지 않은 채 차이와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는 절실하다. 그것이 오늘 한국 정치가 견뎌야 할 최소한의 무게이기도 하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제6회 코스미안상 수상

lsblyb@naver.com

 

작성 2026.05.30 10:07 수정 2026.05.30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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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