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달콤한 인생

이태상

하나의 다른 언어는 하나의 다른 시각이요 비전이다. 1993년 향년 73세로 타계한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페데리코 팰리니(1920-1993)의 말이다. ‘길’, ‘카비리아의 밤’, ‘달콤한 인생’, ‘영혼의 줄리에타’, ‘8과 1/2’ 등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20여 편의 명작을 남긴 그는 다섯 차례나 오스카상을 탔고 칸영화제 대상, 골든 글로브상 등을 수상했다. 세상과 현실을 반영해 단지 이를 복사하는 영화감독들과는 달리 그는 자신 고유의 세계를 만들어 낸 요술쟁이이었다. 그는 특히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 성(性)과 사랑과의 관계를 깊이 다뤘고 섹스를 예찬했다. 그에게는 신이 여신이었으며 여자가 곧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남자들을 자극하고 흥분시켜 매혹하는 모든 것의 전부를 말이다. 

 

‘달콤한 인생’에 나오는 마르첼로에게 있어 여자는 어머니, 누이, 딸, 연인, 천사, 고향 집 등 모든 것을 뜻한다. 소년 시절 가출해 곡마단을 따라다녔던 그의 영화에선 삶이 하나의 서커스일 따름이다. 남녀노소 모든 어린이가 즐길 수 있는 것, 그 자신이 나이를 먹어도 늙지도 않고 정서적으로 만년 젊은 어린아이였기 때문이었으리라. 아, 정말 그의 말대로 언어가 비전이라면 우리가 늘 쓰는 말부터 잘 골라 써야지. 인생 80여 년 산다 해도 우리 길 가는 동안 달콤한 인생 살려면, 달콤한 말만 해야 하리라. 이러쿵저러쿵 못 살겠다. 어쩌고저쩌고 죽겠다느니, 제발 그러지 말고, 한껏 재미있게 살아보리. 

 

이러면 이래서 탈이고, 저러면 저래서 탈이며, 이래저래 말썽꾼 되지 말고 소꿉놀이하는 어린이 되리. 슬픈 노래 부르는 가수, 슬프게 살다 일찍 죽고, 웃고 웃기는 광대, 즐겁게 오래 살지 않나. 저 명심보감의 경구처럼 남의 그릇됨 듣지 말고 남의 잘못 보지 말고 좋은 것만 듣고 보리. 흉보고 욕하며 저주하는 심술꾸러기의 양로원보다 천방지축 웃으며 뛰노는 장난꾸러기의 유치원이 되리. 인생 80여 년 살고 지고 ‘달콤한 인생’ 삶이란 우리들의 어린 유년 시절 그 ‘8과 ½’이잖는가. 모두가 한없이 경이롭고 모두가 한없이 신비롭고 모두가 한없이 아름다운 동화 같은 세상이지!

 

미국 작가 필립 로스(1933-2018)가 그의 작품 ‘방송 중’에서 말하듯이 세상이 일종의 쇼라면 우리 모두 저 하늘 높이 계신 대연출가가 물색, 스카우트해놓은 탤런트로 대 인생쇼에 출연하는 것이라면, 인생의 목적이 오락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오늘날 우리 현실이 마치 영화 같지 않은가. 전쟁영화, 괴기영화, 연애영화, 탐정영화, 비극영화, 희극영화, 도색영화, 만화영화, 공상영화, 환상영화 등

 

Magic 마술, 요술을 믿느냐는 질문에 해리 포터의 작가 J.K. Rowling 은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는데 삶 이외의 Magic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리라. 그래서 일찍이 영국의 시인 퍼시 비쉬 쉘(1792-1822)는 이렇게 말했나 보다.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오늘 이 시대의 사람과 아주 다른 사람이 되는 것, 호박을 마차로, 쥐를 말로, 천한 것을 귀한 것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을 모든 것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어린아이마다 제 영혼 속에 요술 부리는 요정이 있는 까닭이다.” 시인은 철들면 끝이란 말이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 했던가. 시인 홍승무는 ‘반딧불이 흐르네’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반딧불이 빗물처럼 흘러내리네. 

산천은 고요히 잠이 들고 

반월은 하늘에 떠서 가는데 

아아, 아아, 하늘에는 별무리

땅에는 반딧불이 냇물처럼 흘러내리네.

 

서양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리스의 의학자 히포크라테스의 말 그대로 정녕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면 그 하나의 스승으로 미국의 시인 시드 코만(1924-2004)은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의 일련의 자화상에서 인생의 덧없음과 예술의 지속성을 발견한다. 처음부터 그는 그의 모든 작품의 표준이 될 지능을 발견했다. 등급 매기기의 표준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자기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실감케 해주는 표준, 이미 살아 있고 현재도 살고 있는, 삶이 주로 얼굴과 손에 스며든 삶의 표정을 나타내기 위한 표준말이다.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가 세상 떠난 다음에도 살아 있는 사람들을 언제나 감동시킬 것은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불가사의하도록 기묘하고 엄정한 정확성이다. 우리 모두 하나같이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유한한 목숨이지만 우리 생명 어딘가 마음속 근저에 가슴의 지능 속에 삶이 살아있음이 영속적으로 지속된다는 깨우침의 빛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의 재능이다. 그의 냉혹한 외고집과 용기, 그 솔직성과 진실성이 그 손에 확연히 나타난다. 그리고 그의 작품 아니 그의 삶이 우리가 무엇을 아직 배워야 할 것인지를 똑똑하게 납득시켜 우리의 자각심을 일깨워준다.

 

세상에 삶을 사는 인생예술가 말고 다른 예술가가 없음을, 꿈꾸듯 삶을 살고 나눌, 삶의 예술 없이 인생 삶이 없다는 것을. 그럼 이런 예술이란 어떤 것일까? 어쩌면 1998년에 나온 일본 철학자 나가이 히토시의 책 제목 그대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철학하기’가 아닐까. 그렇다면 어린이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저자의 생각대로 어린이의 마음이란 존재에 대한 경이를 품는 마음이다. 다시 말해 우주 대자연의 삼라만상이 너무도 신비롭게 있다는, 더할 수 없이 경이로운 사실에 감탄하며 신기로이 바라보는 마음이다. 이것이 반딧불을 보는 시인의 눈이 아닐까. 옛날 청소년 시절 사무엘 울만(1840-1924)이란 미국인이 쓴 ‘인생 80 고개에 서서’란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보고 하도 좋아서 이것을 나의 좌우명으로도 삼았다. 

 

‘열정을 갖고 살라’

 

젊음은 인생의 

어느 한 시기가 아니고

정신상태 마음가짐이다.

 

의지의 발로이고 

상상의 날개이며

삶의 원동력이다.

 

겁먹지 않음이고

주저함 없음이며

만난을 극복하는 용기

그리고 무사안일보다

모험을 좋아하는 탐험심이다. 

 

나이를 먹어서가 아니고

이상을 버릴 때 사람은 늙는다. 

나이는 피부의 주름살을 만들지만

삶의 열정과 의욕을 잃으면 

마음과 혼이 주름지고 시든다. 

 

걱정과 근심

망설임과 자신 결핍

두려움과 절망

이런 것들이 

하늘로 오르던 기상을 꺾고

불타는 정신을 꺼버린다. 

 

나이가 여든이든 

예순이든 열여섯이든 

모든 사람 가슴속에는 

자연의 신비와 조화에 

경이로워 감탄하는 동심이 있다. 

별을 보고 내일을 점치는 궁금증과 

호기심에 찬 삶의 기쁨이 있다.

 

네가 갖는 신념과 자신감과

희망만큼 너는 젊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한  

너는 젊었고 너는 살아 있다.

 

네 가슴이 

비관과 냉소로 얼어붙는 날 

네 삶은 끝난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국민은 파나마, 파라과이 등 중남미 국민이란 조사 결과가 보도되었다. 한국은 하위권인 97위, 미국과 중국은 공동 33위, 일본은 59위였으며 최하위는 싱가포르로 나타났다. 이는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148개국에서 15세 이상 국민 1,000명씩을 대상으로 일상생활에서 느낀 긍정적 감정을 조사해 공개한 결과에서 드러났다. 몇 년 전 한 지인에게 들은 얘기다. 중미 파나마로 여행 중 한 선물가게에 들려 행운을 가져오는 장신구 챰 같은 게 있느냐고 묻자 나이 든 아메리카 원주민 주인이 씩 웃으면서 묻더란다. 

 

“살아 있는 것 이상의 어떤 다른 행운을 원하시오?”

 

스위스의 정신병학자이며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1875-1961)은 선사시대로부터 지금의 뉴멕시코와 애리조나주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온 토인부락을 뜻하는 푸에블로란 아메리칸 인디언 거주지로 여행 중 한 추장을 만났다. 

 

“당신은 아시오? 백인들이 우리 눈에 얼마나 잔인하게 보이는지. 입술은 얇고 콧날은 날카로우며 얼굴은 밭고랑 같이 주름지고 뒤집혀 있지 않소. 눈으로는 무엇인가를 늘 노려보며 도대체 뭘 찾는 것이오? 백인들이 항상 초조하고 불안해하면서 무엇을 그렇게 탐내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오. 우리가 보기에는 백인들이 미친 것 같소.”

 

이 추장의 말에 융이 “왜 그렇게 백인들이 미쳤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추장이 대답하기를 “다들 그러는데 백인들은 머리로 생각한다면서요?” 이에 융은 ‘사람이 물론 머리로 생각하지, 당신들은 뭐로 생각한다는 말이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추장은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생각한다오”라고 대답하더란다. 여행을 잘하려면 짐이 가벼워야 한다. 인생 여로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머리가 곧 정신이고 따라서 빛이나 공기처럼 머리가 가벼워야 한다. 아무렇게나 굴려도 오뚝 서는 아이들 장난감같이 말이다. 

 

험난한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어른들도 오뚝이처럼 머리가 가벼워야 하리라. 그뿐만 아니라 머리보다 마음이 가벼워야 한다. 마치 고양이가 야옹하는 장난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심각한 체하는 것은 아직 떫을 때라 하고, 젊어서는 비극을 좋아하다가도 나이 들면서는 희극을 좋아하게 되는가 보다. 장난기가 인간의 실존적 짐을 가볍게 해주고, 신화학자 조제프 캠벨(1904-1987)이 말하는 ‘살아 있음의 환희’를 맛보게 해주는 것이라면 이것이야말로 노장철학의 도교, 힌두교, 선불교 및 수피라고 불리는 이슬람교의 신비주의 가르침의 핵심이라 할 수 있으리라. 

 

마지막 순간 사형집행관에게 농담하는 사형수는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극복하는 것이다. 어떤 선승이 창밖의 다람쥐가 뛰노는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바로 저것이었구나!’하는 감탄사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런 일화들을 보면 만화와 우주상 사이에 경계선이 없으며 그러한 변두리 변경에서 정신적 영적 갱생에 이르는 출입구가 발견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일까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을 때 신들은 그의 심장을 저울에 달아 그 무게가 깃털보다 가벼워야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게 해준다고 믿었다. 

 

스페인의 노벨문학상 수상(1956년)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1881-1958)는 ‘누가 네게 줄 처진 종이를 주거든 줄이 없는 뒷면에다 글을 쓰라’고 충고한다. 세계문학에서 남미문학이 환상적이고 더 흥미진진한 것은 현실적인 인간세계뿐만 아니라 꿈과 신화, 영과 육, 생물과 무생물, 자연계와 영계, 이승과 저승을 다루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도 기지나 슬기란 고난이나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가 장난기만 있으면 어떤 괴로움도 우리 삶을 지배하지 못하리란 뜻인 것 같다. 신(神)의 눈으로 본다면 입술을 굳게 다문 영웅이나 눈물 짜는 패자보다 코끝이 빨간 광대가 훨씬 더 사랑스럽지 않을까?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 익살꾼이다. 서양의 유머가 인격으로 스스로를 웃기는 일이라면 코미디는 성격으로 남을 웃기는 일이며 조크는 말 자체를 웃기는 말장난이다.

 

우리 한민족의 구수한 입담과 재치,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마당놀이’는 신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가히 신격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우리 고유의 마당놀이 한바탕 질펀하게 놀아볼거나.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

 

작성 2026.05.30 10:08 수정 2026.05.3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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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