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용 칼럼] 이론적 수동화, 디카시론

디카시 담론의 문제점

1. 들어가기: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시

2000년대 이후,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문학의 표현 방식에도 변화를 요구해 왔다. 디지털 시(digital poetry)의 하위 개념인 ‘디카시(디지털카메라시)’는 사진 한 컷과 짧은 문장을 결합한 새로운 형식의 시로 주목받았다. 디카시의 창시자로 알려진 이상옥은 정유지의 디카시집 『페이스메이크』(2024) 해설에서 “영상 기호 한 컷과 한 줄의 언술이 화학적으로 결합하여 불꽃으로 드러내는 메시지”라고 설명한다. 또한, 디카시를 “예술과 기술이 한 몸이 되는 아트테크 현상”, “현실과 예술이 한 몸이 되는 리얼리티 아트”로 규정한다. 이러한 주장은 언뜻 참신하게 들린다. 실제 이론적·개념적 분석의 관점에서 보면 많은 비판적 질문을 유발한다.

 

디카시 담론은 지난 20여 년 동안 주로 창작자 내부의 선언과 감각적 수사에 의해 주도해 왔다. 즉, 디카시는 하나의 창작 실천으로서는 활발했지만, 그 형식적 특성과 미학적 근거를 정교하게 검증하는 비평적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디카시는 기술의 변화라는 외적 조건을 근거로 새로운 시 장르의 등장을 정당화하는 기술결정론적 서사를 반복한다. 정작 사진과 언어라는 이질적 기호 체계가 어떻게 의미를 생산하는지에 관한 기호학적·매체이론적 분석은 부재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 글이 말하는 ‘이론적 수동화’란 바로 이러한 상황을 가리킨다. 즉, 디카시론은 개념의 명료화와 비평적 검증을 거치지 못하고, 창작자의 직관과 은유적 표상에 의존하여 스스로 이론적 근거를 구성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글은 이러한 수동화의 구조를 드러내고, 디카시가 문학적 장르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반드시 검토해야 할 기호학적·매체이론적 조건을 재정리하고자 한다.

 

2. 디카시의 문제점

가. 사진을 영상 기호라고 부른 것에 대한 문제
 

사진을 ‘영상 기호(Cinematic Symbol/Audiovisual Sign)라고 명명하는 것은 다소 개념적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보통 ‘영상’이라는 말은 움직이는 이미지(동영상, 영상물)를 떠올리게 한다. ‘사진’은 정지 이미지(still image)로 분류한다. 기호학적 관점에서 사진은 시각적 기호로 해석한다. 이를 영상 기호라고 하는 것은 부정확한 것이다.

 

사진은 ‘영상 기호’보다는 ‘시각적 기호(Visual Symbol/visual sign)’ 또는, ‘이미지 기호(image sign)’로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영상 기호’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영화, 방송, 광고 영상 등의 동적 이미지에 더 가깝다. 이를 의식한 듯 이상옥은 『디카시와 철학』(2025)에서 슬그머니 ‘사진 기호’와 ‘문자 기호’로 기술한다. 일반적으로 분명한 것은 사진 기호와 영상 기호는 구분해야 타당하다.

 

나. 영상 기호와 문자 기호를 멀티 언어로 보는 견해 비판

 

‘멀티 언어(multi-language or multilingualism)’는 보통 여러 자연어의 사용(예: 한국어+영어+일본어)을 의미한다. 이상옥은 영상 기호(사진)와 문자 기호(텍스트)를 조합한 표현 양식을 ‘멀티 언어’라고 부른다. 이는 일반적 정의와 어긋난다. ‘다중 기호 체계(multimodality)’ 또는 ‘복합 기호 표현(multicode expression)’이 더 타당하다. 디카시는 ‘멀티 언어’라기보다는 ‘다중 기호 양식의 시(multimodal poetry)’이다. 예를 들면, 사진(시각적 기호) + 텍스트(언어적 기호)의 조합이다.

 

이상옥의 디카시에 대한 설명은 디카시의 형식적 특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기호학적 정확성 혹은 매체 언어학적 엄밀성에서는 용어 선택에 신중함이 부족한 부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디카시는 ‘멀티 언어’라기보다는 ‘멀티모달(multimodal)’ 또는 ‘다중 기호 체계에 기반한 현대 짧은 시’로 규정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더 타당하다.

 

다. 언술이라는 표현의 문제점
 

‘언술’이라는 표현은 시적 언어의 함축성과 은유성보다는 산문적이고 설명적인 언어에 가깝다. 시는 언술이 아닌 시적 언어의 집합이어야 한다.

언술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사실을 자세히 말함.”(《표준국어대사전》)이다. 이처럼 언술은 자세히 설명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디카시는 사진을 설명하는 시라는 것을 창시자 스스로 주장한 것이다.

 

‘언술’이라는 용어는 보통 진술, 명제, 발화를 의미한다. 이는 시보다는 담론적 언어에 속한다. 디카시의 언어가 종종 짧은 산문, 또는 직설적인 정서 표현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언술’이라는 표현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언술의 본질을 표현하면, 시의 고유한 언어적 긴장과 운율, 함축성과는 괴리 현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디카시가 시적 완결성보다는 상황적, 순간적 설명 전달에 중점을 두는 문학 갈래로 오해받을 가능성을 내포한다.

 

라. 화학적 결합이라는 은유의 부적절성

 

사진과 텍스트의 관계를 ‘화학적 결합’으로 본 것은 본질적으로 이 둘이 융합된 하나의 매체가 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실제로는 예술적 병치, 즉 병렬적 구성에 가깝다.

 

‘화학적 결합’은 융합(fusion), 통합(integration), 혹은 불가분의 혼합을 의미한다. 이는 디카시에서 사진과 텍스트가 별개의 기호 체계로 병존하는 현실과는 상충한다. 즉, 인문학적 오류임과 동시에 과학적 오류이다.

 

이상옥이 사용하는 ‘화학적 결합’이라는 은유는 사진과 텍스트가 하나의 제3의 매체로 융합된다는 인상을 주지만, 디카시의 실제 구조는 기호 체계의 병치에 더 가깝다. 이 점에서 ‘화학적 결합’은 디카시의 구성 원리를 설명하기보다 수사적 과장에 가까운 개념이다.

 

이 병치는 때때로 미학적 긴장감과 독자의 해석 개입 여지를 남기는 장점이 있다. 단일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롤랑 바르트가 사진과 하이쿠는 “화학적 작용이 현상하는 것은 현상 불가능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아래와 같이 읽어 본다. 

 

“사진을 현상한다”는 말은 어휘상의 술책이다. 그러나 화학적 작용이 현상하는 것은 현상 불가능한 것이고, (상처가 있는) 본질이며, 변형될 수 없지만 다만 집요함(집요한 시선)의 형태로 반복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은 사진(일부 사진들)을 하이쿠와 접근시키게 해준다. 왜냐하면 하이쿠의 기호 체계 역시 현상(상술)할 수 없기 때문이다.

  • - 롤랑 바르트, 『밝은 방』,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 67-68쪽.

 

인용문처럼 롤랑 바르트는 사진과 하이쿠의 관계를 ‘화학적 결합’의 관계가 아닌 둘 다 ‘현상 불가능한 상태’, 즉 ‘현상(상술)할 수 없는 기호 체계’임을 강조한다. 이상옥이 주장한 ‘화학적 결합’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 

 

요컨대 롤랑 바르트의 논의는 사진과 하이쿠가 공유하는 ‘현상 불가능성’의 층위를 밝히는 것이지, 서로가 융합해 새로운 매체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점을 고려하면, 바르트를 동원하여 사진과 텍스트의 결합을 정당화하는 이상옥의 해석은 이론적 지향 자체가 어긋난다.

롤랑 바르트의 사진론은 이미지와 언어의 융합을 말하기보다, 각 기호 체계가 지닌 침묵·강도·지시 불가능성의 문제를 드러낸다. 따라서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은 디카시의 ‘병치적 구조’를 설명하는 데에는 유효하지만, ‘화학적 결합’이라는 수사적 융합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쓰일 수 없다.

 

나아가 롤랑 바르트는 하이쿠를 “물자체를 불러내는 것”이라고 담론화한다. 아래와 같이 읽어 본다.

 

극단적으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적은 말로 시도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물자체를 불러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이쿠는 힘과 효율성의 극한으로서의 언어이자, 정말로 언어를 보상하고, 언어에 사례를 하는 것으로서의 담론입니다.

  • -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변광배 옮김, 민음사, 2015, 79쪽.

 

이 대목에서 롤랑 바르트가 강조하는 것은 하이쿠가 언어의 경제성을 통해 ‘직접 재현될 수 없는 것’을 환기한다는 점이다. 이는 이미지와 언어가 서로 융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각각의 기호 체계가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현실의 잔여를 호출하는 방식임을 강조한 것이다.

 

달리 말해, 롤랑 바르트의 하이쿠론은 이미지와 언어 결합의 미학이 아니다. ‘기호의 불투명성’과 ‘현상 불가능성’에 관한 논의이다. 이 관점은 디카시를 ‘융합 매체’로 보려는 이상옥의 설명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사진과 텍스트는 디카시에서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나 기호학적으로는 독립성을 유지한다. 이 둘을 ‘화학적 결합’으로 명명하는 것은 매체적 성질을 과도하게 통합적으로 해석한 표현이다. 디카시의 실질적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다시 설명하자면, 롤랑 바르트는 사진과 하이쿠를 ‘화학적 결합’의 사례로 보지 않는다. 그는 사진과 하이쿠가 공통적으로 지닌 특징을 ‘현상 불가능한 것의 환기’, 곧 언어와 이미지 모두가 어떤 실재를 직접 재현할 수 없다는 기호적 불투명성에 둔다. 롤랑 바르트가 하이쿠를 “물자체를 불러내는 것”이라고 말한 것도, 언어가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이 아닌 재현 불가능성을 극도로 압축해 드러내는 방식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롤랑 바르트에게서 중요한 것은 융합이나 결합이 아니다. 각 기호가 지닌 불가해성과 잔여성의 층위이다. 이는 이상옥이 말하는 ‘화학적 결합’ 은유와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마. 리얼리티 아트라는 개념 사용의 문제

 

이상옥이 디카시를 ‘리얼리티 아트’로 규정하는 것은 디카시가 사회적 현실에 직접 참여한다는 전제를 내포한다. 실제 디카시는 사회 비판적 리얼리즘보다는 순간적 감정과 감각의 표출에 더 가깝다. 따라서 이 명명은 디카시의 창작 경향과 이론적 토대를 모두 과도하게 일반화한 것이다.

 

‘리얼리티 아트’라는 개념은 디카시가 현실 참여적 예술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정작 디카시는 감각·정념 중심의 표현에 치중한다. 개념과 실제 창작 경향 사이의 간극 때문에 이 규정은 개념적 정확성보다 수사적 장식에 가깝다.

 

또한, 디카시는 그가 주장하는 이론대로 창작한 디카시에서 그 한계를 드러낸다. 종종 감정 표현의 직접성, 주관성, 감각적 자극의 반사적 대응에 의존한다. 그렇다면, ‘리얼리티 아트’라는 명명은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자신의 이론과 상반하는 자기모순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디카시는 ‘리얼리티 아트’보다는 감각 중심의 표현주의(expressionism), 또는 즉각적 정서 표출의 미디어 시학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라. 소결론

 

이상옥은 디카시의 예술적 지위를 강화하고자 미학적 은유(화학, 기술, 리얼리티 등)를 차용했다. 그 개념들은 디카시의 실제 구성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이는 개념적 혼동을 야기할 수 있는 자기모순의 설명이다. 디카시에 대한 문체적, 기호학적, 미학적 성찰의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3. 주요 문제점 논의 

가. 디카시의 언어: 언술인가, 시인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상옥은 디카시를 ‘언술’이라 표현한다. 사진과 짧은 문장의 결합을 강조한다. ‘언술’이라는 말은 시의 언어라기보다는 산문적 진술이다. 즉, 논리적 진술이나 사실 전달에 가까운 문체이다. 이는 시가 지녀야 할 언어의 긴장미, 함축성, 음악성 등과 상충한다. 실제 많은 디카시 작품이 감정의 직접 표출이나 단순 묘사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시적 언어보다는 산문적 감정 표현의 단문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문체적 특징은 디카시의 대중성과 소통 가능성을 높이는 측면이 있다. 시라는 문학 갈래로서의 예술적 정당성에 의문을 품게 만든다. 즉, 디카시는 시의 언어적 특수성과 본질에 대한 이론적 성찰 없이, 단순히 ‘짧음’과 ‘이미지 결합’을 근거로 시라고 선언한 셈이다. 이론적으로 빈약해도 너무 빈약하다. 

 

나.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 병치인가, 결합인가

 

이상옥은 디카시에서 이미지와 문장을 ‘화학적 결합’이라 표현한다. 이 비유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상호 작용하여 완전히 새로운 제3의 매체로 융합한다는 인상을 준다. 실제로 디카시에서 두 매체는 그렇게 융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각의 매체가 병렬적으로 병치(juxtaposition)한다. 의미의 충돌이나 긴장을 유도한다.
 

기호학적으로 보면, 이는 ‘다중 기호 체계(multimodality)’, 혹은 ‘복합 코드 구조’에 해당한다. 엄격히 말하면, ‘화학적 결합’이라기보다 예술적 병치, 혹은 상호 간섭(intersemiotic interference)에 가깝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상옥은 이를 기술과 예술이 융합한 ‘아트테크’라 명명한다. 개념적 오류이다. 개념적 엄격성 없이 수사적으로 포장한 것이다. 이는 디카시의 구성 원리를 이론적으로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한 채, 모호한 은유로 대체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 현실성의 표방: 리얼리티 아트인가, 직접 정서의 노출인가

 

이상옥은 디카시를 “현실과 예술이 한 몸이 되는 리얼리티 아트”로 정의한다. 디카시는 사회적 현실을 조명하거나 비판하는 현실주의적 시각보다는, 개인의 정서와 감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훨씬 강하다. 디카시는 종종 자연 풍경, 일상적인 장면, 순간적 감정의 반응을 간결하게 표출하는 데 집중한다. 이는 리얼리즘보다는 감성 중심의 표현주의에 더 가까운 특성을 가진다.

 

‘리얼리티 아트’라는 규정은 디카시가 어떤 현실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현실을 어떻게 예술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비판적 자기 인식 없이 사용된 개념어로 보인다. 리얼리즘의 적확적인 의미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디카시를 둘러싼 개념적 혼란은 단순한 용어 선택의 오류가 아니라, 기호 체계 간 관계를 규정하는 매체 이론의 핵심 원리를 간과한 데서 비롯된다. 현대 매체 이론은 서로 다른 기호 체계가 결합할 때 ‘융합’(fusion)이 아니다. ‘이행’(transition), ‘전이’(transfer), ‘간섭’(interference)으로 설명하는 것을 일반 원리로 삼는다. 즉, 이질적 기호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매체로 통합하기보다 서로의 경계를 흔들고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의미를 발생시킨다. 

 

이 관점에서 보면, 디카시는 사진과 텍스트가 하나의 제3의 매체로 융합되는 형식이 아니다. 두 기호 체계가 서로의 여백을 파열시키며 새로운 해석적 공간을 만들어 내는 ‘간극의 미학’으로 해석될 때, 비로소 이론적 위치를 갖는다. 이상옥의 이론적 수사는 이 간극을 소거하고 두 매체의 경계를 무리하게 통합하려 했다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비일관적이다. 

 

따라서 디카시의 이론적 정당성은 융합이라는 은유가 아니다. 기호 간의 이질성과 전이, 간섭에서 발생하는 다층적 의미 생성 과정을 분석하는 데서 확보한다. 이러한 관점은 바르트의 사진·하이쿠론뿐만 아니라, 현대 매체시학과 해체주의 기호학의 공통된 원리와도 일치한다. 

 

결국, 디카시의 본질은 ‘하나가 되는 예술’이 아니다. 둘이어서 발생하는 틈의 미학이다. 바로 그 틈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시성(詩性)을 구성하는 이론적 토대이다.

 

4. 나가기: 이론적 수동화 상태의 디카시론

디카시 담론은 감각과 수사의 선언에 그치는 경향이 있다. 기호학적·해체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디카시는 단순히 현실을 포착하는 형식이 아니다. 기호 간의 간극과 충돌을 탐색하는 다층적 언어 실험의 장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디지털 환경에서 이미지와 언어의 병치가 만드는 의미의 유동성을 사유할 때, 디카시는 자기 갱신의 가능성을 얻는다.

 

이상옥의 디카시론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표현 형식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창의적인 기획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이 문학 이론의 기반 위에서 창작된 개념이라기보다는, 감각적 수사와 경험적 직관에 의존한 실천적 선언이라는 한계도 분명히 드러난다.
 

‘멀티 언어’, ‘화학적 결합’, ‘리얼리티 아트’, ‘아트테크’ 등 그가 사용한 개념들은 대체로 이론적으로 정교하게 정립한 것이 아니다. 그 개념 간 관계도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없다. 이는 디카시 담론이 비평적 검증에 대응할 ‘이론적 무기’가 없음을 보여 준다.

 

디카시가 문학의 한 갈래로 자리매김하려면, 창작의 실천성만이 아닌 이론적 정당성과 개념적 명료성, 문학적 깊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반드시 병행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디카시 담론은 지금의 수사적 개념 사용에서 벗어나, 이미지와 언어가 만들어 내는 기호적 간극·충돌·미끄러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방향으로 이동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야 비로소 디카시는 단순한 감각적 형식이 아니라 현대 매체시학적 실험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지금까지 디카시 담론이 개념의 정교화 없이 은유와 선언에 의존해 이론을 구성해 온 과정을 ‘이론적 수동화’로 규정했다. 사진을 영상 기호로 부르거나, 문자·이미지를 ‘멀티 언어’로 설명하는 용어 사용은 기호학적 엄밀성을 결여한다. 이러한 개념 혼란은 디카시를 이론적으로 방어 불가능한 상태로 만든다. 문제는 형식이 아니라, 형식을 설명하는 언어의 부재이다.

 

 

[신기용]

문학 박사

도서출판 이바구, 계간 『문예창작』 발행인

경남정보대학교 특임교수

저서:평론집 10권, 이론서 4권, 연구서 3권, 시집 6권

동시집 2권, 산문집 2권, 동화책 1권, 시조집 1권 등

이메일 shin1004a@hanmail.net

 

작성 2026.06.10 11:24 수정 2026.06.10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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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