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칼럼] 아침해가 눈동자를 두드리면

김은영

어리얼싸 도래춤을 추렁추렁 출거나

이 세상 처자들이 손에 손을 쥔달시면

넓은 바다 빙빙 돌며 도래춤도 출거외다

도래춤도 출거외다 빙빙빙빙 바다 돌며

 

-김억, 도래춤

 

 

민요풍의 이 가락은 언제 불러도 흥겹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인류 종말의 재앙의 엄연한 과학적 경고가 있은 지도 오래되고 그 경고가 현실적인 문제로 확연하게 드러남에도 정치인들은 그 경고조차 거짓이라고 흘러가는 세태 속에서 좌절해 가던 어느 날 그 노래가 떠 올랐던 것 같다. 우리 민요의 운율에 7·5조의 시를 얹은 정주 오산학교 김소월과 백석의 스승 김억 선생님이 고맙고 그 시에 서양음악을 공부하셨어도 우리의 장단으로 작곡해 주신 박태준 선생님을 고마워한다. 이 노래는 동요가 아니다 온 인류가 손에 손을 잡고 넓은 바다를 빙빙 돌며 춤추는 생명공동체의 춤을 그려준다.

 

아침 해가 침실의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잠들어 있는 내 눈동자를 두드리면, 그때부터 내 몸의 리듬이 하루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 뇌를 하나의 정원으로 그려 보곤 한다. 신경세포는 나무가 되고, 신경이 지나는 길은 나무 속의 메세지를 전하는 전령사가 나무와 나무를 달려 나가서 정원 전체에 오솔길로 연결되는 정원. 그 정원의 이야기로 하루를 따라가 보면 이렇다.

 

아침해가 내 눈동자를 두드리면 내 망막 속에는 작은 세포, 빛을 감지하는 세포가 ‘아! 아침 햇빛이구나!’ 하면서 뇌 정원의 깊숙한 곳에 있는 시계에 신호를 보낸다. 시계는 ‘알았어 내 시계를 맞추어야겠군.’ 하면서 11분을 앞당겨놓는다. 이 시계는 매일 이렇게 한다. 자신의 기계가 하루 24시간보다 11분 늦게 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아침이야' 하고 맞추어 놓고 그 다음에 하는 일은 뇌간에 있는 '청색 반점'에 신호를 보내 각성의 전령사를 정원 전체에 내보내라고 명령한다. 각성 전령사들은 청색 반점에서 빠져나와 뇌정원 전체로 퍼져나가 잠들어 있던 신경 나무를 깨우기 시작한다. 신경 나무들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다. 정원의 모든 신경나무들이 일을 하기 시작한다. 심장이 박자를 올리고, 체온을 조절하고,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을 내어 하루에 해야 할 일과 과제를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밤이 오면 같은 정원 속에 심어진 시계는 반대의 일을 한다. 청색 반점에게 신호를 보내어 불을 끄라고 한다. 그리고 솔방울을 닮은 작은 샘에게 신호를 보내서 잠의 전령 멜라토닌을 흘려보내라고 한다. 뇌정원의 신경 나무들은 알아차린다. ‘이제 밤이야, 몸이 쉬어야 해'하면서 몸은 쉬게 하고 자신들이 밤에 처리해야 할 일들을 준비한다. 우리 몸은 이렇게 매일, 켜지고 꺼지고, 일어나서 일하고 잠자고를 반복한다. 해와 달의 장단에 맞추어 그 장단 을 달리해 하루가, 한 주일이, 한 달이, 계절이 가고 해가 거듭된다. 

 

누가 이 정교한 장치들을 그려 넣었을까. 어떤 공학자도 이런 회로를 그린 적이 없다. 수십억 년 동안, 생명이 햇빛 아래 살아오면서 몸에 새겨 넣은 것이다. 지구가 한 바퀴 돌 때마다 찾아오는 빛과 어둠, 그 거대하고 변함없는 리듬에 맞추어, 생명은 자기 안에 작은 시계를 길러 왔다. 바닷속 세균에게도, 들판의 해바라기에게도, 그리고 이불 속에서 더 자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도 같은 시계가 돌고 있다.

 

생각해 보면 아침 햇빛 한 줄기가 망막의 작은 세포 하나를 두드리는 이 미세한 사건은, 사실 우리의 몸을 46억 년 된 지구의 자전에, 태양계의 운행에 접속시키는 순간이다. 우리의 모든 세포가 별의 운행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우리는 '푸른 하늘 은하수를 항해하는 하얀 쪽배를 타고 태양의 주위를 도는 토끼'들이다.

 

우리는 흔히 이 둘을 따로 둔다. 우주의 리듬은 시인의 것, 몸속 세포는 과학자의 것이라고. 그러나 이 둘은 하나의 끈이다.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이, 아침마다 눈꺼풀 위에서 만난다. 그렇게 시작되는 우리의 삶은 우주의 운율에 담겨서 시간과 함께 춤춘다. 우리가 실제로 느끼지는 못 할지라도 세포는 뇌정원에 심겨진 생체 시계의 째깍거리는 운율에 자신의 행동을 담아서 춤을 춘다. 

 

아침이면 진양조(냄), 점심이면 중모리·중중모리(어우러짐), 저녁이면 자진모리(조임), 밤이면 휘모리와 풀음(거둠)이다. 그리고 다시, 밤의 휘모리 장단의 거둠이 끝나면 아침 햇살과 함께 진양조가 다시 시작된다. 하늘 아래 모든 생명은 이 리듬이 엮어 놓은 그물망의 한 연결점으로 엮여있다. 자신의 삶을 그리고 존재가 다른 생명과 엮여서 우주가 두들기는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춘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뿐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공간과 대상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별한 상상력이나 큰마음이 아니면 이 연결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내 몸이 별과 함께 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매일 살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에, 이 시대의 깊은 모순이 있다. 이토록 태생적으로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진 몸을 가지고서, 현생 인류는 그 리듬을 거스르며 살라는 시대적 요구를 받고 있다. 인간은 불을 발명해 밤을 정복했고, 전기를 만들어 어둠을 추방했다. 도시는 잠들지 않고, 사회는 스물네 시간 깨어 있기를 원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손바닥 안에 작은 화면을 들고 다니게 되었다. 그 화면에서 나오는 푸른빛은, 공교롭게도 아침 하늘과 똑같은 파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밤중, 어두운 방에서 그 화면을 들여다볼 때, 우리 망막의 작은 세포는 진짜 아침과 가짜 아침을 구별하지 못한다. 이전에 밤중에 이렇게 파란 푸른 하늘빛을 담은 빛을 본 적이 없다. 작은 세포는 아침인 줄 알고 시계에게 아침이라고 전한다. 시계는 그런 줄 알고 멜라토닌을 흘리지 않고, 청색 반점에 신호를 보내 계속 각성의 전령을 풀어놓는다.

 

우리는 매일 밤 그 리듬을 배신하며 살고 있다. 새벽 두 시까지 깨어 있는 수험생도, 교대 근무로 낮밤이 뒤집힌 노동자도, 잠들기 전 '잠깐만' 하며 화면을 들여다보는 우리 모두가, 별의 시간을 거스르는 중이다. 과학의 경고가 엄연하고 눈앞에서 돌아가는 기후변화의 진행이 엄연해도, 분명히 보이는 것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정부를 가진 사회에서 지난 30년 이상을 환경을 걱정만 하면서 살아왔다. 지구 생명그물망은 서로 다른 리듬으로 엇박자를 치는 것을 목격한다. 계절의 경계가 옅어지고 물과 공기의 순환 고리가 어긋난다. 어긋난 계절로 먹이를 제 장소에서 못 먹은 철새는 날다가 날다가 하늘에서 떨어져서 죽는다. 

 

눈을 돌려 내 안의 뇌정원을 본다. 수억 년의 진화가 정교하게 다듬어 놓은 뇌정원이다. 그러나 뇌과학의 첫 장 한 페이지 앞에서 걸음을 다시 멈춘다. 나는 같은 어긋난 리듬을 내 속에서도 본다. 바깥의 생태 위기와 안의 생체 리듬 붕괴는, 사실 하나의 뿌리에서 자란 두 개의 가지이다. 땅을 그 리듬에서 떼어낸 기술 문명이, 똑같이 우리를 우리 뇌정원의 리듬에서도 떼어내고 있다.

 

빛을 직접 받아야 시계가 맞춰진다. 몸에 새겨진 시계는 우주의 리듬과 맞추어져 있다. 뇌정원의 길은 걸어야 만들어진다. 정원사가 자주 다니면 굵어지고, 자주 다니지 않으면 가늘어지다가 끝내 사라진다. 뇌정원에서는 길을 찾아 더듬고 헤매고 틀려 보아야 비로소 그 길을 갈 수 있다. 아침 햇빛을 직접 받아야 시계가 맞춰지듯이, 마음도 몸도 직접 부딪쳐 보아야 자라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클릭 한 번으로 말끔하게 정리한 지능을 보여 주고, 말해주고, 그려준다. 낯선 외국어의 막막함 앞에서 더듬고 실패하는 경험을 없애 준다. 불편함이 없으니 애써 언어를 익힐 절박함이 사라졌다. 그러나 잃는 것도 있다. 번역으로 말은 통하되,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세상을 엿볼 수는 없다. 뇌정원 안에서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꽃이 피는 정원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 다양한 다름의 정원에서만 얻을 수 있는 인간 지성의 유연함과 통찰의 기회를 잃는다.

 

무엇이든 물으면 곧바로 대답이 나오니, 답을 찾아 헤맬 까닭도 없어졌다. 애써 기억해 둘 까닭도, 골똘히 따져 볼 까닭도, 스스로 통찰을 길어 올릴 까닭도 옅어진다. 답이 바로 있는데, 왜 뇌정원을 걸어서 힘들게 찾아야 할까. 그러나 한 번 나지 않은 길은, 끝내 생기지 않는다. 우리의 뇌정원의 신경 나무들도 시든다. 한 종류는 너무 써서이고 다른 하나는 쓰지 않아서 서이다. 밤마다 꺼지지 못하는 청색 반점이 내보내는 각성 전령사에게 시달려 시들어 가는 나무와, 정원사가 걸어 주지 않아서, 즉 쓰이지 않아서 시들어 가는 나무다. 다양한 것을 기억하기에, 길을 찾으려 헤매기에, 스스로 생각하기에 쓰이던 나무들의 일을 우리는 인공 지능에게 넘겨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나무들이 시들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살고 있다. 편리함에 젖어, 그것이 상실인 줄도 모른 채.

 

이상한 역설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닮으려 끊임없이 배워서 점점 더 똑똑해지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는데 정작 인간은 그 배움과 단련을 기계에 넘겨주며 점점 메말라 간다. 기계가 똑똑해질수록, 우리는 덜 생각하게 된다. 기억력만이 그런 게 아니다. 헤아리고, 의심하고, 통찰하고, 비판하는 능력, 수백만 년의 삶의 전쟁터에서 생존을 위해 쌓아온 인간을 오늘의 인간이게 하는 능력이 조용히 시들어 간다.

 

인공지능 시대를 살며 우리는 무엇을 기계에 맡기고, 무엇은 끝까지 놓지 않고 길러야 하는가의 질문은 참으로 심각하다. 아침 빛을 영영 피할 수 없듯이, 인공지능을 영영 외면할 수도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맡길 수도 없다. 어떤 능력은 넘겨주어도 좋다. 그러나 어떤 능력은 끝까지 내어주지 말아야 한다. 내 속의 뇌정원에는 내 손으로 가꾸고 길러야 하는 나무들이 있다. 그것까지 외주를 주면, 나는 더 이상 내 뇌정원의 주인이 아니다.

 

내일 아침에도, 햇빛은 어김없이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나의 눈동자를 두드릴 것이다. 이것은 알람이 아니다. 사십육억 년 동안 한 번도 끊긴 적 없는 어떤 부름이다. 우주가 우리에게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함께 춤출 시간이야.' 하고 건네는 인사다. 그 부름은 자연이 우리에게 일어나 춤출 시간이라고 두드린다. 이 찬란한 햇빛 아래 모든 생명은 일어나 자신의 장단으로 도래춤을 추라고 한다. 이 세상의 처자들, 이 세상의 총각들, 이 세상의 동물들, 이 세상의 산과 강과 바위와 새들도 모두 손에 손을 잡고 넓은 바다 빙빙 돌며 도래춤을 추라고 한다. 그렇게 ‘도래춤을 출거외다’라고 외칠 날을 기다려 본다.

 

 

[김은영]

숙명여자대학교 졸업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석사

오크라호마주립대학 박사과정

시납스인터내셔날 CEO

미국환경청 국가환경정책/기술 자문위원

Email: kimeuny2011@gmail.com

 

작성 2026.06.22 11:17 수정 2026.06.22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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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