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서 칼럼] 그들이 말하는 시민은 누구일까

이진서

7월 1일, 민선 지방정부가 일제히 출범했다. 취임사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한 단어가 있다. 시민. 시민이 주인이고, 시민과 함께 도시를 만들겠다는 약속이 이어졌다. 더없이 좋은 출발이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 이보다 쉽게 정당성을 획득하는 말은 드물다. 어떤 결정이든 ‘시민을 위한 것’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그것은 이미 반박하기 어려운 명분을 갖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히려 묻게 된다. 그들이 말하는 시민은 누구인가.

 

현실의 시민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노동자이자 부모이고, 청년이자 지역 주민이며, 예술가이면서 소상공인이기도 하다. 개발로 생계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같은 장소를 삶의 터전으로 지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삶의 조건과 이해관계를 지닌 존재들을 ‘시민의 뜻’이라는 단수의 이름으로 묶는 일은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긴장이다.

 

문제는 이 긴장이 지역 개발의 영역에서 반복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해소된다는 데 있다. ‘시민의 뜻’이라는 말은 너무 자주 토건 세력과 행정 권력의 언어로 호출되어 왔다. 개발 이익을 기대하는 일부의 욕망은 시민 전체의 요구로 포장되고, 행정은 이를 근거로 사업을 밀어붙인다. 그 과정에서 질문하는 이들, 되돌릴 수 없는 훼손을 우려하는 이들, 속도를 늦추자고 말하는 이들은 발전을 가로막는 존재로 낙인찍힌다.

 

이때 ‘시민의 뜻’은 실재하는 다수의 의견이 아니다. 특정한 이해관계가 자신의 이름을 지우는 순간 비로소 만들어진다. 개발은 더 이상 일부의 이익이 아니라 시민의 요구로 전환되고, 권력은 그 요구를 집행하는 대리인이 된다. 이처럼 ‘시민’이라는 보편의 이름은 모두를 위한 언어가 아니라 특정한 이익을 공공의 언어로 위장하는 강력한 정치적 수사가 된다.

 

지금 부산에서 벌어지는 이기대 논쟁은 이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퐁피두 분관 유치 문제를 둘러싸고 이전 민선 시정은 세계적 미술관, 문화도시, 관광 활성화라는 화려한 언어를 앞세웠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막대한 시민 혈세, 비공개 협약, 불평등한 재정 조건, 그리고 이기대 국가지질공원의 훼손 가능성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그럼에도 이 사업은 줄곧 ‘시민을 위한 미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왔다.

 

더구나 이기대는 단순한 유휴 부지가 아니다. 한 번 훼손되면 되돌릴 수 없는, 부산에 남은 거의 유일한 해안 지질생태 공간이다. 수천만 년의 시간과 생명이 축적된 이 장소를 관광 자원으로 재편하는 일은 단순한 개발을 넘어, 미래 세대가 함께 누려야 할 공공의 자연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럼에도 이 결정은 끊임없이 ‘시민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왔다.

 

이것은 이기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의 황령산 케이블카 논의에서도 같은 구조가 반복된다. 도시의 경쟁력과 관광 활성화는 언제나 선의의 언어로 제시된다. 그러나 그 언어가 자연 훼손과 공공성의 후퇴, 장기적 생태 가치의 상실을 가릴 때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그것은 과연 시민의 뜻인가. 아니면 시민의 이름을 빌린 특정한 이해관계인가.

 

이 질문 앞에서 ‘시민의 뜻’이라는 말은 더 이상 중립적일 수 없다. 이기대와 황령산이 보여주듯, 그것은 서로 다른 목소리의 충돌을 지우고 이미 정리된 결론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언어로 기능해 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시민의 뜻’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말이 가리고 있는 차이와 균열을 드러내는 일이다. 개발을 요구하는 시민과 보존을 요구하는 시민, 현재의 이익을 말하는 시민과 미래의 조건을 걱정하는 시민은 결코 하나의 목소리로 환원될 수 없다.

 

시민이라는 이름이 진정으로 유효하려면 그것은 단일한 의지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들이 충돌하고 공존하는 조건을 가리켜야 한다. 그렇기에 권력은 시민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하기에 앞서, 그 이름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지워지고 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을 앞두고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반대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반대가 사라진 자리에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는 하나의 ‘시민’이다. 그러니 도시의 미래를 시민의 이름으로 결정하려는 순간마다 우리는 이 물음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시민은 과연 누구인가.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제6회 코스미안상 수상

lsblyb@naver.com

 

작성 2026.07.06 10:11 수정 2026.07.0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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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