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대 칼럼] 최고의 냉장고

문용대

냉장고가 고장 난 지 닷새째다. 바로 새 제품을 주문했지만, 배송은 앞으로도 닷새가 더 걸린단다. 가득 차 있던 음식물들을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그나마 여유가 있던 김치냉장고로 일부를 옮겼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처음에는 바깥보다 냉장고 안이 조금 더 시원해 문을 닫아두었으나, 시간이 지나자 내부 온도가 오히려 바깥보다 더 후끈해졌다. 결국 거실 에어컨을 켜고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인공의 냉기라도 흘러들어 음식이 덜 상하기를 바라는 고육지책이었다.

 

문을 열어둔 냉장고는 온 집안을 어수선하게 만든다. 다른 가전제품이라면 조금 불편해도 참고 기다리겠건만 냉장고는 다르다. 단 하루만 멈춰도 삶의 궤도가 흔들린다.

우선 상하기 쉬운 국물은 다시 끓여두고, 값이 나가는 고기 종류부터 서둘러 식탁에 올렸다. 덕분에 며칠째 뜻밖의 풍성한 고기반찬이 이어지고 있다.

 

“당신, 요즘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냐?”

 

내 장난 섞인 핀잔에 아내가 웃으며 받아친다.

 

“상하기 전에 비싼 것부터 먹어 치워야지.”

 

아내의 말에 문득 빛바랜 어린 시절의 풍경이 겹쳐왔다.

 

그때는 집에 냉장고가 없었다. 삶은 보리쌀과 남은 밥, 반찬거리는 바구니에 담아 마루 천장의 시렁에 매달아 두곤 했다. 조금 더 오래 보관해야 할 음식은 단단한 줄에 묶어 깊은 우물 속에 처박아 두었다.

 

돌이켜보면 우물이야말로 최고의 냉장고였다. 한여름 우물물은 이가 시릴 만큼 차가웠고, 한겨울 우물가에는 도리어 모락모락 따스한 김이 피어올랐다.

 

생각해 보니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연의 냉기를 빌려 살아왔다. 겨울 얼음을 보관하던 석빙고를 만들었고, 우리에겐 마당 깊은 곳의 우물이 있었다. 대자연은 언제나 인간보다 먼저 삶의 지혜를 내어주고 있었던 셈이다.

 

기억의 실타래를 따라 또 하나의 풍경이 떠오른다. 전북 진안 성수산의 어느 바위틈이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도 그 바위 틈새에서는 온몸이 시릴 만큼 찬 바람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다. 동네 사람들이 바위 옆을 넓게 파서 음료수 상자를 넣어둘 만큼 시원했던 곳, 그곳 역시 자연이 빚어낸 천연 냉장고였다.

 

냉장고 하나가 멈추었을 뿐인데, 편리함 속에 잊고 지내던 풍경들이 물밀치듯 되살아났다. 시렁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밥그릇, 우물 속에서 두 손으로 건져 올리던 시원한 수박, 산속 바위틈에서 불어오던 서늘한 바람….

 

며칠 뒤 새 냉장고가 들어오면 나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편리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문을 닫아걸지 못했던 이번 고장은 내게 돈으로 살 수 없는 오래된 기억을 선물해 주었다.

 

내가 경험한 가장 완벽한 냉장고는, 플러그를 꽂아 전기로 돌아가는 사각형의 기계가 아니라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거대한 자연이었다.

 

 

[문용대]

한국수필 수필문학상 수상

문학고을 소설문학상 수상

지필문학 창립10주년기념 수필부문 대상 수상

코스미안뉴스, 브레이크뉴스 고정 필진

한국예인문학, 지필문학, 대한문학, 각종 문학카페 활동

대한문학 부회장, 지필문학 이사

수필집 ‘날개 작은 새도 높이 날 수 있다’, ‘영원을 향한 선택’

이메일 : myd1800@hanmail.net

 

작성 2026.07.09 09:59 수정 2026.07.09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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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