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인십색’ 흔히 하는 말이다. 서로 생각, 의견 또는 행동이 다르다는 것이다. 십인십색이라는 것은 일사불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의견이 다르다는 것은 항상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면 올림픽, 아시안게임 입장, 폐막식 행사에서 과거에는 일사불란하게 행진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선수들이 자연스럽게 입장한다. 보기에 좋다. 하지만 정교하게 훈련을 받은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경우도 있다. 케이 팜의 아이돌 그룹이다.
세계가 박수갈채를 보내는 한류를 대표하는 아이돌 그룹은 그 표현 양식이 일사불란 쪽으로 분류해야 할 것 같다. 오랜 기간 훈련을 통해 익힌 동작이나 춤을 통해 집단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매우 인상적이다. 한 그룹에 열 명. 십여 명이 되어도 같은 또는 다른 동작을 할 때 흐트러짐이 없다. 잘 짜인 안무로 눈을 즐겁게 해준다. 아이돌 그룹 가운데 방탄소년단은 세계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아이돌 그룹은 다른 나라의 그룹과 큰 차이가 있고 그것은 독보적인 특성을 지닌다. 춤과 동작이 일사불란한 특성과 함께 강렬하다는 점이 지적된다.
우리나라는 최근 개인주의가 급속하게 확산되는 경향을 보이면서 사회적으로 일사불란을 강조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졌다. 미투 운동이나 성소수자 운동 등에서 보듯 과거의 틀에 갇힌 고정관념을 깨는 작업이 매우 활발하다. 정치적 민주주의 공간이 확대되면서 사회 각 부문의 구시대적 적폐 청산 움직임이 가속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의 영향도 있지만 우리 사회는 지난 수십 년간 겪었던 정치적 경험 때문에 일사불란이라는 단어에 대해 거부감이 강하다. 독재정치가 일상적으로 일사불란을 앞세운 강압정치를 해온 탓이다.
우리만이 아니고 민주주의가 덜 발달한 시대 또는 지역에서는 일사불란한 것이 강조되었다. 국가 단위에서 강요해 개인은 싫어도 따라야했다. 정치, 경제, 사회 다 마찬가지였다. 정치는 최고 권력자가가 하는 소리를 모두가 찍 소리 하지 말고 받아드리도록 강요했다. 비판이나 반대의 목소리는 허용되지 않았다. 노조 운동이나 환경 운동 등은 일사불란하게 금지 되었다. 일반인들은 장발이나 미니스커트는 안 되고 학생들은 똑 같은 교복을 입도록 했다. 그러다가 민주화가 되면서 다수의 목소리가 공존·소통해야 한다는 원칙이 강조되었고 두발, 복장에 대한 관청의 간섭은 사라졌다. 군대를 빼놓고는 일사불란한 것에 대해 거부반응이 거세졌다. 학생들도 자유로운 복장을 하는 식으로 변했다.
그렇지만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이른바 반동의 물결이었다. 일사불란이 꼭 나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일부에서 여전했다. 역시 과도기는 피할 수 없었다. 사회의 많은 부분이 일사불란에서 벗어났지만 몇 군대는 그렇지 않았다. 아파트가 대표적이었다. 똑 같아야 한다는 의식은 아파트를 선호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구조로 된 시멘트로 지은 공공주택이 비쌌다.
너무 인기가 있어서 선 분양, 후 건설이라는 기이한 유통구조는 요지부동이었다. 소비자가 왕이라 했지만 아파트의 경우 공급자가 왕이었다. 그 왕은 항상 일사불란한 거래 원칙을 강조했고 정치권도 그것을 밀어주었다. 해괴한 일이었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너도나도 아파트를 좋아해서 물건을 안보고 돈부터 내는 기형적인 거래 방식이 수십 년 간 통용되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아파트는 서민 주택이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아파트 업자들은 돈을 엄청 벌었다. 아파트 소비자 일부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이나 잘 나가는 수도권에 있는 아파트는 부의 상징이었다. 정부도 건설업자들이 전국에 아파트를 짓는 정책을 채택했다. 아파트 건설업자들이 수도권에서 사업을 하려면 지방에 일정 비율의 아파트를 지어야 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전국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아파트 공화국이 되었다.
일사불란한 것은 대량생산과 판매 시대와 흡사했다. 공장에서 똑같은 물건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팔면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변했다. 다양한 제품을 적은 양으로 만들어 팔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의 눈이 높아져서 너도나도 다 같이 똑같은 상품을 사서 쓰려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공장 생산 시설이나 시장구조도 그런 식으로 바뀌어 갔다. 컴퓨터로 다양한 디자인을 값싸게 하게 되면서 개개인의 취향에 맞는 상품을 생산하는 업체가 돈을 벌게 되었다.
이처럼 사람은 일사불란을 놓고 이런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처럼 종잡기 힘든 복잡한 존재다. 아파트 선호에서처럼 유니폼을 좋아하기도 하고 일반 상품 구매에서처럼 그렇지 않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옛 소련이 망한 것을 사회주의가 다양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옛 소련은 19세기 말 러시아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절대 빈곤에 시달리던 것을 해결해 주는 데는 성공했다.
옛 소련은 정부가 총체적인 경제 정책을 만들어 집행하면서 의식주는 상당한 정도로 풍부해졌다. 그것은 관이 주도하는 배급제 비슷한 제도 속에서의 성공이었다. 똑같은 옷이나 음식을 대량으로 만들어 인민들에게 배급했다. 그러나 서구의 바람이 들어가면서 소련 인들은 청바지 등 유행에 따른 의복 등을 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련 정부는 그런 요구를 배급제를 통해 들어줄 의지가 없었고 그런 능력도 없었다. 이념이나 제도가 그것을 받아드릴 수 없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옛 소련은 미국이 주도한 핵무기 등에 대한 무제한적인 무기경쟁을 벌여야 했다. 미국은 자본주의로 축적된 부를 앞세워 옛 소련을 압박했다. 옛 소련은 결국 국가 재정이 어렵게 되면서 국가 공동체가 밑동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본주의 체제로 변신했다. 20세기 초 엄청난 유혈 사태를 거치면서 세계에서 최초로 들어섰던 사회주의 체제, 사회주의 진영의 맹주였던 옛 소련은 그러나 무너질 때는 큰 피를 흘리지 않았다. 찬·반론이 있었지만 무기 대신 입으로 토론하는 형식으로 국가 체제를 바꿔버렸다. 인류 혁명사에서 정말 그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어느 경우든지 혁명에는 엄청난 충돌과 피를 흘리는 투쟁이 수반되었지만 소련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과 핵무기 경쟁을 끝도 없이 벌리면서 강대국으로 군림했던 소련은 소리 없이 사라지고 여러 나라로 분리 독립되었다. 소련이 그렇게 스스로 무너진 이유는 인민들의 다양해진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일부 전문가는 분석했다. 사회주의가 영구혁명을 지속해 지상 낙원인 공산주의로 발전할 것이라는 마르크스레닌이즘은 빛을 잃었다. 마르크스 등은 인간의 욕망은 상한선이 없으며 계급에 관계없이 부패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시했거나 몰랐던 것 같다.
한편 중국은 옛 소련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았던지 정치는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제는 자본주의를 받아드렸다. 등소평이 ‘쥐만 잘 잡으면 흑 고양이든 백고양이든 상관없다’는 논리를 펴 국가사상 체계에 변혁을 시도했다. 그 결과 중국은 비약적으로 성장해 세계의 공장이 되면서 20여 년 만에 G-2로 부상해 미국과 힘을 겨루는 강대국이 되었다. 중국은 인민들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을 취해 옛 소련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시도했다. 최종적인 성공 여부는 아직 속단키 어렵다. 중국은 빈부 차이가 커지는 양극화 현상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듯하다. 특히 시진핑 주석이 집단지도체제를 중단시키고 자신의 영구 집권에 대한 집착을 보여 절대 권력의 욕구를 스스로 제어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낳고 있다. 이런 점이 향후 중국체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고 볼 일이다.
옛 소련이나 중국의 경우처럼 영구혁명을 추진한다는 권력자나 정치 집단이 전제정치나 부패한 자본주의 체제 등에서 나타나는 권력형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것은 매우 주목되는 부분이다. 사회주의 체제가 역사적으로 진보된 체제라는 마르크스 이론이 비현실적이라는 주장으로 거듭 확인되는 것 같다. 즉 사회주의 체제에서 가장 강력한 개혁 추진 세력이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체제 우월론이 빛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자본주의 체제 이후 사회주의가 필연적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역사 발전이론이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면 다른 모델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사상, 이념에 관계없이 인간은 권력을 잡고 절대 권력자가 되면 계급에 관계없이 부패해지는 유전 인자를 DNA에 가지고 있다는 것은 70억 인류가 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유추된다 하겠다. 동서양에서 많은 왕국들이 등장했다 사라지고 다시 새 왕국이 생기는 과정이 지속된 것은 유전적 자질가운데 어느 쪽이 발현되었느냐에 따라 그렇게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망한 나라의 경우는 상한선과 깊이를 모르는 인간의 욕구가 절대 권력 체제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내는 쪽으로 가게 된 결과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 길이 칭송받는 성군이라 할 만한 지도자가 나오기도 하는데 그런 자질이 후손을 통해 대대로 이어지지 않는 것도 유전자의 변화무쌍한 우성과 열성 작업이라 하겠다.
개인처럼 사회, 국가는 유기체와 같은 내적 생성과 변화 과정을 거치는데 그것은 끊임없는 선택의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주도 세력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미래가 달라졌듯 앞으로 그럴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공식처럼 일률적으로 진행된다고 볼 수도 없다. 여러 변수가 있다. 가령 선택을 잘 했다 해도 같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변화 또는 환경의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드시 성패가 보장되지 않는다. 물론 선택을 잘못한 경우는 그 결과가 부정적이기 마련이지만 객관적 상황에 따라 한 밤에 문고리 잡는다는 식의 행운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이처럼 개인, 사회, 국가의 성패 여부, 흥망성쇠의 과정은 대략적인 예측은 하지만 족집게 식으로 하는 것은 어렵다.
오늘날 지구촌 대부분의 국가가 민주화되었다. 정치권이나 유권자들이 다 변화하고 있고 지구촌 전체의 변화도 일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한 정치지도자가 잘한다고 해도 유권자들이나 다른 나라의 반대 등에 부딪혀 낭패를 보기도 한다. SNS 시대는 정치 지도자가 혜성처럼 등장해 하루아침에 집권하기도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권좌에 버티지 못할 정도의 위기를 맞기도 한다. 이런 점을 잘 살펴야 한다. 그래서 정치인은 집권 이전의 자신의 공약을 항상 잊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신이 선택 받았다면 그 선택의 이유, 즉 정치적 전략이나 비전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항상 안전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기 때문에 어제의 지지자가 언제 반대세력이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모든 상황 변화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인간은 일사불란한 것을 때에 따라 싫어하기도 하지만 좋아하기도 한다. 그런 욕구 변화, 변덕 등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지만 정치인 본인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은 정치를 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유권자의 판단은 그 이후다. 일시적으로 오해를 산다면 시간이 지난 후 그것은 다 재대로 평가를 받는 것이다. 세상사가 변화무쌍하지만 그것은 큰 틀에서 우주의 법치 속에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무질서한 것 같아도 큰 질서 속의 무질서인 것이다. 이런 이치를 깨달았을 때 지구촌의 앞날이 더 긍정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