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열전 靑年 列傳] 온몸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주다은

아주 다분히 개인적인

 


삶은 나에게로 향하는 오랜 여정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끊임없이 홀로 걸어가는 것이다. 이 고독한 길 위에서 과거에 경험했던 기억과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는 사건들,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마주한다. 그러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변함없는 시간의 흐름 위에 삶이 놓여있다는 것이다. 탄생의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은 보편적인 시간 개념 아래 존재하는 한 개인의 시간이다. 그렇게 삶이라는 아주 다분히 개인적인 시간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나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먼저 보물찾기 놀이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별모양의 스티커 혹은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표시를 찾아 우리는 어릴 적부터 미지의 곳으로 달려간다. 물론, 어린이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캘리포니아의 금광을 찾아 미 대륙의 서부로 끊임없이 달려갔던 이들도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을 향해 전진했다. 출발선의 총소리가 울리면, 아니 사실 울리기도 전에, 인간은 보물을 행여 누군가에게 뺏길까 쉼 없이 돌진한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그렇게 무한한 N 번 째 보물을 향해 달려가다가 문득, 인간은 자각한다.

 

N 번째 보물과 N+1 보물 사이에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끊임없는 욕망과 야망의 달리기는 모두 보물찾기라는 닫힌 세계를 지속시키기 위한 장치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세상을 구성하는 수많은 보물찾기 놀이와 그 보물찾기 놀이의 허무함을 비로소 발견한 것은 아마도 열아홉 무렵일 것이다. 어릴 적, 내성적이었던 나는 모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무서웠다. 텅 빈 집에 저녁이 찾아올 무렵 낮게 깔려오는 노을과 이내 밤이 되어 밀려오는 어둠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홀로 남겨진 시간이 찾아오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상상을 지워버리기 위해 미친 듯이 반복적인 일을 했다.

 

끝없이 계산문제를 풀고 이런저런 숙제를 하던 그 식탁이 떠오른다. 그렇게 나는 공부를 잘할 수밖에 없었고, 내부와 외부의 열망에 항상 ‘~라는 접미사로 끝나는 직업을 꿈꿨다. 그러던 어느 날, 보물찾기에 실패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그때까지의 거짓된 보물들이 쓰레기 더미처럼 쌓여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보물찾기의 세계를 지각해버린 이상, 세계 내부의 것들은 더 이상 나를 자극하지 못했고, 나는 세계를 이탈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하나의 닫힌 세계에서 빠져 나왔다.

 

그렇게 지난 7년이 시작되었다. 스무 살이 채 안되었던 나는 어느 새 스물여섯 해를 채워가는 중이다. 그때 세계 밖에 홀로 남은 아이가 여기에 똑같이, 동시에 너무나 다르게, 그대로 남아 있다. 해가 지 날수록 1년이라는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것은, 1/NN이라는 나이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나는데 1이라는 그 숫자는 변함없이 버티고 서 있기 때문일까. 지난 7년 동안 휘몰아친 일들이 너무나 버거워 이제 사건들을 더 이상 시간 순서로 정리하기 힘들다는 푸념은 이제 막 이십 대 중반을 넘어선 젊은이가 하기엔 너무나 낡아빠진 한탄일까.

 

스무 살 무렵의 나는 대학이 왜 존재하는지 모르는 채 입학을 했다. 살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했으나 그 어떤 것도 삶에 대한 회의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어릴 적 한두 번 겪었던 한두 해의 타지 생활 덕분에 사교적이면서도 활발했지만, 본래의 내성적인 성격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나는 대학에 들어와 수업 외의 많은 시간을 홀로 보냈다. 첫 해의 대부분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데 할애했고, 그 이듬해에는 매일같이 영화만 보았다. 전공 공부에 도통 재미를 못 붙인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다양한 분야의 수업과 학문을 접했고, 그 중 하나로 대학 입학과 함께 시작한 스페인어에 재미를 붙여, 그 세계에 푹 빠져 살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한 가지 계속했던 것은 끊임없이 삶과 사유를 기록하여 모아두는 것이었다.

 

스물한 살이 되어서는, 나를 얽매이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배낭 하나와 함께 홀로 떠났다. 이제는 너무나 많이 알려져 관광의 냄새가 배어버린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 그 시절 나는 가장 사람이 적게 다니는 길, 특히 내가 떠나 온 한국의 사람이 없는 길을 걷고 싶었다. 그렇게 북쪽 길Camino del Norte을 택해 스페인 북부 대서양을 따라 총 31일간 817를 걸었다.

 

자유로운 걷기 여행이라는 포장 아래 한없이 동경하고 부러워할 수도 있겠지만, 첫 보름은 양쪽 발의 발톱이 번갈아 가며 성하지 않아 병원까지 가야 했고, 그 다음 보름은 양쪽 발의 뒤꿈치가 번갈아 가며 물집이 잡히고 피고름이 고여 지독한 냄새가 났다. 아침이 오면 차갑게 굳은 신발에 양말로 감싼 발을 가까스로 넣고 온기가 오를 때까지 고통을 참아야 했지만, 그때는 그 삶에 취해 끊임없이 걸었다. 매일매일 다채로운 풍경과 사람을 마주하며, 삶의 방식은 너무나 다양하고 세상은 너무나 넓어 할 수 있는 것이 수 없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길 위에서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또한 현실과 이상 사이에는 너무나 큰 괴리가 존재하여 삶이 괴로우리라는 것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벽한 삶이 어디에 있겠으며, 그때의 걸음이 남긴 세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고 짙은 향기를 내뿜으며 나의 삶을 아우르고 있다.

 

스물두 살 무렵에는, 또 한 번의 걸음을 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네팔의 히말라야 트레킹을 아무런 생각 없이 떠났다. 내가 걸은 길은 해발고도 5416m에 이르는 구간을 포함하여, 총 보름 정도에 걸쳐 이루어지는 여정인 안나프루나 서킷 트랙Annapurna Circuit Trek이었다. 보통은 길을 안내해줄 가이드나 짐을 나눠 들어줄 포터를 고용하지만, 금전적인 문제도 있었고, 당시에 위험성을 크게 자각하지 못 한 탓에 나는 가이드도 포터도 없이 걸었다. 태고의 자연을 마주하며, 한 번은 4000m가 넘는 고도에서 두 뼘이 채 안될 것만 같은 좁은 길을 걸어야 했다. 왼쪽으로는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돌들로 끝없이 높게 경사진 산이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떨어지는 순간 이 세상과 이별할 것 같은 아득한 계곡이 있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두 개의 대나무 지팡이와 두 다리에 의존해야 했고, 그러한 와중에 왼쪽으로는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돌들을 피하기 위해, 오른쪽으로는 다리를 헛디뎌 미끄러지지 않도록 집중해야 했다. 그때 느꼈던 생존의 절박함은 몸이 기억한다. 삶의 의미를 물으며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였지만, 당시 육체적 죽음의 순간을 마주하였을 때 나는 극도의 생존 욕구를 느꼈다. 그리고 그때부터 몸은 살아야 하는 특별한 이유를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는 살아있으니까, 나는 숨 쉬니까 산다. 산다는 것, 규정할 수 없는 그것은 곧 내 몸 그 자체가 되었다.

 

아주 다분히 개인적인 두 번의 걸음을 통해 나는 길에서 삶을 배웠다. 그리고 세상을 보았다. 서울과 같은 도심 그리고 네팔의 산골과 같은 낙후된 지역의 간극은 영원히 불합리할 세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두 극단을 이어줄 연결고리를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어 스물세 살 무렵에는, 또 다른 타지 생활에서 이런저런 인간관계와 고통스러웠던 사건들을 마주하며,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우면서도 얼마나 아름답지 않은지를, 또한 세상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 더 많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그렇게 세상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기에 그저 온전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동시에 삶이 너무나 많이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의 반복으로 쌓여 가리라는 것을, 그로 인해 삶의 허무와 긍정이 얽힌 만큼이나 정신적으로 불안하리라는 것을, 나아가 사람이 너무 버거운 일을 혼자 담아 내다보면 심각하게 뜨거운 만큼이나 심각하게 차가워져 삶에 대한 애착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내 자신이 이토록 인간사회에 밀착하면서도 또 떨어져 있게 되리라는 것을, 그렇게 내 자신이 심각하게 분열되리라는 것을 서서히 자각하게 되었다.

 

시간은 변함없이 흘렀고, 스물네 살 무렵에 접어들어 나는 여전히 대학이 왜 존재하는지 모르는 채 졸업을 했다. 하지만, 다양한 경험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안정이라는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다시 한 번 대학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학에서 접하는 과학연구의 실험방법론은 내가 본 세상뿐만 아니라 나라는 존재로부터 동떨어져 있었고, 내가 느끼는 삶의 공허함만이 커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더 이상의 분열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아가 나 자신이 스스로를 얼마나 모르는지 혹은 모르는 척 하였는지를 알게 되었고, 본인의 삶에 이토록 무책임하였음을 자책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나는 스무 살 무렵부터 그러했듯이 끊임없이 삶과 사유를 기록하여 남겨두었다.

 

스물다섯 무렵, 나는 나의 글을 정리하여 출판하기로 했다. 지난 5년간의 글이 담긴 공책을 넘겨보며, 출판을 마음먹은 시점에서 가장 덜 부끄러운 글만을 골랐다. 그렇게 추려내고 보니 대부분의 글이 시라고 불리는 형태의 언저리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시를 쓰려고 한 적이 없었으니 시인이 못 되었고, 그 이후에는 억지로 시를 쓰려고 하니 또 다시 시인이 될 수 없었다. 그래도 시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 보면, 수능 공부를 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책 표지에 적혀있던 정현종 시인의 이라는 시를 참 좋아했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이후 나는 수능을 보았고, 시는 사라졌다. 시간이 흘러 사랑을 했고, 시를 읽기 시작했다. 살기 위해 무엇인가를 적었고, 몇 개는 시라고 불리는 것이 되었다.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의 말을 빌려 그렇게 어느 날 시가 나에게 왔다. 내게 시의 마력은 언제나 글자와 글자 사이의 공간에, 억지로 채우려 하지 않고 또 채워지지 않는 그 무한한 비어있는 상태에 있다. 등단 문화를 먼저 알았더라면 당연히 등단을 위해 투고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항상 무식하여 일을 저지르고 나서야 현실을 직면하곤 한다. 그렇게 나의 첫 책인 시집, 이십오 년, 내가 나의 이방인이 되기까지는 대학원생의 조교비로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얼굴을 내보이게 되었다.

 

이제 스물여섯 해를 세달 남짓 남긴 지금, 다시금 삶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되돌아보니, 이 인생이라는 집에 이런저런 손님이 찾아와 집을 불태우기도 하고, 리모델링도 하고, 또 하나하나 보듬어 보기도 했다. 내가 만드는 인생이고, 내가 짓는 집이라지만, 손님을 맞이하면서 오래 전부터 삶이 나를 어디까지 데려가나 궁금했다. 세상을 마주하며 나에게 부여된 개념과 관념과 가치를 하나하나 다 털어버리고 나면, 어떠한 것과 어떠하지 않은 것의 경계라는 것이 너무나도 모호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온다. 물에 번져가는 잉크 방울의 윤곽을 가늠할 수 없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뚜렷한 형태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이제는 무엇이 떠오를지 모르는 망망대해를 바라보다가, 바닷물이 사실 쌉싸래한 맛을 지닌다는 것을 안다. 어쩌면 하나의 항구에 정착하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 삶일지도 모르겠다. 표류하는 통통배의 종착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흐르는 시간 속, 떠남의 순간에 몸과 마음은 깊은 숨을 들이 내쉬며 삶을 다독인다. 모든 이동의 물결은 한 세계의 끝과 또 다른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타종을 동반한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함께 세상에 흩뿌려진 나의 데칼코마니는 영원히 찾을 수 없어 나비의 날개는 영원히 완성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온몸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나에게로 향하는 이 지독한 여정을 꾸준히 밟아 나가기로 했다. 그렇게 산다는 것은……. 그저 계속해서 걸어 나아가는 것이다


전명희 기자
작성 2018.08.23 07:40 수정 2018.08.24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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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