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의 시를 걷다] 경주남산

천년의 향기로 깊어가는 경주남산 




설령,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게 찬란하다 해도

경주남산의 천년 소나무만큼이 하겠는가.

언젠가 한번은 걸어본 적이 있었는지

걸음마다 밟히는 그리움이 길을 만드는데

나를 휘감고 돌아가는 바람소리만 애잔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여,

천년의 경주에서

까닭 모를 그리움에

울컥 목이 메어 온다 해도

어느 시절 사라져간 사랑이여 여겨 주오,

경주남산의 호젓한 산길을 오르며

나는 이름도 모를 그대를 생각하며

즐거이 산길을 따라 걸어가려오.


너는 높거나 낮지도 않아서

세상을 깔보거나 세상에 매몰되지 않는

천년의 평정심을 잃지 않는구나.

남산 산자락이 출렁거리는 어깨 끝으로

서라벌의 기개가 살아서 움틀 거리는데

깊고 그윽한 향기를 품은 그 산에

오후의 찬연한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존재와 부재의 불확실성 너머

아직도 그대들의 더운피는 그 가슴에 살아

구석구석 혈관 속을 돌고 있을 것이다.

침식과 퇴적의 순환만이 지층을 만들어내며

소멸은 또 다른 생성을 거듭하는 지금

살아 있거나 죽어있거나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언제나 마음 안에 있을 뿐이다.

이 허허로운 세상에서...

 


오오!

경주 남산 바위에

나직이 서 있는 부처는

천개의 눈이 달린

그리움을 먹고 살아

천개의 햇살이 되고

천개의 그리움이 된다.

천개의 마음이 되고

천개의 사랑이 된다.


그녀에게선

노오란 천국이 피어나고

그녀에게선

노오란 지옥이 피어난다.

그녀는 세상을 향해 아름답게 뻗어 있지만

아미타불은 저편으로 돌아서 있었다.

아직도 타고 있는 저 역사의 시간은

천년의 약속을 간직한 채

말없이 멀어져 가는데

그녀에게선

노오란 햇살만 주렁주렁 열리고 있었다.


나는

그리움이 가 닿은

언저리로 걸어갔다.

바람과 나무와 그대가 있는

경주남산을 걸으며

나의 그리움과

그대의 그리움이 맞닿을

피안의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다.

차마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나는 기어이 그리움에게 걸어가야겠다.

  

아름다운 약속이다

머리를 잃은 채 사랑을 전하는

아름다운 부처의 약속은 그래서 사랑이다

화엄이어도 좋고 화엄이 아니어도 좋을

우리들의 마음의 약속이다.

세상을 향해 앉아 있는 돌부처의

아름다운 사랑의 약속은 경주남산에서 빛난다.


마음이 길을 낸다.

아니 길이 마음을 내는지 모른다.

낮게 흐르는 바람의 등을 밀며

숲속으로 난 길을 걸어간다.

방금 부처가 다녀갔는지

숲속의 나무들이 수런거린다.

저 길 끝에 서 있는 그대는

숲인가 나무인가…….


행여,

저 돌부처에게

마음을 들키지 마라

경주남산 곳곳마다

지키고 서 있는

돌부처에게

쓸쓸함이나

그리움을 들켜 버리면

경주에 다시 또  

오고 말 것이다.

천 년간 잠든

돌들이 잠에서 깨어나

사랑의 포로로

만들어 버릴지 모른다.

 

하늘은 경주남산으로 내려와 앉고  

화엄을 꿈꾸었던 신라인들의 세상에 

나는 이미 당도해 있었다.  

꿈속의 길을 열고 나와  

한바탕 싸돌아다닌 경주남산에서  

나는 마음의 눈이 트이고 있었다.   

 

사랑이여

모든 불가능에 대한 사랑이여

오월의 경주남산을 바라보며

천 년간 쓸쓸함에 젖어 버린

그대를 내려놓고

이제 나는 다시 살아갈 것이다.

처음처럼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편집부 기자
작성 2018.09.02 13:21 수정 2018.09.03 02:07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편집부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