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지성(知性)과 이성(理性)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우리는 때때로 경험하게 된다. 말하자면 어떤 계시나 예고처럼 우리가 밤에 자다 꿈꾼 대로 같은 일이 생시에 일어날 때 말이다.
가족 형제나 친구 중 그 누가 꿈에 나타나면 그 사람의 별세 소식을 듣게 된 일이 있었고, 딸 셋이 영국 만체스타에 있는 음악기숙학교에 다닐 때 나는 미국 뉴욕에 있었는데 꿈에 애들을 본 다음 날 애들 편지를 받곤 했었다.
또 하나 비근한 예를 들자면 1984년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자동차 타이어를 눈이 와도 잘 미끄러지지 않는 '사계절(all-season)' 타이어로 바꿔 끼운지 며칠 안 돼 그해 처음으로 눈이 많이 왔다.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자동차의 속도가 나지 않아 눈 때문이려니 생각하고 계속 차를 몰았다. 한동안 가다가 차가 몹시 덜컹거리기 시작하길래 나는 길옆에 차를 세우고 보니 오른쪽 뒷바퀴가 공기압이 모자란 채로 굴러온 탓에 타이어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그래서 임시로 스페어타이어로 바꿔 끼우고 타이어를 산 씨어즈 백화점 자동차 부품 파는 데로 가서 새것으로 교환했다. 그 전날 밤 꿈에 내가 며칠 전 새로 사 신은 구두 오른쪽만 갑자기 다 닳아 해어져서 신발을 산 구둣방에 갖고 가 새것으로 오른쪽만 바꿨었다.
이와 같은 일은 수많은 사람들이 옛날부터 체험해왔겠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무도 신비롭고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꿈을 꾼 적도 있다.
1986년 말 나는 굉장히 높은 산 까마득한 절벽을 타고 산꼭대기 정상까지 기어오르는 꿈을 꾸었다. 밑에서 받쳐주고 밀어주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그리고 이 등산 등정(登山 登頂) 코스 내내 아주 작고 예쁜 허밍버드(Humminbird) 벌새 한 마리가 내 얼굴을 마주 보고 미소 짓듯 노래하며 마치 꿀을 먹고 꽃가루를 매개하는 꿀벌처럼 윙윙 내 눈앞에서 제자리걸음 아닌 제자리 비행으로 나를 인도해 주는 꿈이었다.
이 꿈은 지금도 내 기억에 너무나 생생하다. 공교롭게도 이 꿈은 내 큰 딸 해아(海兒)가 만 18세가 되던 1986년 11월 27일 쓰기 시작해서 내가 만 50세 되는 1986년 12월 30일 장문의 편지를 끝맺은 날 밤에 꾼 것이었다.
나는 첫 아이로 쌍둥이 딸을 보았었다. 쌍둥이여서인지 체중 미달로 낳자마자 조산아 보육기 인큐베이터에 들어갔고, 태어난지 하루 만에 한 아이는 숨지고 한 아이만 살아 남았다. 애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두 딸 애들 이름부터 지어 놓았었다. 한 아이는 태양처럼 언제나 빛나고 만물을 육성하며 희망을 주는 아이가 되라고 태양 ‘해’ 자(字), 아이 ‘아(兒)’ 자(字) ‘해아,’ 또 한 아이는 바다처럼 무궁무진한 삶의 낭만이 넘치는 아이가 되라고 바다 ‘해(海)’ 자, 아이 ‘아(兒)’ 자(字) ‘해아(海兒)’로.
아마도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숨진 ‘해아’가 내 꿈에 벌새로 나타났었는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래서였을까, 이 벌새 꿈을 꾼 다음, 내 첫 저서 ‘해아야, 코스모스바다로 가자’를 비롯해 전혀 생각하지도 꿈도 꾸지 않았던 책을 20여 권 내게 되었으리라.
자연 만물 중에 벌새야말로 시(詩)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리고 우리 모든 사람에게 이 시(詩)같은 ‘벌새’가 존재하리라.
아, 그래서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도 “삶의 어느 한 분자(分子)도 그 속에 시(詩)를 품지 않은 것은 없다 (There is not a particle of life which does not bear poetry within it)”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는 또 이런 말도 남겼다고 한다.
“글을 쓴다는 건 네가 믿는 걸 발견하는 예술이다. (The art of writing is the art of discovering what you believe.)”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전) 코리아헤럴드 기자
전) 코리아타임스 기자
현) 미국 뉴욕주법원 법정통역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