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열전 靑年 列傳] 93년생 저신장 연극배우, 김유남

눈에선 반짝반짝한 다이아몬드 호수가 구름에 가린 해를 대신하고 있는 연극배우

 

 





내일은

어제 뭐가 힘들었을까?




글을 쓰기에 앞서 나는 93년생의 저신장 배우이다. 선천적으로 다발성골단이형성증이라는 희귀난치질환을 앓고 있다. 키는 132의 작은 키에 준수한 귀염상 외모이다. 유전적으로 질환을 앓고 있으며, 나는 엄마 유전이다. 주위에서 말하길 난 쾌활하고, 유머러스하며 주위에 밝은 기운을 준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오늘까지 24년을 살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 글을 쓰며 나도 생각해 본적 없는 질문과 의문, 그리고 동정으로 고민해보려 한다.

 

어려서부터 나의 짧은 팔다리가 이상하진 않았다. 우리 엄마 또한 그러하였으니까 아버지는 솔직히 이젠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같이 살내일은 어제 뭐가 힘들었을까? 좋았던 기억이 없으니까. 단지 아주 가끔 1년에 한 손에 셀 수 있을 정도 오셨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고 지금 우울해서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살아온 집안환경은 가난했지만 엄마 혼자 날

키워주셨고, 엄마 덕에 오늘까지 나는 잘 살아왔다.

 

우리 엄마는 내가 걷기 시작하면서 내 자식도 나와 같은 질환을 앓고 있구나.”하셨다고 한다. 걷기 시작하면서 뒤뚱거리고 금방 지쳐버리는 나를 보고서 말이다. 엄마가 어렸을 때는 오늘날처럼 치료기술이 흔하지 않았을 뿐더러 완화 시킬 수 있는 나은 방법을 몰랐을 것이다. 엄마는 힘들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지만 걸어 다녔을 것이다. 외할머니 또한 주위의 의견으로 사이비종교에서 고칠 수 있다하여 의학지식도 없는 곳에 가셔서 고쳐보려고 애쓰셨을 것이다.

 

4살이 되던 해 나는 첫 번째 수술을 하였다. 양쪽다리 골반부터 발목까지 쇠를 박고 고정시키면서 반듯하게 다리를 펴는 수술. 엄마는 잘 걷지도 못하시는 다리로 내가 타고 있는 휠체어를 끌며 바람을 쐬게 하고, 병원에 있는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시며 우셨던 기억이 난다. 다른 기억은 나지 않는다. 너무 어렸을 때라 그런가?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 나는 공부를 잘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아무튼 유치원 친구가 나를 놀렸단다. 난 몰랐다. 나를 놀린 친구를 a라 고 칭한다면 b라는 다른 친구가 혼나고 있었다. 선생님은 나를 불러 a가 널 놀렸냐 물으셨다. a가 나를 놀려서 b가 화가 나서 싸웠단다. 과연 동정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예고한다. 아마 다음 문단의 길이는 늘어날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다른 특수학교도 있었지만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물론 내가 아닌 엄마의 선택이었다. 아마 동네에 93년생인 친구들이 많아서다. 학교는 아파트 담을 돌아 육교를 건너면 있는 화정초등학교였다. 학교가 가까워서 보냈을 수도 있겠다고 지금 생각해본다. 물론 나한테는 먼 거리였지만 새로운 친구들도 만나고 어색하지만 같은 유치원 다닌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에 나쁘지 않게 1학년이 시작되었다. 어느 하나 예외로 빠지는 건 없었다. 잘못을 하면 손바닥 회초리를 맞았고, 청소 또한 다 같이 책상도 밀었고, 일주일에 한번 교실 바닥을 철 수세미로 닦았고, 뛰어다니고, 훌라후프 돌리고, 운동회하고……. 운동회는 옆집 친구의 엄마가 같이 활동해줬다. 옆집 친구는 기분이 안 좋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초등학교 2학년 인간극장이라는 프로그램에 작은 거인 4형제라는 제목으로 왜소증 4형제가 방영이 되었다. 우리 엄마가 그것을 본 것이다. 눈에선 반짝반짝한 다이아몬드 호수가 구름에 가린 해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냥 내 상상으로 그러지 않았을까 표현해본 것이다. 지금의 표현을 한 내가 자랑스럽다. 초등학교 2학년! ‘일리자로프첫 수술을 하며 다큐멘터리도 찍었다. 며칠 전 그 때의 방송을 비디오테로 이 프로를 보게 되었는데 너무 슬프더라. 그 조그마한 1m도 안 되는 어린아이가 앞니가 빠진 채로 웃고 훌라후프 돌리고 보조기를 차고 뛰어다니고. 담임선생님께서는 급우들에게 자 유남이 수술 잘 받고 오게 인사하자~ 유남아 수술 잘 받고 건강해서 와하신다. 관심은 좋았지만, 부끄럽고 울컥했던 감정이 기억나고 지금 또한 동감된다. 수술할 병원에 도착해서 슈퍼맨~”을 외치며 내리는 내가 있다. 미친놈. 하지만 내 표정은 겁을 먹고 있었다.

 

인터뷰 중 꿈이 뭐냐는 질문에 난 의사가 되고 싶어요. 아픈 사람들 고쳐주고 아픈 사람들 기쁘게 해주고.”라 답했다. 수술실에 들어간다. 하루 동안 금식을 하고 침대가 움직인다. 나는 다 벗고 있다. 속옷까지 다. 나는 솔직히 무서웠다. 수술에 대한 인식이 있으니까. 그래도 웃고 있었다. 엄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었던 것도 있었다. 그렇게 웃으며 수술실에 들어갔다. 약을 넣고 마스크를 씌운다. 하나. . . 네엣. 다섯……. 춥다. 난 울고 있다. 눈은 안 떠진다. 운다. 수술 다 끝나고 회복실이다. 난 안 슬픈데 운다. 엄마도 운다. 손을 잡고 있다. 병실로 올라간다. 잠도 못 자게 한다. 풍선을 분다. 입 아프다. 왜 불어야하지? 그래. 수술은 잘 끝났다.

 

일주일 뒤 나를 지탱해주던 다리는 사형수에서 풀려났다. 처음 사 형수를 마주했다. 무섭다. 겁났다. 영화나 TV에서 왜 사형수들의 손을 빼지 않고 묶어두는 이유가 이 때문일까? 처음 보는 살벌함. 붕대를 풀자 내 무릎부터 발목까지 철심들이 관통하고 있고, 두꺼운 나사

핀이 살 깊숙이 박혀있었다. 처음 봐서 놀랬을 뿐 나중엔 내가 소독하고, 그 큰 대학병원 전체를 혼자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니고, 간호사 누나들한테 말 걸고, 꼬시고.

 

4학년. 2차 수술을 했다. 많은 기억은 없다. 수술에 대한 익숙함이었을까? 이번엔 허벅지 부분을 했다. 전엔 종아리부분이어서 자유로운 감이 있었지만 이번엔 움직임이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아마 이때쯤 난 꿈이 바뀌었다. 의사는 공부를 엄청 잘해야 한단다. 미술치료가 재밌었던 나는 화가를 꿈꾸게 되었다. 그 후론 잘 놀았다. 너무 재밌었던 기억밖에 없어 줄인다.

 

고등학교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예술이었기 때문에 책으로 하는 공부보다 여가시간에 특기와 취미로 자기계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생활의 시작은 싸움 잘하는 척에서 시작했다. 내가 귀여워 보일 것이라는 걸 알았다. 성공적. 1학년 중반쯤 담임선생님과의 진로상담이 있었고, 선생님은 내게 개그맨이라는 직업을 추천해 주셨다. 내가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선생님들께도 위트 있게 잘 기어오르는 모습 때문이라고 하신다.

 

개그맨이라는 꿈을 듣자마자 나는 미소가 번졌고 이게 진짜 하고 싶은 것이구나.’라 확정하게 되었다. 전부터 나는 치료에 대한 꿈을 가졌다. 목사, 의사는 공부를 많이, 그리고 잘해야 한다 해서 미술치료인 화가에 또 끌렸었지만, 이번엔 그저 개그맨이라는 단어에 매혹됐고 연기에 흥미가 생겼다. 그 후로 난 지금까지 연기를 하고 있다. 연기학원을 다니며 정말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그 선생님 덕분에 많이 발전을 하게 되었고 꿈을 잃지 않게 붙잡아 주셨다. 학원비도…….

 

이 말은 선생님께서 당시에 비밀로 하자고 하셨기에 많이 도와주셨다고만 말하겠다. 대학교는 예원예술대학교 연극영화코미디학과를 나왔다. 전혀 다른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만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의 새로운 생활은 날 미친 듯이 설레게 했다. 첫 경험에 대한 무서움들이 익숙해지면서 설렘으로 바뀐 거겠지? 캠퍼스의 꿈이 수업 듣고 과제하고 점수 매기고 고등학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 학년이 올라가면서 친구들이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났다. 정말 아쉬웠지만 내가 붙잡을 수는 없었다. 잡고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포기하는 것 또한 정말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4학년 개강 전, 내 다리에 문제가 생겼다.

 

발을 딛을 수 없을 정도로 무릎이 아픈 것이다. 그렇게 성인이 된 후 첫 수술. 엄청난 아픔이 있는 제일 최근의 아주 큰 기억이다. 소중한 친구가 내 옆을 떠나갔고, 엄마에게 상처 줄 것을 알지만 내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상처를 주었다. “엄마, 정말 미안해……. 정말 미안한데 엄마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 이 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울먹거리게 된다. 하지만 후회는 안한다. 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 당시의 아픔이 내 안의 어딘가로 숨어들어 갔을 테니까. 내가 한 말로 난 더 끈덕져졌으니까.

 

많이 힘들었다.’라는 표현을 나는 굳이 기억하지 않았다. 이 글을 쓰면서 되새겨 보니 당시에 힘들다라는 것이 지금의 행복하다를 만들어 준 것이라고 느낀다. 지금이 힘들다면 방법은 없다. 그 시기를 잘 보내면 지금의 힘들었다가 내일의 지금 행복하다로 바뀔 것이다. 지금 행복하면 되지 않느냐. 때때로 친구들에게 가식적인 위로를 한다. “나 같은 장애인도 하는데 넌 못하겠냐?” 속으로는 나 같은 장애인이어서 하는 거야(ㅋㅋㅋ)’라는 생각을 하면서. 벌써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로에서 배우로 작품을 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공연을 올리기 위해 날마다 연습 중이다. 내일은 어제 뭐가 힘들었을까?


전명희 기자
작성 2018.09.15 11:33 수정 2018.10.04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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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