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을 잔뜩 머금은 화려한 단풍산도 좋지만 능선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은백색의 억새산 역시 가슴을 설레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화창한 가을햇살과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은빛 파도처럼 일렁이는 새하얀 억새가 바람에 하늘거리며 서걱서걱 울어대는 소리는 가을여행의 색다른 묘미를 안겨준다.
국내 5대 억새 산행지 중 하나인 정선 민둥산의 들머리인 증산초교 입구 주차장에는 평일인데도 산객들이 타고 온 차량으로 가득하다. 코로나 여파로 억새풀 축제도 취소되었건만 워낙 억새로 유명해진 산이라 11월 말까지는 항상 붐빈다. 기차역도 증산역에서 민둥산역으로 개명될 정도이니 정선 골짜기의 산간오지가 산 하나로 인해 졸지에 전국적인 명소가 된 셈이다.
증산초교 길 건너편이 바로 산행 들머리다. 오늘 산행은 완경사인 4코스로 올랐다가 급경사인 2코스로 내려오는데, 산행거리는 6km 정도로 3시간 정도 소요된다. 4코스로 오르는 길은 지루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비탈을 따라 서서히 고도를 끌어올리는 완경사의 숲길이다. 산으로 올라가는 산길은 어느새 물기를 잃고 말라가는 풀들이 발길에 제법 사그락사그락 거리면서 무언가 준비할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참나무 이파리로 덮인 흙길의 부드러운 감촉을 즐기면서 걷노라면 낯선 산객들의 나지막한 숨소리도 정겹게 들린다. 숲길이 끝나고 간이매점이 있는 임도로 올라서면 산객들은 모두 매점 의자에 앉아 잠시 쉬어 간다. 매점 앞의 나무계단을 지나 전나무와 소나무 사이의 오솔길을 따라 20여분 올라가면 민둥산 8부 능선에 터를 잡은 억새들이 온 몸을 흔들면서 산객들을 반긴다.
가을이면 민둥산 정상 아래 너른 억새평전에는 가을의 향연이 벌어진다. 이 억새들은 사방팔방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민둥산 정상 부근은 육산인데다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한쪽 등로에 너무 몰리다보니 산길이 배겨내지를 못한다. 산객들의 답압에 의해 쓸려나간 흙이 아마 이 산 높이만큼 이나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바닥을 보호하기 위해 정상까지 고무판이 설치되어 있다.
산에 살면 억새고 물에 살면 갈대다. 대평원의 억새풀은 솜털 같은 꽃을 몸에 싣고 가녀린 몸뚱이만 흔들리며 빗살처럼 바람을 잘게 부수고 있다. 오늘따라 능선에 부는 바람은 그 위세가 대단하다. 야성이 넘치는 가을바람은 쉴 새 없이 얼굴을 때린다. 가을 산 억새가 처절한 생존 본능으로 냉혹한 자연에 꿋꿋하게 버텨내는 모습을 보니 숙연해질 뿐이다.
강원도 정선군 남면 무릉리에 위치한 민둥산(1118m)은 정상 부근이 석회암층으로 덮여있어 나무가 뿌리를 내리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민머리 산이 되었지만 가을이 무르익으면 정상은 모두 억새로 뒤덮인다. 둥그스름한 산 능선을 타고 끝없이 펼쳐진 억새밭은 약 20만 평이다. 투명한 가을햇살을 받아 산 전체가 은빛 물결에 휩싸인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특히 해질 무렵 하얀 억새가 불그스름한 노을빛을 받아 빚어내는 금빛 물결은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천상의 파노라마에 절로 탄성이 나온다. 평원의 억새는 가녀린 제 몸을 휘청거리면서 세상 풍파에 찌든 우리 영혼을 어루만져준다. 정상에 올라서서 사위를 둘러보면 부챗살처럼 펼쳐진 주변 고봉 준령의 수려한 산세와 화방재에서 함백산을 지나 피재에 이르는 백두대간 분수령의 웅장함과 장쾌함을 맛볼 수 있다. 정상의 전망대에 서면 높이 솟은 백두대간 위로 낮게 깔린 하늘이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민둥산은 카르스트 지형으로 지반이 여기저기 움푹 파인 독특한 형태를 지녔다. 대표적인 돌리네 지형인데 여기저기 푹 꺼진 구덩이는 모두 8개로, '팔구덩'이라 부르던 이름이 언젠가부터 슬며시 '발구덕'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해발 800m에 있는 산간마을 이름도 발구덕 마을로 불린다.
민둥산 억새는 사람보다 키가 큰 데다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그 사이로 한두 사람 정도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다져진 좁은 오솔길은 마치 곱게 가르마를 타놓은 것 같다. 가을바람에 춤을 추고 울어대는 억새풀은 더없이 낭만적이다.
정상에서 증산리 방향으로 하산한다. 2코스 등로에 쌓인 낙우송 이파리를 밟으면 '사각사각' 하고 내는 소리가 운치가 있고 정겹게 들린다. 급경사 길이다 보니 무릎이 다소 부담스럽기는 하다. 다람쥐가 나무 등걸 구멍 속에서 머리를 내놓는 모습을 눈에 담고, 갈잎이 바람에 휘날리는 소리, 낙우송이 떨어지면서 내는 싸락눈 같은 소리도 귀에 담으면서 비어가는 가을 산을 내려온다.
비움(空), 즉 무욕(無欲)의 느낌을 주는 민둥산을 뒤로 하고. 올 6월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한 정암사의 수마노탑에 축하 인사드리러 태백 고한으로 길을 잡는다.
빈 산, 떨어지는 해, 해질녘 산정의 억새는 주황빛을 발하고 민둥산 자락을 드리우기 시작하는 산 그림자가 아득해서 벌써 그리움 되어 다가온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