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가슴(마음)은 바다와 같다.
바람도 일고
파도도 친다.
그 깊은 속엔
진주도 있다.
-빈센트 반 고흐
The heart of man
is very much like
the sea,
it has its storms.
it has its tides
and in its depth
it has its pearls
too.
-VINCENT VAN GOGH(1853-1890)
‘가슴으로 하는 생각(Heart Thoughts: A Treasury of Inner Wisdom, 1990)’이란 책의 미국인 저자 루이스 린 헤이(Louise Lynn Hay 1926-2017)는 책 서두에 이 책을 ‘당신 가슴에 바치노라”며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 가슴은 모든 힘의
중심(中心/衆心/重心)
사랑의 원천(源泉)이다.
이 가슴에서 우리 생각의
무지개 떠오를 때
우린 쉽게 힘 안 들이고
어떤 기적도 일으키고
무엇이든 창조할 수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빌건대 당신도
이 무궁무진한
만능(萬能)의
힘의 샘물을
이제 지금 당장
거침없이 뿜어내고
아낌없이 뽑아 쓰시라.
Dedicated to Your Heart
Our hearts are the center of our power.
I have learned that we create easily and
effortlessly when we let our thoughts
come from the long space of the heart.
Claim your power.”
이 책에서 저자는 ‘학생이 배울 준비가 되면 스승이 나타난다. (When the student is ready, the teacher will appear)’는 서력 기원전 570년부터 479년 사이 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우리 동양의 노자(老子 Laozi) 말을 원용(援用),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우리 삶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킬 준비가 되는 즉시,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찾아 얻게 된다. (When we are ready to make positive changes in our lives, we attract whatever we need to help us.)”
이는 바로 바닷속 진주조개가 필요한 것만 모두 끌어모아 진주를 만드는 자연의 이치가 아니랴. 이것은 말을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 없다고 어거지로 하는 일은 죄다 ‘쇠귀에 경 읽기’란 뜻인 것 같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억지 부려서 될 일 아니고 또 억지 써 봐도 결코 그 결과가 좋지 않아, 매사를 순리대로 해야지, 안 될 일은 아무리 기를 쓰고 악까지 써본들 헛일이란 것이다.
특히 인간관계 그 가운데서도 남녀 사이는 결코 억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두 번 세 번 아니 여러 번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포기할 일은 빨리 포기하고 잊을 사람은 빨리 잊어야지 오래도록 미련을 갖고 집착해 보았자 더 큰 상처만 더욱 깊이 받게 되는 것이리라.
그래도 사람은 머리 돌아가는 대로 살기보다는 가슴 뛰는 대로 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다. 가슴 뛰는 대로 살다 보면 현실적으로 크게 손해 보고 피해를 많이 입겠지만 끝장에 이르러 이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그 어떤 미련도 후회도 회한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주위에서 누가 뭐래도 이렇게 제 가슴 뛰는 대로 살다 보면 혹 남 보기에는 실패작으로 불행해 보일런지 몰라도 본인 스스로는 더할 수 없이 스스로에게 만족스럽고 행복하리라.
그 실례를 시인 윤동주를 비롯해 열사 전태일과 지난 2007년 60세로 타계한 장편체험소설 ‘잃어버린 너(1987년 출간)’의 김윤희 작가에게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각자 스스로 진정 행복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남한테 행복하게 보이려고 신경을 더 쓰는 것 같다. 남 보기에 성공한 것처럼 행복한 것 같이 보인다고 반드시 성공한 것도 행복한 것도 아닐 텐데…
진정으로 본인이 스스로에게 유감없이 최선을 다할 때 참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유감없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자기 가슴 뛰는 대로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다 죽는 게 아닐까. 인간은 누구나 자기식으로 행복할 자유와 권리와 의무가 있지 않은가. 이것이 ‘잃어버린 너’라기보다 ‘되찾을 나’이기 때문이리라.
미국 시인 칼 샌드버그(Carl Sandburg 1878-1967)는 그의 자서전 ‘언제나 젊은 낯선 사람들(Always the Young Strangers, an autobiography, 1953)에서 대장장이였던 그의 아버지 삶을 같은 세대의 유명한 미국의 정치인 제임스 블레인(James G. Blaine 1830-1893)의 인생과 대조시켜 수많은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미덕(美德)을 아래와 같이 칭송한다.
“속된 욕심에 찬 야망, 허위와 허세, 임시변통의 책략과 속임수로 점철된 제임스 블레인의 인생역정을 되돌아볼 때 그의 부귀공명 보다 차라리 나는 내가 일일이 이름을 댈 수 있는 20여 명의 단순 소박한 노동자들의 삶을 택하리라.
이들은 세상이 좁다고 설치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개혁하려 들지 않고 각자 자기가 하는 일에 재미를 내고 보람을 느낀다. 저 높은 자리에서 점잔빼며 사악한 음모를 꾸미는 명예와 재산의 매춘부들과 비교할 때 나는 나의 부친 오거스트 샌드버그의 삶과 공적을 바로 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은 비록 그 어떤 위원회 위원장이거나 위원은 아니었어도 아무것도 아닌 무명씨라기보다 유명씨 그 누구였다고. 당신 인생 순례길에 만나는 아무에게도 못할짓 하지 않고 당신을 알게 된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삶을 주고 가셨다고…’
이 말에 우리나라의 한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 떠오른다. 서울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1970년 11월 13일 서울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 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인간 선언’이라 부른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떤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며 그는 싸웠고 그는 죽어 갔다. 그야말로 2천여 년 전 예수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그는 죽기 얼마 전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분신에 임박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 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못다 굴린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고 하더라도
굴리는데, 굴리는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영원의 축소판이 순간이고, 우주만물의 결정체가 모래 한 알, 물 한 방울,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구름 한 점, 별 하나, 나 하나이듯, 그의 이름 그대로 우리 모두 전부 다 크게 보아 같은 하나임을 그의 삶을 불사른 죽음 아니 사랑의 불꽃으로 밝혀 보여준 우리 모두의 ‘나’ 全泰一의 부활과 재림 환생(還生)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구상에서 노동운동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전태일은 우리 모든 ‘코스미안’의 화신(化神/化身)이어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코스미안'사상 창시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