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백양사로 들어서는 사하촌 길가에는 수확을 마친 빈 논에 쌓아 둔 하얀색 원통 볏단이 정겹고 높고 맑은 하늘 아래 펼쳐진 산과 들이 신선하다. 길가 빨간 단풍잎 가로수 아래에는 장성 특산물 단감과 대봉감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서있다. 평일이지만 백양사 주차장은 가을 정취를 즐기려는 단풍객 차량으로 가득하다. 주차장 옆 맑고 잔잔한 연못 위에 낙엽이 떠다닌다. 물속에는 가을산과 단풍나무가 잠겨 있다. 저 물빛을 따라 대웅전까지 이어지는 1.2km 길은 단풍나무로 장식된다. 길 양편 나무가 가지를 맞댄 곳은 단풍터널을 이루어 백양사 가는 발걸음을 한껏 들뜨게 해준다.
세 살배기 손바닥처럼 앙증맞은 애기단풍잎에 감싸인 백양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늦게 가을을 떠나보내는 곳으로 유명하다. 단풍나무들 사이로 갈참나무 군락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자생하는 30그루 갈참나무는 300년 나이테를 넘어선 노목이다. 우리나라 갈참나무 중 가장 수령이 오래된 700살 갈참나무도 있다.
연못 위에 또 연못이 있다. 아름답고 단아한 쌍계루와 유난히 붉고 고운 단풍나무 위로 수려한 백학봉이 펼치는 풍경은 가히 절경이다. 연못 아래 징검다리에 서면 물에 어리는 쌍계루 반영에 잠시 넋을 빼앗긴다. 이곳은 널리 알려진 포토 존이라 탐방객들의 자리경쟁이 치열하다. 데칼코마니처럼 연못에 전사된 경치는 황홀과 감탄의 합주곡이다. 숨이 멎는 듯, 미에 대한 패닉에 빠진다. 연못은 가을빛 고운 단풍이 오색 물감을 풀어 그려놓은 한 폭의 수채화다. 정비석이 <산정무한>에서 그린 것처럼 "만산(萬山)의 색소는 홍(紅)!"이라고 경탄한 그런 단풍 천지가 펼쳐지고 있다.
사바사계 속계와 불법의 세계 선계를 이어주는 쌍계루 옆 홍교를 건너면 백양사 경내다. 절집 입구 사천왕문의 ‘고불총림 백양사’란 현판 글씨가 선승의 묵언처럼 푸르고 깊다. 백양사는 백제 무왕 때 창건하여 고려 때 정토사라 불리다가 조선 선조 때 백양사로 고쳐 불렀다. 1,400년이나 되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고찰답게 백양사 경내 곳곳에서는 감히 범접하지 못할 기운이 흐른다. 그래서 처마에 걸린 단풍잎 하나도 예사롭지 않다.
백양사는 절 뒤쪽에 거대한 암벽이 있다. 약간 흰색을 띠는 암벽인데 멀리서 보면 커다란 백학이 앉아 있는 모습이라 하여 백학봉(白鶴峰)이라 부른다. 육당 최남선은 이 바위를 두고 "백학봉은 흰 맛, 날카로운 맛, 맑은 맛, 신령스런 맛이 있다."고 극찬하기도 하였다.
백양사에서 약사암과 운문암으로 가는 숲길은 가을로 가득하다. 온갖 수목이 오색으로 물들고 애기단풍의 붉은 빛이 햇살에 빛날 때는 마치 혼 불을 보는 듯하다. 저 빨갛고 노란 나뭇잎이 영혼을 물들이고, 한 생이 타오르며 절정의 시간에서 소멸로 가는 그 마지막 아름다움을 절집 숲길에서 만난다.
적정이 흐르는 단풍나무 숲길을 지나 산새 소리 들으며 걷다 보면 어느새 약사암과 운문암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약사암으로 오르는 산길은 난대성 침엽수인 비자나무 5천 그루가 비경을 이룬다. 비자나무는 잎이 아닐 비(非)자 모양을 하고 있다. 백암산은 비자나무 북방한계선인데, 천연기념물 제153호인 이곳 비자나무는 고려 때 각진대사가 심었다고 전해온다.
약사암까지는 300계단, 백학봉까지는 1670계단을 올라야 한다. 약사암 오르는 길에 만난 간판에는 ‘생각하며 걷는 오르막길’이라는 제목과 함께 ‘약사암, 빨리 가면 30분, 천천히 가면 10분’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잠깐 숫자가 뒤바뀐 게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이내 의미가 있는 글귀임을 깨닫는다. 이 가파른 길을 다리 근육이 아니라, 마음으로 걸으라는 이야기이리라.
300계단을 올라 만난 약사암에는 중생을 병고에서 구제하는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다. 약사암에는 절집 간판이 정토사에서 백양사로 바뀐 사연이 담겨 있다. 조선 선조 무렵 환양선사가 약사암에서 강론을 할 때 사람들과 스님 그리고 산양 등의 동물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법회를 마친 환양선사가 선정에 들었는데 흰 양이 꿈에 나타나 “스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축생의 몸을 벗고, 이제 사람의 몸으로 환생하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약사암 마당 끝 장독대 앞에 서면 저 아래로 백양사가 내려다보인다. 숲의 바다 한가운데 절집이 들어선 형국이다. 단정한 절집의 처마선이 숲과 어우러지는 모습을 내려다본다. 약사암에서는 계곡 사이로 피어오르는 단풍과 함께 1,400년 세월을 민초를 품고 자연과 함께 지내온 천년사찰 백양사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낙엽이 아무렇게나 쌓인 공양간 앞마당의 고목 아래 놓인 평상이 당우와 어울린 풍경은 소박해서 아름답다. 산사의 가을은 이렇듯 운치가 있어 좋다.
약사암 위로 가파른 절벽 아래 세워진 영천굴이 있다. 영천굴은 백양사의 전설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굴 입구에는 석간수인 약수가 있다. 목마른 이를 기다리고 있는 옹달샘과 표주박이 고맙고 반갑다. 2층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이다. 산골짜기 물의 소임은 맑은 물을 하류로 흘려보내는 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산중 암자는 마치 그 존재 자체로써 저잣거리의 중생들을 위안하고 평정에 들도록 일깨우고 있다. 백암산 자락의 작은 암자들은 소리 없는 가르침으로 오늘도 여전히 불쌍한 중생들을 위무하고 있다.
백학봉을 오르는 가파른 계단 길은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하지만 몸이 고단하니 영혼이 맑아진다. 계단 길 끝에 만나는 백학봉(651m)에서 아래를 보면 천애절벽으로 오금부터 저려온다. 깎아지른 바위 절벽 아래로 오색 융단을 깔아 놓은 듯 단풍의 파도에 아찔해진다. 멀리 보이는 능선들은 선녀의 옷자락 같은 흰 구름에 가린 채 보일 듯 말 듯 하여 그대로 선경이다.
백학봉에서 상왕봉 가는 길은 외길인지라 길을 잃을 리 없고 산은 육산인지라 발끝에 닿는 흙의 촉감이 사뭇 부드럽다. 청명한 가을 하늘과 맞닿은 조릿대 터널은 끝없이 이어진다. 산죽을 조릿대라고도 부른다. 예전에는 쌀에 돌이 많아 조리질을 했는데 그 조리를 만드는 재료가 바로 산죽이었다. 키 높이로 빽빽이 들어서서 하늘을 가린 조릿대 숲을 지나는 길은 어둡고 서늘하지만 청신한 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하늘이 갑자기 스멀거리더니 우박이 내리기 시작한다. 골바람까지 달려와 능선의 산죽 숲을 흔드니 청아한 소리를 내던 새들 지저귐은 사라지고 숲은 곧 적막에 빠진다.
능선을 따라가면 계속가면 오른쪽으로 구암사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구암사에서 출발하면 정상인 상왕봉에 가장 빨리 오를 수 있다. 왕복 2시간 밖에 걸리지 않아 100대 명산 인증 샷을 찍기 위한 산꾼들이 즐겨 찾는 코스다. 샛길로 빠지지 말고 계속 직진하면 백학송에 이른다. 백학송은 백암산을 지켜온 수호신, 마치 분재 같은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노송이다. 여기서 바라보는 전망은 가히 압권이다. 구름에 가려 있던 해가 준령들을 비추니 바로 앞 도집봉과 가인봉, 사자봉 너머 호남정맥 산군들이 펼치는 그 겹겹의 능선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날씨는 흐렸지만 무등산 천왕봉까지 보인다.
상왕봉 가는 능선은 산책로처럼 길이 편하다. 유순한 산길을 따라가면 좌우 길이가 100m가 넘는 하나로 된 거대한 바위 기린봉을 만난다. 이어서 순창새재로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가면 순창새재를 지나 내장산 신선봉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하루에 내장산 신선봉과 백암산 상왕봉 두 봉우리를 모두 등정할 수 있다.
이윽고 백암산 정상 상왕봉(741m)에 도착한다. 백암산 정상 상왕봉(象王峰)은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불교에서 따온 말이다. 불교에서 상왕은 부처님을 의미한다. 상왕봉은 내장산, 입암산 줄기와 맞닿아 있어 백암산은 내장산 국립공원에 속한다. 백암산은 단풍이 물든 가을은 물론 새순이 돋는 봄에도 싱그러움을 한껏 발하는 아름다운 산이다. 옛 부터 ‘봄이면 백양, 가을이면 내장’이라 했듯이 백암산의 절경은 내장산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상왕봉 정상에 서면 몽계계곡과 북서쪽으로 방장산과 입암산, 북동으로는 내장산, 남동으로는 운무에 쌓인 무등산이 한 폭의 수묵화를 그려낸다.
정상에서 하산해서 내려오면 사거리 이정표가 나온다. 오른쪽은 몽계폭포, 직진하면 사자봉, 왼쪽은 계곡을 통해 운문암과 백양사로 가는 길이다. 백양사 선원 운문암은 가을철 아침이면 백학봉과 도집봉의 운무가 가득한데도 햇살이 문처럼 드리워지며, 그 아래로 태양빛이 떠오른다고 해서 ‘운문암(雲門庵)’이라고 이름지었다한다. 운문암으로 내려서는 하산 길은 만추의 단풍이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며 빚어내는 홍염의 세상이다. 옛날 백양사를 찾은 정몽주는 여기 스님이 시를 청하자 백암산의 아름다움이 너무 강해 차마 글로 표현하지 못하자 이를 아쉬워하는 시를 남겼다고 하는데, 하물며 더 이상 무슨 필설이 필요하리.
암자 입구에 수행도량이라 사람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을 보니 한편 서운하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 절인데.
운문암에서 은은히 울리는 종소리는 산행에 지친 몸에 쉼표를 그려주고 암자 솔향기까지 유난하니 나그네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산행 날머리 백양사에 도착하니 절집 담벼락에 뒹구는 낙엽 하나도 그 빛깔과 모양이 다르다. 자연은 어느 하나 소홀함이 없이 세상 모든 유무정물(有無情物)에게 개성을 준 것일까.
자연은 가을이면 붓 한 자루 집어 들고 청단, 홍단, 단풍 그림을 산에다 그려댄다.
가는 가을을 만끽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백양사로 달려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