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편찬원은 광복 이후 서울 학생들의 통학 실상을 여러 소주제로 나눠 조명하는 연구서 '광복 이후 서울지역 학생들의 통학과 생활문화'를 발간했다.
광복 전 초․중급 학생의 통학 실태를 분석한 글을 서두로, 광복 이후 서울지역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의 통학구역(‘학구(学區)’로 약칭) 설정과 위반 문제, 고등학교의 학군(學群)과 통학, 대학생의 통학환경과 대학촌, 청소년 잡지 ≪학원≫을 통해 본 중고생들의 통학과 방과 후 생활, 강남 학군 성립과 관련된 반포주공1단지 아파트 등 총 7편의 논문을 싣고 있다.
1920년대 초 조선에 불어 닥친 ‘향학열’은 철도 인프라를 바탕으로 ‘기차통학’이라는 새로운 일상을 창출했다. 경성과 연결된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중 가장 많은 학생이 승차한 역은 경인선의 상인천역이었다. 1939년 기준 기차통학생은 3,104명이며, 이 중 경성 근교가 57%, 인천․수원․개성․의정부 이내가 35%, 그 밖 지역이 8%를 차지했다. 배차간격이 컸던 당시 기차통학생에게 가장 괴로운 문제는 기차 운행시간 맞추기였다.
경성의 대중교통은 전차 중심이었다. 승객 증가에 비해 증차가 부족해 전차는 1920년대부터 ‘만원’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1937년 경성부 전차통학생은 3만 명으로, 통학 때 경성의 ‘러시아워’는 일상이 됐다. 1928년 등장한 버스 역시 ‘만원버스’였다. 경성의 통학난은 학교 위치와도 관련돼 있었다. 각 방면마다 같은 노선을 이용하는 학교들이 몰려 있었고, 통근자와 경로가 겹치는 곳은 더더욱 ‘교통 혼잡’을 피하기 어려웠다.
경성 시내 통학을 더욱 어렵게 한 것은 ‘시국=전시체제’였다. 전시체제의 핵심은 소비억제였고, 이는 학생들에게 도보통학 장려, 나아가 도보통학의 제도화로 귀결됐으며, 당국에서 학생들의 ‘차내 불착석’을 결의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의 초등 의무교육 추진은 학교 부족을 초래했다. 학교 신설도 있었지만, 교육 재정이 열악해 2부제․3부제 실시는 물론, 일본인학교의 공립학교 전환, 적산(敵産) 건물의 활용 등이 해결책을 제시됐다. 그러나 어떤 대책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고, 그것은 곧 학생들의 통학난 가중으로 연결됐다.
통학난이 광복 이후 더욱 심해진 이유는 서울의 인구 급증 때문이었다. 더욱이 1946년 북한의 전기 공급 중단은 전차 중심의 교통체계였던 서울의 교통난을 한층 심화시켰고, 학생들 통학환경 또한 더욱 열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여러 회고록을 통해 통학난 경험이 사대문 안 거주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들 사이에 큰 간극이 있었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광복 직후의 삶에서 ‘그 당시엔 모두 힘들었다.’는 말로만은 수렴될 수 없는 일상의 격차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광복 이후 서울지역 학생들의 통학과 생활문화'는 서울 소재 공공도서관 등에 무상으로 배포돼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다. 구입을 원할 경우 서울책방에서 구매할 수 있으며, 책값은 1만 원이다. 다만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서울책방 온라인(https://store.seoul.go.kr)을 통해서만 구매할 수 있다. 12월부터 서울역사편찬원 홈페이지(history.seoul.go.kr)에서도 전자책으로 열람할 수 있다.
서문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