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미국 대선 선거가 끝난 지 2주가 되었어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한 걸 인정하지 않고 증거도 없이 부정선거 사기가 있었다며 졸장부의 몽니를 부리고 있다.
사람이 세상을 살다 보면 어쩌다 우연히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거나 전복위화(轉福爲禍)가 되기도 하지만 더러는 마음먹기에 따라서 화(禍)를 복(福) 아니면 복(福)을 화(禍)로 만들 수가 있지 않던가.
미국 대선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선거 중 하나로 꼽히는 1960년 대선에서 리처드 닉슨이 존 에프 케네디에게 패하자 당시 공화당 대통령이든 아이젠하워는 부통령이든 닉슨에게 초박빙의 선거결과는 민주당의 사기 때문이라며 승복하지 말고 선거결과에 도전할 것을 권했으나 선거 불복은 미국의 헌법상 위기와 분열을 초래한다며 승복했다.
그 이후 닉슨은 1968년과 1972년 잇따라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재임 도중 사임하게 되었고, 로널드 레이건에 패해 재선에 실패했던 지미 카터는 인권운동가로 변신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2000년 대선에서 억울하게 조지 W. 부시에게 패한 앨 고어 부통령은 환경보호 운동가로 2007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수상하고, 기후변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그해 아카데미 상을 받기도 했다.
“정치는 종교가 아니다. 증거에 근거해야지 신학(神學)에 입각하여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Politics is not religion and we should govern on the basis of evidence, not theology,”
이 말은 빌 클린턴 전(前) 대통령이 자신의 회고록 ‘나의 삶(My Life) 출간을 앞두고 시카고에서 2000여 도서판매업자들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할 발언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를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며, 클린턴은 급변하는 세상에서 새로운 정치적 패러다임을 찾으려는 현상이고, 지금(당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미국에서 전에도 있었고 특별히 걱정할 일 아니라고 미국민을 안심시켰다.
빌 클린턴은 그의 회고록을 두 권의 책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첫째는 자신의 삶과 미국 이야기, 그리고 이 둘이 어떻게 섞여 짜여 있는지, 시골에서 자라 어린 시절 자기가 어떻게 정치지망생이 되었는지, 특히 1960년대를 뒤돌아볼 때 좋은 일이 나쁜 일보다 많았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민주당원이고 그 반대이면 공화당원일 것이라며 그는 청중을 웃겼다.
이 회고록 둘째 부분은 그가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쓴 일기장 같은 것으로 정책에 관한 내용이 너무 많이 들어 있지만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사람들이 이해해주기 바란다고 그는 말했다.
책 속에 그의 어렸을 때 얘기들이 많은데 그 일화로 한 뚱뚱하고 볼품없이 생긴 버논 선생님 이야기가 있다. 버논 선생님이 어린 학생들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버논아, 너는 참 아름답고 멋있다’라고 스스로에게 하는 말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다. 그래서 클린턴 자신도 매일 아침 그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칭찬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또 회고록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들은 콜롬비아의 노벨 문학상(1982) 수상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 1927-2014)의 소설에 나올 만한 인물들이라고도 했다.
이 회고록은 9·11사태 이후로 자신의 인생관과 철학이 어떻게 작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심사숙고(深思熟考)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면서 많은 대통령 회고록들이 읽기 지루한데 자신의 책은 흥미로운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그의 희망 사항을 말했다.
널리 보도되지는 않았었지만 9.11 직후 클린턴은 (그 당시) 미국이 겪고 있는 테러에 의한 고통은 미국과 기독교인들이 인류에게 저지른 원죄(原罪)에서 비롯한 것임을 상기시켰다.
자신의 모교인 조지타운 대학에서 행한 연설에서 테러는 수백 년 전부터 이 땅에 존재했고, 우리는 노예제도를 기초로 국가를 건설했으며 수많은 노예들이 이유 없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땅이나 자원을 빼앗기 위해 원주민들을 죽였고 그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했다. 우리는 아직도 그 죗값을 다 갚지 못했다.
첫 번째 십자군 원정 때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교회에 가둬 불태웠으며 예루살렘 신전 언덕에 살고 있던 모든 이슬람 교인들을 살해했다. 중동에서는 아직까지도 이 일을 잊지 못하고 있다. 테러범들은 대부분 자율성이 없는 나라에서 집단의식의 미성숙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런 나라의 어린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이 전쟁보다 훨씬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반(反)테러 정책이라고 말했다.
우리말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듯이 이미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클린턴은 아주 어려서부터 싹이 파랬던 것 같다.
유복자로 태어나 주정뱅이 계부 밑에서 자라면서 툭하면 계부가 엄마를 때리는 것을 보다 못해 하루는 만취 상태로 쓰러져 있는 계부를 보고 어린 (당시 8-9세였던가) 빌(Bill)이 아주 근엄(謹嚴)한 표정과 위풍당당(威風堂堂)한 자세로 ‘내 얼굴 똑바로 바라보고 잘 들으시라’며 엄중(嚴重)히 경고(警告)했는데, 그때부터 계부는 두 번 다시 엄마에게 손찌검하지 않고 빌과 다정한 부자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어린애지만 너무도 당당(堂堂)하고 위엄(威嚴)있는 빌의 기세(氣勢)에 그만 정신이 번쩍 들었었으리라.
그 후로 빌은 대학 다닐 때 주말이면 수백 마일을 운전해서 암으로 입원해 있는 아버지 병문안을 했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대통령직을 퇴임한 후 어떤 기자가 왜 르윈스키와 바람을 피웠느냐고 묻자 ‘그럴 수 있었기 때문이다. Because I could.’이라고 대답했다지 않나.
이렇게 너무도 인간적으로 솔직하고 인간미(人間味/美) 넘치는 빌 클린턴을 그 누가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어쩌면 그는 우리 모두의 타고난 악동기질(惡童氣質)까지 십분발휘해 삶을 만끽해 온 낙천주의자임에 틀림없어라. 2000년 7월 21일에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클린턴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고 골프를 치러 갔다.
“삶에는 리듬이 있지요. 세상에서 가장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들은 삶의 리듬대로 (내가 말을 바꿔보자면, 우리 가슴 뛰는 대로) 가능한 최대한으로 인생을 즐긴답니다. 불평불만(不平不滿)에 차서 신세타령(身世打令)이나 하지 않고 열심히 살면서 삶의 축복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크게 될 ‘클’짱, 아니 빌고 빌 ‘빌’짱 만세! 만만세!! 부르리라.
인류 역사 유사 이래 늘 그래왔겠지만, 특히 최근 한 세기 동안 자연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인문 사회 과학자들까지도 무질서해 보이는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 질서 정연한 코스모스를 발견한다. 물리 화학 생물학 분야는 물론 금융경제 시장에서도 모든 것이 불가분(不可分)의 연관성(聯關性)을 갖고 계속 변화 발전 진화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철학자 종교인이 아니라 해도 우리 모두 누구나가 다 우주 천체 자연이건 인류나 민족 또는 개개인에 있어서건 단편적으로 분해 분석하면 무의미하고 상관없어 보여도 이 모든 자연현상이나 인간사(人間事)를 종합해 볼 때 그 어떤 뜻과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것이리라.
다시 말해 카오스의 불행과 비극조차도 우리는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해 낙관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미국 작가 필립 로스 (Philip Roth 1933-2018)가 그의 작품 ‘방송 중(On the Air: A Long Story)’에서 말하듯이
세상이 일종의 쇼라면
우리 모두 다 저 하늘 높이 계신
대 연출가가 물색 스카우트해 놓은
탤런트 연예인이라면
‘대 인생쇼’에 출연하는!
오늘날 우리가 신문이나 TV뉴스를 보거나 우리 각자가 겪는 현실을 관찰하면 마치 영화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전쟁영화, 괴기영화, 탐정영화, 비극영화, 희극영화, 공상과학영화, 호러영화, 도색영화, 연애영화, 만화영화…
운명(運命)이란 작은 그림은 우리 각자가 그리지만 숙명(宿命)이란 큰 그림은 그려지는 것이라면, 개개인 각자가 의식적이든(consciously) 무의식적이든(unconsciously), 아니면 잠재의식적이든(subconsciously) 초(超)의식적이든(superconsciously) 주어진 어떤 역할(役割)을 하게 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언젠가 연극인 윤문식 씨가 한 인터뷰에서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연기인 입장에서는 주연이 가장 재미 없다. 왜냐하면 ‘악역’을 맡은 조연, 엑스트라 등 다른 배우들이 다 잘해 줘야만 주연이 살아나고 빛이 나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같은 사람도 남이 하지 못하는 독특한 천부(天賦)의 임무(任務)를 ‘막가파’ 식으로 철저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공전(空前)의 대반면교사(大反面 敎師)로 말이어라.
그러니 좋은 본을 보여주는 스승보다 나쁜 본을 보여주는 반면교사가 더 큰 스승이라면 클 대장부(大丈夫) 아니 작을 소장부(小丈夫), ‘졸장부(拙丈夫)’ 트럼프 만세, 클짱 아니 졸짱 만만세를 불러보리라.
지난 6월 29일자에 올린 우생(愚生)의 '항간세설' 222회를 끝으로 '마지막' 글을 쓴 후에도 좀 미진(未盡)한 느낌을 보충 보완한다고 39편의 칼럼 글을 9월 4일 자 '추가 칼럼을 끝내면서’까지 더 쓰게 되었는데, 어쩌다 또 그 후로도 오늘까지 추추가(追追加) 칼럼 글 39편을 더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코스미안뉴스에 총 300편의 글이 실렸습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깊이 감사합니다.
글을 쓰겠다고 쓴 것이 아니었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써본다고 한편 한편 쓰다 보니, 정말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많은 글을 쓰게 되어 나 자신 믿어지지 않고 놀라울 뿐입니다. 실은 제가 글을 썼다기보다는 저도 모르게 글이 쓰여졌다는 게 맞는 말일 것 같습니다. 미국 작가 로저 로젠블라트(Roger Rosenblatt, 1940 - )도 그의 에세이 '이게 전부인가? Is That All There Is?’에서 이렇게 실토(實吐)합니다.
"어찌 보면 모든 글은 에세이 쓰기다. 호로에서 미(美)를, 결핍(缺乏)에서 숭고(崇高)함을 발견하려는 끝없는 시도(試圖)이다. 자연스럽게도 벌(罰)과 상(賞) 그리고 사랑을 거부(拒否)하는 모든 인간사(人間事)에서 처벌(處罰)하거나 포상(褒賞)하고 사랑하려는 노력 말이다. 이는 아주 힘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로서 마치 신(神), 또는 뭐라 하든, 신적(神的)인 존재를 믿는 일과 다르지 않다. 때로는 글을 쓰는 동안 내가 다른 누군가의 디자인에 따라 어떤 하나의 예정(豫定/豫程)된 기획(企劃/奇劃)의 일부를 수행(修行/遂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된다. 그 다른 누군가는 신(神)일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어느 날 그동안 내가 한 모든 일들을 돌이켜보면서 생각하리라. 이게 신(神)이 내게 의도(意圖)한 전부일까. 하지만 이것이 내게 주어진 전부이어라. In a way, all writing is essay writing, an endless attempt at finding beauty in horror, nobility in want – an effort to punish, reward and love all things human that naturally resist punishment, rewards and love. It is an arduous and thankless exercise, not unlike faith in God. Sometimes, when you are in the act of writing, you feel part of a preordained plan, someone else’s design. That someone else might as well be God. And then one day you rear back and survey everything you have done, and think, Is this all God had in mind? But it’s all you got.”
어디 이것이 에세이 글쓰기에만 국한(局限)된 일이겠습니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 지금껏 살아온 순간순간이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내가 살아왔다기보다 살아져 왔다고 해야 하겠지요. 내가 어려서 혼자 산을 타다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다 보면, 어느 틈에 산꼭대기까지 올라 까마득한 산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면서 속으로 경탄했습니다. ‘아, 내가 어떻게 이렇게 높이 올라왔나!’ 저 아래 땅에 있던 내가 이 산꼭대기로 올라와진 사실을 발견하고서…
끝으로 금년 말이면 만으로 여든네 살 되는 내 삶을 대변해주는 한 마디를 인용해 보고 싶습니다.
2015년 출간된 ‘예순: 내 예순한 번째 해에 쓴 일기장-끝의 시작, 아니면 시작의 끝(Sixty: A Diary of My Sixty-First Year: The Beginning of the End, or the End of the Beginning?’에서 캐나다 언론인 이안 브라운(Ian Brown, 1954 - )은 예순 번째 생일에 시작해서 예순한 번째 생일에 마감하는 그의 일기를 아래 와 같이 끝맺습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어떻게 노력했든 간에 그의 생애란 스스로 형성(形成)된다. 하지만 내 삶의 형태(形態)가 앞날의 안개 속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고 그 모습이 경이(驚異)로울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만족(滿足)스러운 (바로 그 말이지) 일이리라. One’s life shapes itself, regardless of one’s efforts to curve it one way or another. It would still be gratifying (that’s the word) to think the shape of my life might emerge out of the future mist, and that it might still be a surprise.”
얼핏 20세기 스페인 작가 라몬 고메즈 데 라 세르나(Ram’on G’omez de la Serna 1888-1968)의 말이 생각납니다.
“알의 날개는 숨겨져 있다. The egg has its wings hidden.”
코스미안뉴스에 300번째 실리는 이 글을 끝내면서 이 300편의 글 내용을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의 이슬방울로 이 지구별에 태어난 우리 모두 사랑의 피와 땀과 눈물방울로 하늘하늘 피어올라 코스모스무지개가 되어보리란 것입니다.
199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 1931-2019)이 그녀의 장편소설 ‘재즈 (Jazz, 1992)’에서 증언(證言)하듯 말입니다.
“난 사랑에 빠지지 않고 사랑으로 올랐노라. I didn’t fall in love, I rose in it.”
침침한 내 눈앞에 오세영 시인의 시 ‘우화(羽化)’가 선명(鮮明)히 떠오릅니다.
봄
서가(書架)를 청소하다가
우연히 뽑아 든, 빛바랜 시집 한 권
먼지를 털고 지면을 열자
팔랑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작년 늦가을
책갈피에 꽂아 끼워둔
코스모스 꽃잎
인디고블루
그 적막한 하늘
우화(羽化),
아, 코스모스 꽃잎 하나가
팔랑
한 마리 나비로 날아오르듯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의
한숨 한숨이 아지랑이처럼
아롱아롱 숨차게 피어올라
하늘 무지개 되리
아니
코스모스 무지개 되리
버락 오바마 전(前) 미국대통령(44대 2009-2017)의 회고록 ‘약속된 땅(A Promised Land)’이 2020년 11월 17일 출간되었지만 코스미안뉴스 독자 여러분께서 새로운 세상 코스미안 시대를 열어주실 것을 꿈꾸면서 이 글을 맺습니다.
이태상 드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