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산에 붉은 이파리 홍단풍이 한가득 피어나니 주(朱)에서 적(赤)으로, 홍(紅)에서 단(丹)으로 변해간다. 덕분에 만산이 모두 빨갛다. 이런 날 햇살까지 수정처럼 파랗게 투명하니 이게 무상의 보시가 아닌가. 과분한 호사가 아닐 수 없다.
호남 땅 무주(茂朱)는 고을 주(州)가 아닌 붉을 주(朱)를 지명에 쓰는 고을이다. 홍(紅)이 아니라 주(朱)다. 귀신 쫓고 역마를 피할 수 있는 이름이니 어찌 청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왜란을 겪고 난 후 선조는 절벽으로 둘러싸인 적상산에 사고(史庫)를 짓고 중요한 조선왕조실록을 은밀하게 보관하였다.
적상산(赤裳山, 1030.6m)은 ‘빨간 치마를 두른 산’이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면 정상부에서부터 붉게 변하는 단풍이 마치 여인들의 빨간 치마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 공민왕 때 최영 장군이 왜구를 토벌한 후 귀경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산의 형세가 요새로서 적임지임을 알고 왕에게 축성을 건의하여 산성이 만들어졌는데 조선실록이 이곳에 보관되면서 산성이 증축되었다고 한다. 정상 분지에는 발전용으로 만든 인공호수인 적상호와 함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적상산 사고와 그 사고를 지켰던 호국사 역할을 했던 고찰 안국사가 있다.
적상산은 도보산행 뿐 아니라 차를 가지고도 오를 수 있다. 무주 양수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정상까지 닦은 15km의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오색찬란한 단풍으로 물든 가을이 주는 감동의 여운을 한참 즐기면서 가다 보면 적상산 8부 능선에 있는 안국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원래 안국사는 수몰지대에 있는 바람에 옛날 호국사가 있던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적상산 안국사(安國寺)는 승병을 양성하던 호국사찰이었다. 고려 충렬왕 때 창건했고 광해군 때 조선왕조실록을 봉안한 적상산 사고를 설치하려고 이 절을 늘려지어 사고를 지키는 호국사 역할을 하게 했다고 한다. 영조 때 법당을 다시 지어 나라를 평안하게 해주는 사찰이라 하여 안국사라 부르기 시작했고, 1910년 적상산 사고가 폐지될 때 가지 호국의 도량 역할을 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산정에서 바라보면 안국사는 절집이 아니라 거의 요새에 가깝다. 지금이야 구곡양장의 도로를 따라 올라가야 닿을 수 있다지만 예전에는 험준한 산성으로 가히 접근하기 힘들었던 곳이다. 편안한 나라(安國), 지켜야 할 나라(護國)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절 이름에까지 녹아든 것이다.
적상산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안렴대로 오른다. 야함경에는 산 정상을 올라가 보라는 부처님 가르침이 담겨 있다. 높은 곳에 오르면 더 멀리 볼 수 있어 산 아래처럼 좁은 소견으로 살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적상산의 남쪽 층암절벽 위에 위치한 안렴대(按簾臺)는 고려 시대 거란이 침입했을 때 삼도 안렴사가 군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와 진을 치고 난을 피한 곳이라 하여 안렴대라 불렸다. 병자호란 때는 적상산 사고 실록을 안렴대 바위 밑에 있는 석실로 옮겨 난을 피했다고 할 정도로 사방이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사방이 낭떠러지 절벽으로 이루어진 안렴대 전망대에서는 덕유산 향로봉에서 남덕유산까지 뻗어 있는 덕유산 능선과 함께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보이는 산그리메가 펼쳐지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안렴대에서 적상산의 가을 단풍 풍경을 감상한 후 통신탑 쪽으로 올라가 안국사 이정표 방향 계단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안국사가 나온다. 풍경의 변주에 아랑곳없이 절집은 언제나 절하듯 낮고 정결하다. 저잣거리 홍진(紅塵)은 감히 침범 못 할 산문의 고요, 그 자체로 풍경의 절정이자 묵언의 세상이다.
긴 계단을 올라 누하진입식으로 청하루를 통과하자 제 모습을 드러내는 안국사는 뜻밖에 소박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극락전이 문을 활짝 열고 불자들을 맞고 있다. 극락전에는 보물인 안국사 영산회괘불탱이 있고 절집 계단 아래에는 호국사의 창건 과정을 기록한 호국사비가 있다. 극락전으로 들어서는 문은 부처님을 배알하는 성전이자, 색계와 무색계의 경계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그래서 법당 문에는 아름다운 꽃문양을 새겨 넣는다. 절집 꽃살문은 바로 경전이다. 꽃살문에 새겨진 공화(供華)는 꽃비와 같다. 비바람에 마모돼 어렴풋한 채색만 남긴 채 애틋한 결을 드러내는 나무 조각 위로 햇살이 두근거리며 내린다.
안국사에서 절 입구 쪽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적상산 사고가 있다. 1614년 묘향산에 있던 실록을 적상산 사고로 옮겨왔는데, 일제가 다시 서울의 규장각으로 이전했다. 총 5,515책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빼앗아 가는 바람에 현재 김일성대학에 보관 중이다.
적상산 해발 800m 지대에 있는 산정호수 적상호는 양수발전소에 이용할 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인공 호수다. 적상호 전망대에 오르면 덕유산 정상 향로봉의 주능선과 붉은 치마폭을 펼친 듯한 아름다운 단풍의 풍광을 볼 수 있다.
산문을 내려서니 산 공기가 벌써 소슬하다. 절은 왜 산에 숨는가. 수행이란 죽을힘을 다해 매달려야 하는 절체절명의 고독한 여행이다. 몸둥이가 갈기갈기 찢어지더라도 집착의 화살을 뽑아내지 못하는 한,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것이 선가의 결의다. 그래서 수행승들은 지금도 승냥이 우는 후미진 산방에 홀로 머물러서 도를 구한다. 이렇게 구한 도로 중생을 구한다(상구보리하화중생 上求菩提下化衆生).
요즘 연예인이나 사업가 같다고 비난받는 유명한 스님 한 분이 떠오른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방송 출연도 자주 하는 널리 알려진 스님인데, ‘무소유’가 아닌 ‘풀소유’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켜 논란의 중심에 선 장본인이라 마음 한 구석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우리가 구도자를 존경하는 까닭은 그의 부단한 진리 수행과 검소함, 그리고 중생을 향한 자비심 때문이지 그의 외모나 행색 때문이 아니지 않는가. 색즉시공(色卽是空)이거늘 유한한 물질의 허장성세로 구도자가 과연 무엇을 도모할 수 있을까.
쥐고 있는 것들 다 놔버려라.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