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본 근현대사] 눈물 젖은 두만강

처형당한 독립운동가 아내의 두만강변 탄식

김용호·이시우·김정구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제국주의에 사로잡혀서 총살형을 당한 남편(문창학, 함경도 온성 출신)의 돌무덤 앞에서 탄식의 눈물을 흘린 아내(영주시 풍기읍 박인경 할머니의 시조모, 문창학의 부인)의 한 맺힌 사연이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치하 25년차이던 1935년 두만강 변 사건현장의 애통한 서사. 이 노래는 쓸쓸하고 목이 메기도 하지만, 가련하게 흐르는 가락과 비탄조의 노랫말 속에는 시련과 애환과 압제를 견디어 이겨내려는 필사적이고 결연한 우리 민족 저항의 혼()과 기()와 얼()이 엉기어 있다. 그래서 시대와 세대를 관통하는 100년 애창곡으로 불리어지는 것이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 메인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임 가신 강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눈물진 두만강에 밤새가 울면/ 떠나간 그 님이 보고 싶구나/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가사 전문)

 

 ▶ 김정구 눈물젖은 두만강 1987 - YouTube

1935년 여름, 유랑극단 예원좌(일본제국주의 강점기 19352월 결성된 상업극단)가 두만강유역에 공연을 가서 작곡가 이시우가 여관에서 묵고 있는데, 옆방에서 한 여인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들려와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튿날 이시우는 주인으로부터 그 울음의 사연을 들었다. 그 여인의 남편은 항일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이 두만강을 건너 면회를 왔다. 그러나 남편은 이미 일본경찰에게 총살당하여 돌무더기에 덮인 뒤였다.

 

이 비통한 사연을 적은 서사시가 바로 이 노래이다. 공연에서 돌아와 이 사연은 김용환이 노랫말로 적고(한명천 작사, 시인 김용호 개사) 이시우가 곡을 얽었다. 당시는 가요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검열이 많았다. 1933년부터 시작한 일제의 사전음반검열제도인 <축음기레코드취체규칙>(19336월 조선총독부 발표)이 그 단초다. 따라서 가사를 은유적으로 많이 썼다. 만해의 <님의 침묵>처럼. 이 노래의 님도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은유로 보아도 무방하며, 식민치하에서의 파초와 같은 어려운 삶을 살아 낸 우리 민족을 대변한 것이다.

 

당시 19세였던 김정구는 1916715일 원산에서 출생하여 17살이던 1933년에 가수로 데뷔하여 65년을 민족의 한과 서정을 노래하다가 1998925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하였다. 1935년 발표한 이 노래는 그의 가요인생 65년의 대표 걸작이다. 개신교 집안의 32녀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원산 광명보통학교를 다녔으며, 집안사정으로 점원생활을 하며 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의 학원을 마쳤다. 가수 데뷔곡은 193317세 때 형이 작곡한 <어머님의 품으로>. 이후 오케레코드 전속되어 고복수·이난영·송달협 등과 같이 활동하였으며, 남인수·장세정 등이 함께 입사했다. <눈물 젖은 두만강>, <낙화삼천>, <왕서방 연서>, <바다의 교향시> 등을 유행시켜 인기가수가 된 그는 일본 중국 등으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1945년 태평양가극단의 평양공연 중 해방소식을 듣고 월남한 후 남한에서 활동하였으며, 1985년에는 남북한 고향방문단으로 평양공연에 참가했다. 가수 김정구의 노래가사는 익살과 만요(漫謠)적인 것이 많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늘 민초들의 삶 속에 있으며, 소통하고 공감하는 마력이 있다.

 

1930년대 전후의 우리가요 대표곡 10곡을 들면 이애리수의 <황성옛터>,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고복수의 <타향살이>,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이화자의 <꼴망태 목동>,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 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 등이 될 터이다. 이들 노래는 남녀 간의 사랑노래, 일본제국주의의 공출·징용·징병, 탄압으로 인한 떠돌이 생활과 나라가 있어도 이방인 같은 낯선 삶을 살아야 하던 애환 등의 사연을 함의하고 있다. 이 노래들은 1940년대에 들어와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민족정서를 자극한다는 이유로 금지되기도 하였다. 이때 나타난 노래의 성향과 모양이 바로 가락은 경쾌하면서도 가사는 울적하고 우울한 곡들이 나온다.

 

이시우(본명 이만두, 1913~1975)는 경남 거제 출생이다. 거제문화원 김의부의 연구에 의하면, 1928년 그의 거제초등학교학적부에는 창가에 소질이 있음으로 명기되어 있단다. 이시우는 두만강 여관방에서 옆방 아낙네의 울음을 듣던 날, 고향을 생각하면서 <추억>이라는 곡을 구상하고 있었단다. 그는 2005년 발행된 북한 월간잡지 <천리마5>를 인용, 당시 그 지역의 문학청년 한명천이 원 작사자임을 밝혔다. 여기에 이시우가 곡을 붙여서 악극단 예원좌 화술배우 소녀 장월성이 불러서 방청객들로부터 4회의 재창(再唱)을 요청받았었단다. 한양으로 돌아온 후, 이것을 김용호가 가사를 개사하여 김정구의 목청에 실었다. 이때 대중들의 가슴속은 항일감정(抗日感情)과 정한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처럼 시대이념과 대중들의 감성이 얽힌 이 노래는 김정구 가요인생 65년 대표 걸작이 되었다.

 

2020년 대한민국은 트로트 열풍에 휩싸였다. 종편방송과 공중파 방송의 경쟁적 상업 경쟁을 본다. 재미와 흥미의 기획·연출·공연에 시청자들 철학과 사유가 매몰되고 있다. 민족과 역사의 궤적을 얽은 유행가, 트롯에 대한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까. 이 뜨거운 열풍은 조만간 식상해져서 식을 것임은 활활 타오르는 불을 보듯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포스터 트롯, 그 다음은 어찌할 것인가? 그래서 필자는 <트로트스토리-유행가는 역사다> 유튜브 방송을 개설하여 대중들과 소통하고 있다. 즉흥을 넘은 철학과 사유를 통한, 유행가 트로트의 음유의 장이다. 유행가, 트롯은 그 노래 탄생 시점의 완료된 슬픔이고 승화된 기쁨이다. ~ 우리 민족의 위대한 유산이여. 활초.


 

[유차영]

문화예술교육사

트로트스토리연구원장


전명희 기자


전명희 기자
작성 2020.12.10 10:26 수정 2020.12.10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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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