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초입부터 누워있는 낙엽 하나를 집어 햇살 쪽에 대고 비추어보았다. 계절의 마지막 빛을 보고 떠나가려는지 남루한 차림새로 숨 쉬고 있다. 벌레조차도 관심이 없게 낡아 버리고 거미줄을 몇 가닥 쳐놓은 듯 앙상한 잎새로 햇살도 바람을 따라 무심하게 빠져나간다.
요즘은 계절이 오고 가기 위해 밤새 흐린 날로 머물다 날이 밝아지면서 조금씩 몸을 푸는 모습이 흙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낙엽에게 이부자리를 펼쳐 줄 것 같다. 어린시절 낙엽을 주워 책갈피 속에 넣었던 나의 추억들이 갈피마다 불러낸다. 거미줄처럼 앙상하게 남은 것이 지금의 나이 든 내 모습이다.
자연의 섭리는 내가 낙엽이고 낙엽이 나인 것처럼 따라 하게 한다. 한 나무속 잎의 운명으로 매달려 살면서 어떻게 건강을 유지해 살다가 낙엽의 몸이 되었을까. 전에는 콧등으로 들어 넘기던 건강검진 이야기가 이제 현실로 내 앞에 바짝 다가와 있는 거다. 절대로 나는 그럴 일이 없을 거라던 건강이 나를 포함해 한 명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그 길을 가고 있다.
건강만큼은 자신하면 안 된다는 어르신들 말씀대로 건강검진을 착실하게 받아야 하는 오늘이라는 시간 속 내게 남겨진 전설의 건강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전깃불이 갑자기 나가버리면 촛불도 켜야 하고 전화가 없던 시절에는 의사도 환자가 사는 집을 찾아 진료를 하던 나의 어린 시절이었다.
집안 어른이 편찮으시면 의사에게 달려가 왕진 가방을 든 의사를 모셔왔던 그 옛날 의료생활의 긴 여운이 감사하게 오래오래 남아 있다. 왕진이 끝나면 식구들이 서로 번갈아 얼굴을 쳐다보면서 집안의 우환을 알아차리고 문밖까지 나가 의사를 배웅하던 것이 내 어릴 적 받을 수 있던 의료혜택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혜택을 누릴 수 없어 민간요법에 매달려 살기 일쑤였다. 몸속에 어떤 종양을 갖고 사는가를 무슨 수로 알 수 있단 말인가. 모르는 채 살다가 태엽이 모두 풀린 시계처럼 때가 되면 죽고 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 당시 천수라고 여기던 나이 육십쯤을 지금은 아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거다.
의사로부터 전해 들은 병명은 천기를 누설했다는 말인가. 그래서 약초다린 한약물로 치유하다 낫지 않으면 환자에게 달라붙은 악귀를 떼어내는 굿을 무당에게 의뢰했는가 보다. 벽화에 그려진 고대 이집트의 의술같이 재미있는 변천사 이야기이다.
어느 지인의 아버님은 자식들이 적극적으로 추천해 드리는 건강검진에 대하여 완고하다. "그런 것 받지 않고도 옛날 사람들 무난하게 천수를 누렸다. 아는 게 병이니 모르게 살다가 가는 것이 제일이다”며 통증이 생기면 페니실린이나 다이야찐약으로 달래며 살고 절대로 몸을 열지 말라고 하던 시대 이야기를 하셨단다.
명주 비단결보다 더 고운 몸속을 파헤쳐버리는 일은 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니 꼬치꼬치 캐내어 천기를 엿들으려 하지 말라는 옛이야기다. 입에 산소호흡기를 대는 일도 신을 거역하는 일이니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한다. 아, 그래서 아프면 점쟁이를 찾아가는 사극드라마 속 사람들이 있었는가 보다.
내가 지금 받고 있는 최첨단의 의술이 오기까지는 구시대와 신세대 의술의 변천사처럼 재미있게 들린다. 성인도 시대를 따른다는 말이니 당연한 말처럼 모두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적 의술대로 맞춰 살아온 거다. 내 몸속 섬세한 검진을 위해 에스키모들이 사는 이글루 같은 통속에 누워 mri를 찍는다.
그 옛날 의술을 생각하면서 지금 나는 중동의 재벌 수준의 의료대접을 받고 있다. 지금 내가 지불하는 의료비용을 어린시절에 비하면 천문학적 액수이다. 그 속에 누우면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건강에 대한 불안함이 두렵게 엄습한다. 마음부터 진정하려 하나둘 숫자를 센다. 혹시 기대하지 못했던, 어딘가에 숨겨져 있던 것이 발견되는 게 아닐까.
다시 살아 일어나 씩씩하게 걸어 나갈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은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 잔잔하게 활주로를 미끄러져 가는 느낌으로 이글루 통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까지만이다. 곧바로 고막을 찢고 머리를 징으로 깨부수는 소음에 시달리기 시작하면 어떤 불안함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 순간 징소리는 내 머리 속 묵은 생각들을 깨부숴 버리고 이제까지의 모든 관념들을 바꾸어 버리기에 좋았다.
이처럼 훌륭한 최첨단 물건의 혜택으로 내가 건강을 지켜나갈 수 있는 오늘의 문명 모두에게 감사하기로 했다. 거짓말을 모르는 친구, 내가 완벽하게 의지할 수 있는 현대의학의 의료기기라는 친구가 나에게 있다는 것은 건강을 지키는 최대의 수혜자라고 믿고 싶다. 그런 친구를 무서워도 불안해하지도 말아야 한다.
내 몸속에서 자라고 있을 비밀을 찾아내어 주는 고마운 친구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깨우침은 에스키모의 집 이글루 속에서였다. 이글루는 이제 두려움의 상대가 아닌 나의 마음을 주어도 괜찮을 솔직한 친구이다. 검사를 마치고 나서자 짤막한 가을의 햇살과 눈에 띄는 모든 풍경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이제는 해도 달도 우습게 여기던 나의 오만도 모두 버리고 그들을 반기니 큰 수술을 하는 동안에도 모두가 나를 지켜준 고마운 의술이다.
지금쯤 멀리 떠나갔을 낙엽에도 감사하고 싶다.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잠시 나와 함께했던 낙엽에게 감사하고 싶은 고마운 세상이다. 내가 살아 있을 때 있는 때 늦은 감동이라면 나는 선뜻 이 계절이 전하는 건강검진을 내세울 것 같다.
[문경구]
미주한인크리스찬문학협회공모 수필당선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