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섬’
사람들은 저마다 털어놓지 못하는 마음의 편린(片鱗) 때문에 서로 닿을 수 없는 ‘섬’을 만들고 산다. 거기에 가고 싶어 하면서도 쉽게 가지 못한다. 더구나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져야 할 세모(歲暮)인데도 기세등등한 코로나19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 강도가 더욱 심해져 사람들은 더욱 고독하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자연이 주는 위로에 몸을 맡기기 위해 서울에서 멀지 않은 영종도 삼목항을 찾는다. 갯벌을 품고 있는 아기자기한 서해 포구는 고즈넉하고 정겹기만 하다. 여기서 배를 타면 최상의 언택트(un-tact) 여행지인 서해의 작은 섬 장봉도에 갈 수 있다. 도시에서 한 발 물러서면 만나게 되는 자연의 풍경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코로나19로 인한 답답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다.
인천 옹진군 북도면에 위치한 장봉도는 섬을 이루는 기나긴 산등성이와 해안을 찾는 방문객이 연간 35만 명이나 될 정도로 인기 있는 섬 트레킹의 명소다. 섬 동쪽에서 서쪽까지의 길이는 9km, 남과 북의 폭은 약 1.5km인데, 해발 151m인 국사봉을 중심으로 높고 낮은 여러 산봉우리가 동서로 길게 뻗어 있어 장봉도(長峰島)라고 부른다. 장봉도는 고려 말 몽고군을 피하기 위해 강화도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오면서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장봉도에 있는 3개 선착장 중 섬의 동쪽 끝에 위치한 장봉선착장에서 하선한다. 장봉도의 가장 대표적인 트레킹 코스는 장봉도 주능선코스다. 장봉선착장에서 시작하여 서쪽 끝에 있는 가막머리 전망대까지 이어지는데, 총 거리는 약 13km로 결코 짧지 않은 거리다. 큰 기복 없이 아담한 봉우리들을 넘는 육산 종주 코스인데, 동쪽에서 서쪽까지 코스 전부를 돌기보다는 섬 중앙에서 시작하는 등산객도 적지 않다. 산과 바다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게 장봉도 주능선코스의 가장 큰 매력이다.
오늘은 장봉4리에서 출발하여 해안 둘레길을 따라 섬의 서쪽 끝 가막머리 전망대까지 간 후 주능선을 따라 정상인 국사봉을 지나서 섬의 동쪽 끝 장봉선착장까지 이어지는 장봉도 주능선 종주 코스로 산행한다. 선착장에 대기 중인 공용버스를 탄 후 산행 들머리인 장봉4리에서 하차하면 된다.
장봉4리 정류소 옆으로 난 계간을 오르면서 산행은 시작된다. 소나무 숲과 해안 절벽, 그리고 해안 자갈밭과 모래사장으로 이어지는 해안 둘레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면서 가막머리까지 3km 정도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다. 적막한 바닷가, 갯바람에 파노라마처럼 일렁이는 파도소리를 따라 잘디 잔 미숫가루 같은 모래를 밟는다. 그렇게 걷다보면 마음결도 어느새 푸른 바다에 깊게 젖어든다.
가막머리로 가는 해안 둘레길은 동해안 해파랑길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주민들이 갯티라고 부르는 갯벌과 갯바위가 만나는 모래사장 해안가를 끼고 걸으면서 즐기는 시원한 바다 풍광은 일품이다. 바다가 연출하는 풍경만으로 코로나에 지친 우리들을 치유한다. 이렇게 바닷바람을 맞으며 파도소리에 리듬을 타면서 걷는 재미는 섬 트레킹에서만 만끽할 수 있다.
해안 둘레길에 드문드문 자리 잡은 조망대에서 잠시 걸음을 쉬어도 좋다. 가막머리까지 따라온 동만도와 서만도는 한갓진 서해에 사연 있는 모습을 그려낸다. 이윽고 산행 들머리를 출발한 지 1시간 만에 장봉도 서쪽 끝머리 가막머리 전망대에 도착한다. 숲을 헤치고 모래사장을 지나 다다른 섬의 끝. 생선 비늘처럼 반짝이는 바다를 가르며 유영하는 조각배가 아득히 멀어져간다.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섬, 나를 세상에서 단절시키는 섬. 그 섬에 발을 들여놓을 수만 있다면 사람과 사람은 온전히 만날 수 있을 터인데 사람들은 거기에 가고 싶어 하면서도 쉽게 가지 못한다.
전망대에서 풍광을 감상한 후 동쪽으로 이어지는 유순한 능선 길을 따라 간다. 걸음을 계속하면서 석모도와 강화도의 조망을 즐기다보면 곧 봉화대와 정자가 서있는 작은 봉우리에 도착한다. 주능선 곳곳에는 진달래 군락지가 있어 봄이면 이 길은 꽃길이 된다. 소나무 숲 사이를 비집고 들이치던 한 줄 따사로운 햇살에 도시에서 익숙했던 거리두기 경계심은 이내 무장 해제된다.
봉화대에서 내리막길로 내려서면 장봉3리 가는 도로가 나온다. 도로 건너편의 널찍한 등로를 따라 산으로 올라가면 정자가 나오고, 다시 도로로 내려서 길을 따라가면 국사봉 등산로 입구에 이른다. 완만한 능선 길은 계속 이어지고 대형 물탱크 2개가 설치된 안부를 지나면 숲길로 들어선다. 오름길을 꾸준히 올라서면 정자 앞에 정상 표지목이 서있는 국사봉에 도착한다. 섬 산은 별로 높지 않더라도 바다 위에서 바로 높이가 계산되기 때문에 고도감이 꽤 높게 느껴진다.
국사봉에서 편안한 등로를 이어가면 삼각점이 나오고 이후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구름다리가 놓여있는 말문고개에 이른다. 이곳은 오래 전부터 소를 방목하다가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말을 키웠던 곳이라고 한다. 당시 말문고개에서 응암선착장까지가 말목장이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엄청났으며, 돌을 성처럼 쌓아 만든 마성(馬城)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말문고개에서는 주능선으로 산오름을 계속할 수 있지만 언덕에 무장애 나무데크가 설치되어 있어 바다를 조망하며 걸을 수 있다. 산허리 한 굽이를 넘어서면 시야는 넓게 펼쳐지면서 너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산자락 끝에는 비탈을 일구어 밭농사 짓고 있는 정경이 그리도 안온하게 느껴진다.
무장애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능선으로 올라 정자가 있는 봉을 지나고 도로로 내려선다. 주능선이 바닥으로 내려서는 지점에 있는 혜림원과 장봉4리 마을길을 지나서 도로를 따라가다가 산길로 들어가는 등산로 방향으로 다시 올라간다. 꾸준하게 능선 길을 따라가면 정자가 있는 상산봉에 도착하게 된다. 섬 동쪽 끝에 있는 상산봉 정자에 앉아 한참 조망을 즐긴다. 붉은 태양이 서해 바다로 내려앉을 때까지 저 장중한 자연의 침묵하는 교향악을 숙연히 바라본다.
상산봉에서 내려오면 도로가에 있는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좌측으로 도로를 따라 조금만 가면 작은멀곶이 나온다. 바다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가까워도 먼 곳처럼 쉽게 갈수 없다는 뜻에서 ‘멀곶’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연육교로 연결되어 있다. 작은멀곶에는 쉬어갈 수 있는 정자와 섬 아래로 내려갈 수 있도록 계단이 놓여 있다. 홀로 동떨어져 있어 애잔하게 느껴지지만 정자에 앉아 갯벌에서 조개를 캐는 아낙네와 정박한 어선을 바라보는 운치 또한 남다르다. 하지만 내년 1월말 까지 보수 공사 중이어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바람이 머물다간 자리
작은멀곶 바다는 푸른 머릿결처럼 살랑거리며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처럼 애틋하게 다가온다
바다는 바라만 봐도 마음의 창문이 열리는데
뭍으로 향하는 뱃고동 소리에 열린 창문은 닫히고 만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