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힘들지?”
작은 풀잎처럼 생긴 ○○의 눈은 나의 말 한마디에 가을 단풍처럼 붉어지더니, 곧이어 물방울이 맺히고 고이더니 울음을 타고 흘러내렸다. 왜 우는 지를 묻지 않고 마음으로 눈물을 받아만 줬던 그날을 돌이켜보면, 28년 교직생활에서 했던 상담 중 최고였다.
나는 학년 초에 출석번호 순서대로 학생들과 상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조회시간 내 눈에 들어 온 ○○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의 시선은 ○○의 등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슬픈 낯빛과 표정이 읽혔다. 단순히 힘든 것이 아니라 ‘나 힘들어요.’하는 작은 움직임과 떨림도 있었다. 그런 감정을 느낀 나는 ○○의 상담 순서까지 남은 며칠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나는 ○○의 오른쪽 귀 30cm 남짓한 거리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야! 복도에서 데이트를 하자.”고 했다. 나의 말에 ○○는 고개는 들었지만 나와 마주칠 눈길은 피했다. ○○에게 복도로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눈은 붉어져 있지도 눈물이 맺혀있지도 않았다.
앞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는 복도 창밖을 볼 수 있는 자리에, 나는 벽 쪽에 몸을 반은 감추고 옆으로 서서 ○○에게 “○○야! 힘들지?” 라고 했다. 나의 말은 일상적이지 않았다. 그냥 힘들어보여서, 힘들어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한 말이었을 뿐이다. 그 말이 끝나고 있을 때, ○○는 어깨 쪽 작은 떨림과 함께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남자 담임선생인 나는 상담에서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 여학생의 눈물에 순간 당황스러웠고 놀랐다. 나는 속으로는 왜 그러는데... 하였지만 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를 잠깐 쳐다봤다. 내 눈빛을 본걸까. ○○는 복받치듯 울었다. 그 날은 개학 후 며칠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더욱이 서로에 대해 가릴 것 가릴 정도의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스스로의 감정에 복받치는 울음소리는 호흡하듯 그치지 않았다.
나는 생각할 시간도 없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의 손에 쥐어주었다. 손수건을 받아서는 눈물을 닦았다. ○○의 울음소리는 복도에서 교실 안까지 들릴 정도의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교실에 있던 두 명의 여학생이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앞문을 미간만큼 열고 우리 둘의 상황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나는 여러 면에서 당황했다. 잠시 후 당황함을 멈추고 주변을 살필 때쯤에 지나가던 선생님 한 분과 몇 명의 학생들이 우리들의 상황을 걱정스런 낯빛과 호기심으로 쳐다보는 장면들도 시선에 들어왔다. 나는 주변 장면들에 신경 쓰지 않고 ○○에게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라.”고 했다. 힘들 일이 있거나 울고 싶은 일이 있을 때에는 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때가 그렇다. 나는 경험상으로 그날 그 시간의 ○○가 원하는 그런 때라는 느낌을 받았다.
‘너가 슬프거나 속상한 일이 있나보구나. 왜 무슨 일이 있는 거니?’하고 묻고 싶은 생각을 ○○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냥 울음을 그치고 눈물을 다 쏟을 때까지 옆에서 곁에서 기다려주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무슨 일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든 생각은 내가 알고자 한다고 해서 말해 줄 것 같지도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당시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서럽게 우는 소리와 눈물을 말없이 마음으로 받아주는 것뿐이었다.
○○는 20분 남짓 울었나 보다. 교실에서 복도로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나오기 시작했다. 아침자율학습시간이 다 지난 것이다. ○○는 그때서야 울음을 그쳤고 내게 “고맙습니다. 손수건은 빨아서 들릴게요.”라고 했다. “다 운거니? 정말 다 운거니?” 나의 말에 “다 울었어요. 감사합니다.”했다. 주변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음에도 벽이 갈라진 정도의 거리만큼 둘은 서있었기에 또렷하게 들은 말이었다.
교실에 ○○가 먼저 들어갔고 뒤따라 내가 들어갔다. 교실에는 자리에서 일어난 학생들이 한 명도 없었고 침묵했다. 그런데 분위기를 깨고 한 명의 여학생이 “쌤! ○○를 왜 울리고 그러세요.”라고 했다. 나는 쳐다보지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왜 제 말을 씹냐고요.” 그 여학생은 내가 ○○를 울린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학급 학생들 대부분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나는 다른 학생들이 ○○에게 왜 울었는지에 대해 묻게 되면 난처해질까 봐 걱정이 되어 “내가 말실수를 해서 ○○를 울게 했다.”라고 말하고는 교실을 나갔다. 왜 우는 지를 묻지 않고 마음으로 눈물을 받아만 줬던 그날을 돌이켜보면, 29년 교직생활에서 했던 상담 중 최고였다.
○○는 성격이 예민하고 복잡한 학생이었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 몇 명 외에는 관계를 맺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들이 뭘 물어보더라도 대답을 잘 하지 않는다고 전해 듣기도 했다. 잔지 말이 없고 자주 우울해했을 뿐,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누군가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도 않았다.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공부를 하는 있는 듯 없는 듯한 학생이었다. 쉬는 시간에는 수학문제집을 푸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종례시간에 ○○는 낯빛과 표정이 아침과는 달리 밝아져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상담에서 울기만 했던 ○○가 머리와 생각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나는 학생을 체벌하거나 아프고 슬프고 힘든 학생들과 상담을 한 날에는 거의 대부분 집까지 1시간 30분 남짓 걸리는 거리를 걸어서 퇴근하는 습관이 있었다. 왜, 언제부터 그런 습관이 생겼는지는 나 자신도 기억하지 못한다. 한참을 걷다가 ○○에게 전화를 했다. 통화는 하지 못했다. 걱정하며 걷고 있었는데 잠시 후 문자가 왔다. 학원 수업시간이어서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야! 괜찮은 거지?라는 나의 문자에 ”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라는 답장이 왔다. 그 문자를 받고 마음이 조금은 놓이기는 했지만, 걱정까지 잊히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으로부터 온 문자를 한참을 보다가 또 한참을 망설이다가 ○○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신호음이 끊어지면서 잠시 침묵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 “선생님, 안녕하세요.” 학부모총회 때 오셨던 기억이 없는데, 그날 오신 분들에게만 내 전화를 알려드렸었는데...“아 네, ○○ 어머님이십니까?”, “네, 선생님” 나는 그 순간을 준비 없이 망설이다가 이내 “혹시 따님에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잠시 또 침묵 후에 “왜 무슨 일 있었는지요.”,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제가 놀라고 궁금한 일이 있어서요. 오늘 따님과 상담을 했는데, 힘들어 보이기에 ‘○○야! 힘들지’라고밖에 하지 않았는데, 글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뚝뚝 흘리더라고요.” 조금 긴 침묵 후에 “네 선생님, ○○가 울고 싶은 것을 선생님이 건드린 것 같습니다.” 나는 예상하지 못한 어머니의 답변에 당황했다. 다음 순간에, 그것이 무엇인지 더더욱 궁금해졌다.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인데, 어머니께서도 딸의 마음을 잘 읽고 있다는 생각에 안심은 되었다.
어머니 말씀은 딸이 울고 싶었을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꼭 알고 싶어서 “왜 어머니께서는 그리 생각하시는 지 실례되는 말씀 같지만 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어머니는 잠시 망설이시는 것 같더니 당신도 알고 힘든 일임이 내가 느껴질 정도의 목소리로 “다 저 때문입니다. 제가 엄마답지 못하고, 엄마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딸이 운 것의 원인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말씀을 있기를, 딸은 엄마가 직장을 다니지 않고 맛있는 밥도 해주고, 일상적인 얘기까지도 말벗이 되어 주기를 원했다고 말씀하셨다. 직장을 다니면서 음식도 딸의 마음도 챙겨주지 못한 것에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는 있었다고 하셨다. 그러나 직장을 그만 두고 전업주부로 생활하는 것은 끔찍하게도 싫었다고 하셨다. 집에 있으면 숨이 막히고 우울하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엄마는 자신만을 위해서 살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하셨다. 엄마가 되면 안 되는 사람이 엄마가 되었다고 자책도 하셨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여러 날을 고민한 결과 딸의 소원대로 직장을 그만 두었다고 하셨다.
딸의 소원대로 자기 딴에는 저녁을 맛있게 해서 밥상을 차려주었는데, 그때마다 “엄마 왜 이렇게 맛이 없어. 이걸 먹으라는 거야.”라고 할 때마다 자신의 자존감은 낮아졌고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고 있는 자신에게도 짜증도 났다고 하셨다. 딸에게 맛있는 밥을 챙겨주겠다는 마음으로 요리학원도 다녔다고 하셨다. 그러나 딸의 반응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마다 잘 하는 것이 있는데, 요리는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했다. 맛은 없어도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마음을 인정해주지 않고 화만 내는 딸에게 서운함이 컸다고도 하셨다. 그 때마다 초등학교교사였던 자신의 직업을 그만 둔 것이 후회도 되었고,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회의감에 때문에 부부싸움도 잦아졌고,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고도 하셨다.
초등학교교사를 그만 두고 집에서 살림만 한 지난 몇 개월간은 딸에게 시집살이를 하는 기분이었다고 울먹이며 회상도 하셨다.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 머릿속으로는 엄마와 딸이 티격태격하는 여러 장면들이 떠올려졌다. 그 후에 각자의 방에서 우울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까지. 어머니와의 전화통화의 내용과 목소리와 감정은 고스란히 나의 마음으로 전해졌고 온 몸은 지쳐갔다. 나는 주저앉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정신과의사가 되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나는 어머니와 딸이 참 많이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딸이 아닌 어머니와 상담을 했어도 딸처럼 우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집이라는 공간에서의 심리적 답답함과 노력에 대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안쓰러움과 자책감을 강하게 느껴졌던 날들을 살고 계셨다.
○○가 손수건을 깨끗이 다려서 자기고 온 날은 그 날 이후 사흘만이었다. 손수건을 늦게 갖고 와서 죄송하다고 말하면서 손수건은 자신이 손으로 빨았고, 다림질은 엄마가 했다고 말했다. 그 날 손수건과 함께 샌드위치도 함께였다. “이 샌드위치 네가 사온거니?” “아니요. 엄마가 선생님 갖다드리라면서 주신 거예요.” 시중에서 파는 샌드위치 포장이었지만 가게 이름이나 상표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기도 하지만 엄마가 만들어준 수제샌드위치가 분명했다. 나는 어머니와의 통화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맛이 아니라 정성으로 먹겠다고 생각하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런데 모두 거짓말, 하나 더 있으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맛있었다.
하루는 ○○가 아침자율학습 시간에 교실에서 나가는 내게 또 샌드위치를 주는 것을 받았다. 이번 샌드위치는 예전에 먹었던 것과는 모양과 재료가 달랐다. 엄마음식 중에서 그나마 ○○가 사서 먹는 음식보다 맛있다고 한 유일한 음식이라고 했다. 이 수제샌드위치는 요리학원에서 배운 것도 아닌, 재료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맛있었던 경험을 떠올려보면, 어머니만의 맛인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소풍날에도 또 한 번 어머니께서 ○○에게 보낸 샌드위치를 먹어보는 기쁨을 갖게 되었다. 그날도 모양과 재료가 다른 샌드위치였다.
나는 딸과 엄마를 생각해본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엄마는 딸자식을 둔 엄마라고 하던데... 그러고 보면 엄마와 딸은 나이 들면서 친구처럼 사는 것을 주변에서 흔히 봐왔기도 했다. 어느 가정에서나 엄마와 딸은 하루에 몇 번씩 좋고 싫은 것 사이에서 다툼과 화해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몇 분, 몇 시간 사이에서 항상 있는 일들이라고도 들은 적이 있다. ○○의 얼굴 표정은 어느 날은 밝았고, 어느 날은 어두웠다. 나는 그 표정이 엄마와 딸 사이의 감정표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와 함께 하는 날들이 지나면서 그날 퇴근길에 어머니와 통화했던 내용들을 ○○을 통해서도 전해들을 수 있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내가 통화만으로 듣고, 수제샌드위치 맛으로 만난 어머니는 딸의 엄마가 되는 것보다 제자의 선생님이 되는 것에 보람을 크게 느끼는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제자 ○○는 엄마의 딸로도 친구들의 친구로도 힘든 성격이었다. 둘은 많이 닮기도 했지만, 다른 엄마와 딸! 가끔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한 날들이 있다. 그러나 7년 동안 사용했던 갤럭시S2가 손바닥에서 뜨거워지더니 사망한 사건 이후, 저장돼있던 전화번호가 사라져서 연락할 수도 없게 되었다. 꼭 ○○에게 연락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지만, 사망한 스마트폰의 자료를 복구하기 위해 포렌식업체를 찾아가봤다. 복구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또한 ○○는 학창시절 친구들을 만들지 않았던 터라 누군가에게 물어볼 연락처도 없다. 나는 다만 엄마의 수제샌드위치 맛을 사랑으로 기억하는 딸로 살기를... 누군가는 나처럼 울음이 가득차면 비워주는 사람을 만나기를... 아니지. 울음이 차지 않게 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공부는 잘 했으니 한국사회에 꿈의 열매는 맺었겠지...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를 만나는 날까지 궁금할 뿐이다. 궁금한 시간들은 그 때에서 매일을 살아가면서, 그 날 말없이 받아주기만 했던 눈물이 지금은 내 마음에서 벅차게 빛나고 있다.
[글=이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