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불쾌해진 후배가 요즘 형편은 좋아졌느냐고 묻는다. 순간 술맛이 떨어졌다. 그러잖아도 수입이 없어 마음이 자갈밭이었기 때문이다. 자기는 어제도 인세가 한 다발이나 들어왔다고 자랑을 한다. 와이프 입이 귀에 걸렸다며 염장을 지르는 것이었다.
인세를 받은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나는 시를 쓰는 전업 작가다. 말이 전업 작가지 인세가 들어오지 않으니 백수나 다름없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 통성명을 하게 되면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한다. 어떤 사람은 시인이라는 말에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때는 후회막급이다. 그나마 관심이 있는 사람은 시를 써서 생활이 되느냐고 묻는다. 기회는 이때라는 듯이 요즘 시인들은 옛날하고는 판이하게 다르다고 목에 힘을 주고 말한다. 시인 아무개는 집이 몇 채고 시인 아무개는 외제차를 굴린다고 마치 내 자신인 양 묻지도 않는 말을 한다.
앞에 앉은 후배는 내 형편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나를 빤히 들여다보면서 술을 따른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후배의 술잔을 채워줬다. 후배가 호기 있게 ‘브라보!’ 소리친다. 나는 힘을 주어 후배의 술잔에 내 술잔을 부딪쳤다. 술잔이 출렁하더니 술이 탁자 위로 쏟아졌다. 후배가 옆에 있던 휴지통에서 한 움큼 휴지를 뽑아 흐르는 소주를 닦았다.
나는 후배에게 비자금 많으냐고 물었다. 뜬금없는 내 말에 후배의 눈이 커지더니 웬 비자금이냐고 되묻는다. 비자금은 부패한 정치인들이 챙긴 부정한 돈이나 기업에서 관련자들에게 뇌물을 주기 위해서 만든 검은 돈이지 우리 같은 문인들이 무슨 놈의 비자금이냐며 피씩웃는다.
용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면 아내는 쥐꼬리만 한 월급을 갖다 주면서 돈만 쓴다고 타박하기 일쑤다. 풀죽은 나는 미안하다고 목구멍으로 기어들어 가는 소리를 하며 아내의 눈치를 본다. 제발 아껴 쓰라는 아내의 말에 오금이 저린다. 비자금은 나의 로망이자 남편들의 인생 목표가 되기도 한다. 월급쟁이들이 비자금을 만든다는 것은 손쉬운 일이 아니다. 가욋돈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부정한 거래를 하지 않고서는 비자금을 만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칫 마음을 잘 못 먹으면 뒤탈이 난다. 월급 이외에 만들 수 있는 돈은 특근 수당 정도나 출장비 정도다. 그것도 사정이 나은 직장에서나 가능하다. 형편이 어려운 회사에서는 엄감생신 꿈도 못 꿀 일이다.
‘주머닛돈이 쌈짓돈’이니 ‘살강 밑에서 숟가락 줍기’라는 말이 있다. 부부지간에 네 것 내 것 가릴 것 없는 공동이 돈이라는 뜻이다. 돈 씀씀이에 대하여 시시콜콜 따지는 아내의 바가지 긁는 소리에 질린 남편들이 아내 몰래 통장을 만들어 필요할 때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는 것이 비자금이다.
정보화 시대에 봉급이나 출장비, 특근수당 등 돈이라고 생긴 것은 모두 아내가 관리하는 통장으로 들어간다. 남편들은 쥐꼬리보다 적은 용돈을 타 쓴다. 가정에서의 권력이나 권위는 돈을 쥐고 있는 아내에게 이동했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비자금 마련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나이를 먹어서 아내에게 손을 벌린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물론 아내가 알아서 용돈을 두둑이 준다면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현실은 어디 그런가?
비자금 없는 남자는 머리카락 없는 삼손이라고 한다.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것이 비자금이다. 비자금은 마치 실탄과 같다. 전쟁터에 가지고 나가는 총이 아무리 성능이 좋다 할지라도 실탄이 없으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어떤 남편은 봉투에 비자금을 넣고 겉봉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당신 힘들 때 필요하면 써 ~ 사랑해!’ 그리고는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며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심산궁곡深山窮谷에 숨겨 두었다. 이쯤 되면 비자금관리 9단인 남편이다. 들키면 칭찬은 받아 놓은 밥상이요 안 들키면 안심 푹이다.
남편이 비자금을 갖게 되면 아내들의 신경은 곤두선다. 그것은 비자금 자체가 아니라 비자금을 어디에 쓰느냐는 것이다. 대부분의 아내들은 남편이 비자금을 가지면 십중팔구 옆길로 샌다고 생각한다. 우려가 우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려는 대부분 맞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활을 하다 보면 아내 모르게 돈을 써야하는 경우가 많다. 가끔은 며느리에게 옷 한 벌을 사줘 시아버지 노릇을 해야 하고 사위에게 술값을 주면서 장인의 체통을 세워야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비밀을 만드는데도 돈은 필요하다. 글을 쓰면서 글이 되지 않아 머리가 지끈거려 훌쩍 여행이라고 떠나고 싶을때에도 돈의 힘은 위대하다.
그뿐이 아니다. 돈이 들어갈 곳은 많다. 문인들은 모임이나 연회비는 물론 월회비도 내야 하고 2차가 있는 날을 빠질 수 없다. 호기 한번 부리면 아내가 준 한 달 용돈은 새 발의 피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아내의 생일날에는 케이크는 물론 선물도 사야 하고 결혼기념일에는 꽃다발도 준비해야 한다. 체력단련을 위해서 헬스장에 등록하는데도 돈은 필요하다. 애경사가 생기면 거기에도 찾아가야 한다. 멀리 사는 친구가 생각지 않게 찾아오면 술값에 여관비가 장난이 아니다. 이런 때야말로 비자금의 진가가 드러난다. 남자는 지갑이 비면 어깨가 처진다. 남편들이 아내 몰래 조성한 비자금은 정치권이나 재벌들이 목적을 위하여 불법 조성한 구린내 나는 돈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품위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남편 자존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들의 비자금은 몸의 뼈와 살과 피와 같다.
그렇다면 남편들은 비자금을 어디에 숨겨놓고 어떻게 관리할까? 예전에는 회사 서랍이나 책 사이 또는 앨범 같은 손길이 잘 안 가는 곳에 현금으로 보관하는 아날로그 방법을 썼다. 아내의 눈을 피해 곳곳에 감춰 놓다 보면 어디에 놔뒀는지 모르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남편들의 비자금 통장으로 불리는 ‘스텔스 통장’이 나왔다. 스텔스 통장은 적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는 최신 전투기인 스텔스기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은행들은 ‘시크릿 통장’ 또는 ‘보안 계좌’ 등으로 부른다.
이른바 '스텔스 통장'으로 알려진 비밀계좌는 인터넷이나 모바일 뱅킹으로도 전혀 조회가 되지 않는다. 보통 공인 인증서와 휴대폰 인증만 있으면 계좌 통합 관리 서비스를 통해서 모든 계좌 잔액과 거래 내역이 뜨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이 통장은 인터넷 또는 모바일 뱅킹에서 로그인을 하더라도 조회가 되지 않는다. 본인이 직접 은행 창구를 찾아가야만 거래가 되는 멍청이란 뜻의 '멍텅구리' 통장으로도 불린다. 비자금 관리 주역으로 떠오른 '멍텅구리' 통장인 ‘스텔스 통장’ 계좌는 본인 외에는 아무도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하니 그야말로 땅속의 금고인 셈이다. ‘스텔스 통장’을 사용하는 남편들은 월급이나 보너스가 지급될 때 이 계좌로 지급받아 금액의 일정 부분을 떼고 나머지를 매월 지급되는 급여 통장으로 이체하는 방법으로 비상금을 모은다고 한다.
‘스텔스 통장’은 비밀번호는 물론 공인인증서까지 가지고 있는 아내에게도 계좌 개설 사실을 감출 수 있다. ATM 인출도 제한되는 ‘스텔스 통장’을 개설할 때는 인터넷 조회가 안 되도록 해달라고 부탁하고 서류만 작성하고 만들 수 있다니 세상의 남편들이 아내 몰래 비자금을 조성해도 된다는 정부의 보증서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계좌가 있다는 것을 은행들이 홍보를 하지 않지만 알만한 남편들은 다 알고 있다고 하니 모르는 남편들만 불쌍하다.
내가 퇴임하기 십여 년 전쯤이다. 선배 하나가 비자금을 얼마나 있느냐? 비자금을 모으고 있느냐? 고 묻는 것이었다. 무슨 비자금을 조성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퇴임을 하면 그동안 고생이 많았노라고 아내는 칭찬을 할 것이고 이제는 좀 편히 쉬라고 위로의 말을 할 것이다. 말할 것 없이 손만 벌리면 용돈도 두둑이 줄 것이라고 대답했다. 선배는 ‘흐흥!’ 웃음인지 울음인지 감 잡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 사람아 그건 어디까지나 자네 생각일세. 그 꿈 깨! 꿈 깨라고…’ 선배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다. 선배는 아내라는 말은 ‘안에 뜬 해’다. 그렇기 때문에 집 안의 해는 하늘의 태양과 동격이라며 감히 태양과 맞장을 뛸 수 있는 남편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신상에 좋다는 조언까지 해 주는 것이었다.
선배의 말은 이어졌다. 자네 퇴임이 십여 년 남지 않았느냐며 아직은 늦지 않았으니 지금부터라고 비자금을 마련하면 퇴임 후 인생이 빛날 것이라고 한다. 지나고 보니 선배의 말은 그야말로 공자님 말씀 가운데 토막보다 훌륭했다. 지금 나는 선배가 내게 했던 말을 후배에게 한다. 선배가 해 준 말을 흘려들었던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앞에 앉은 후배가 새겨듣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마치 유언 같은 말을 했다. ‘어이 후배! 살아가는데 있어서 돈은 인격이야! 배운 것이 많다고 인격이 고매한 것이 아니지, 요즘 세상은 돈 잘 쓰는 사람이 어른이라는 것도 모르나?’ 침을 튀겨가며 말하는 나를 후배는 벌레 씹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불안한 미래와 사고에 대비해서 비자금은 필요하다 비자금은 자신뿐 아니라 집안의 큰일을 해결할 때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나만의 상비약이다. 비자금은 조성 목적에 따라 사용하기에 따라 부정적일 수도 있고 긍정적일 수도 있다. 세상 남자들의 비자금이야말로 검은돈으로 치부해서도, 뇌물이 될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 비자금은 삶의 윤활유가 되고 믿을 수 있는 빽이 되기도 한다. 요즘은 재벌이 꼬불쳐 둔 수 조원이 부럽지 않은 나만의 비자금을 가지고 있는 남편들이 솔찬히 많다고 한다. 비자금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사는 남편들을 나는 경배한다.
후배의 얼굴에 대고 한마디 했다. ‘사랑하는 후배! 2차는 노래방이다. 내가 한잔 사마. 비자금이 아닌 비상금으로 쏜다’ 후배가 놀랐다는 듯이 ‘진짜요?’ ‘그래 난 소금이 아니야! 인마’ 후배와 나는 어깨를 걸고 바자금은 남자의 힘이라고 외치면서 노래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글 =정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