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북설악에 올라 백두대간 남녘의 끝자락을 잡다

여계봉


밤새 살포시 내린 눈으로 온 천지가 새하얀 눈 세상이 되었다. 눈이 오면 항상 즐겁지만 이렇게 펑펑 함박눈이 쏟아진 것은 올해 들어 처음인지라 새벽부터 마음이 더 설렌다.

 

이제는 자연을 찾아 산에 가는 것도 부담을 느끼는 세상이 되었다. 안내 산악회의 산행 버스는 운행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그렇다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산을 찾기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래서 원거리에 있는 산을 찾을 때는 만부득이 자가운전을 해서 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예전의 소소한 일상들을 간절한 소망으로 만들어버린 코로나 시대는 언제 종언(終焉)을 고할 것인가.

 

오늘은 남녘의 마지막 백두대간에 있는 진부령(陣富領)을 향해 달려간다. 남한 쪽 백두대간의 끝, 그리움 따스하게 품은 땅 진부령은 높이가 529m로 백두대간 고개 가운데 낮은 편인데, 과거 영동의 해산물과 영서의 곡물이 올라와 아침부터 장이 선다고 하여 조쟁이라고도 불렸다.


금강산이 시작되는 북설악. 첩첩 산그리메는 겨울이 그려낸 흑과 백의 수채화다.


진부령 오지마을 흘리는 하얀 눈을 뒤집어 쓴 채 삼매(三昧)의 경지에 들어. 흘리의 흘()산우뚝할 흘()’자를 쓰는데, 흘리는 높은 산에 둘러싸인 마을이라는 뜻이다. 오늘은 흘리에서 출발하여 북설악의 마산봉(1,052m)에 오른 후 885, 750, 죽변봉을 거쳐 학야리로 내려서는 20km가 넘는 만만치 않는 산행이다. 일명 땅통종주길이라고 불리는데, 길은 거칠지만 북설악의 내밀하고 신비로운 속살을 경험할 수 있는 코스여서 원시의 자연을 즐기려는 산꾼들이 간간히 찾는 곳이다.


강원도 인제와 간성을 잇는 진부령. 백두대간 남녘의 끝자락이다.


산 들머리인 알프스 리조트는 텅 빈 황야에 외로이 서 있는 거대한 공룡 모습으로 다가와 설원의 황량함만 더한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운영되어 온 국내 최초 스키장인 알프스 스키장은 천혜의 산세로 바다와 금강산도 관조할 수 있고, 적설량도 많아 스키장으로 유명세를 떨쳤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영업이 중지되어 인적이 끓어진 지 이미 오래다.


음산한 알프스 리조트. 최근 생존 프로젝트 방송의 촬영지가 되면서 다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리조트 건물을 지나 숲으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날씨는 맑고 포근하며 바람도 잠잠해서 눈꽃 산행을 기대하며 산 오름을 시작한다. 스키장 곤돌라 시설 아래로 난 등로를 따라가면 마산봉을 향하는 이정표가 나오고 이어서 눈 덮인 순백의 겨울 산으로 들어간다. 머리 위로 스키장의 리프트 케이블이 지나가고 잎이 앙상한 신갈나무 사이로 유난히 파란 겨울 하늘이 빛나고 있다. 전망 터진 곳에서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리조트와 그 뒤로 칠절봉이 보인다. 백두대간은 이곳 진부령에서 고도가 한껏 높아지면서 1,090m봉을 지나 군사통제지역인 해발 1,172.2m의 칠절봉(七節峰)에 닿는다. 마루금은 이곳에서 방향을 90도로 꺾어 북쪽으로 향한다. 일곱 마디봉으로도 불리는 칠절봉은 금강산 12천봉 중 남한 쪽에 있는 다섯 봉우리 중 하나인데, 나머지 네 봉우리가 향로봉, 둥글봉, 상봉, 신선봉이다.

 

본격적으로 산길에 접어들어 눈밭 위를 걷는다. 아무 거침이 없는 숲, 바위도 잔 나무도 풀숲도 모두 눈에 덮여 한결같다. 휑한 숲에서는 가는 곳이 곧 길이 된다. 눈 위의 발자국 소리는 쥐죽은 듯 웅크려있는 겨울 산을 깨어나게 하는 소리다. 이럴 때 자기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것이야말로 겨울 산이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겨울 산행은 자기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처럼 자신이 행한 일상의 행보를 뒤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겨울 산의 가장 큰 매력은 공허한 숲의 적막이다.


전망이 트인 곳에 서니 매봉산(1,271m)과 향로봉을 잇는 대간 능선이 보인다. 진부령에서 숨을 고른 백두대간 분수령이 칠절봉을 세우고 북으로 방향을 틀어 향로봉(1,296m)를 향해 내달리는 힘찬 몸짓이 눈에 가득하다. 그러나 분단이라는 현실을 떠올리면 그 연봉의 장쾌함은 환희의 송가(頌歌)가 아니라 이산의 비가(悲歌)로 들려온다. 왼쪽의 철절봉에서 둥글봉(1,312m)까지는 완만한 산세를 하고 있어 별다른 기복 없이 이어진다. 마루금은 둥글봉에서 1,310m봉을 거쳐 1,270m봉으로 연결된다. 1,270m봉은 향로봉의 한 봉우리로 1,296m의 향로봉 정상에서 600m 정도 못 미친 곳이다. 여기서 백두대간 마루금은 향로봉 정상을 거치지 않고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고성재로 이어진다. 백두대간의 남녘 종착지인 향로봉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능선은 건봉사가 있는 건봉산 산줄기다. 건봉사는 한때 설악산의 신흥사, 백담사, 양양의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렸을 정도의 대찰이었다고 전해진다.


칠절봉과 향로봉을 거쳐 고성재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루금에 온몸이 전율한다.


산행을 시작한 지 1시간 지나 해발 800m 지점에 도착하여 고개를 들어보니 마산봉이 보인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날씨는 맑고 포근하며 바람도 잠잠하여 겨울산행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좋은 날씨였다. 그러나 산정에 가까워질수록 날씨는 급변하여 산객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이정표는 폭설에 잠겨 상단 부분만 고개를 내밀고 있고, 눈에 파묻힌 등로는 사라져 러셀(russell)한 발자국만 따라서 올라야한다. 이제는 바람까지 가세하여 눈보라가 춤을 추니 사위는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8부 능선부터 등로가 눈에 파묻혀 러셀하면서 뚫고 나간다.

 

산행 시작 1시간 반 만에 산세가 말을 닮았다하여 이름 붙여진 마산봉(馬山峰, 1,052m)에 도착한다. 산정에 몰아치는 강풍으로 비산한 눈가루 때문에 시야가 가려 조망은 거의 불가능하다. 날씨가 좋은 날 이곳에 서면 북쪽으로 비로봉을 비롯한 금강산 연봉까지 어슴푸레 보이고, 동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동해바다와 신평벌, 송지호와 영랑호가 조망되며, 가까이로는 향로봉과 신선봉, 설악산 황철봉, 울산바위까지도 볼 수 있다. 마산봉은 금강산 끝에 닿아 있는 봉우리이자 산행이 허가된 백두대간 남한 구간의 마지막 봉우리다. 이 산줄기를 붙들고 산 흐르는 데로 따라가면 바로 금강산이다. 마산봉의 정상에는 이 봉우리가 금강산 끝줄기라는 것을 말해주려는 듯 작은 금강산 모양의 뽀족한 바위가 솟아 있고, 그 아래에 몇 년 전 세운 정상석이 서 있다. 남쪽의 북설악 산줄기를 따라 걸어가면 북쪽의 금강산 줄기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묘한 흥분을 느끼며 산 오름을 계속한다  

 

북설악의 마산봉(馬山峰). 금강산 일만이천봉 중 제2봉이다.
정상에서 줌으로 당겨 본 향로봉. 저 너머에 금강산 비로봉이 있다.

진부령에서 미시령까지 이어진 마루금은 백두대간 남녘 구간의 끝이다. 인제의 원통에서 용대리-작은새이령(소간령)-마장터-큰새이령(대간령)을 넘어 고성군으로 이어지는 대간령 고갯길은 옛날에는 진부령, 미시령과 함께 영동과 영서를 잇는 중요한 고갯길이었다. 새이령이란 지명은 미시령과 진부령 사이에 있는 고개라는 뜻이리라. 가야 할 죽변봉 방향으로 855봉과 750봉이 큰 벽처럼 다가온다. 마산봉에서 병풍바위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대간령, 신선봉, 상봉으로 거쳐 미시령으로 이어지는 대간길인데 현재 신선봉-미시령 구간은 입산 통제 중이다. 그래서 산꾼들은 마산봉에 오른 후 대간령에서 소간령을 거쳐 용대리 방향으로 하산하는 등로를 주로 이용한다.


넘어야 할 855봉과 750봉. 그 너머로 죽변봉 가는 능선이 이어진다.


겨울 산 능선 위로 들리는 무서운 바람소리에 산객은 잠시 주저한다. 하기야 적막한 겨울 산에 바람마저 없다면 얼마나 외로울까. 겨울바람은 방랑자다. 바람이 전해주는 남쪽과 북쪽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새 885봉에 도착한다. 죽변봉과 고성 앞바다가 흐릿하게 보이고, 강풍으로 몸을 지탱하기 힘들 정도다. 능선에 부는 마른 바람에 나뭇가지에 쌓인 눈들은 보석가루처럼 빛나며 흩어진다. 885봉에서 750봉 가는 등로는 거칠고 흐릿하여 가지에 달린 리본과 돌에 그려진 황색 화살표에 의존하여 산행을 계속한다. 잡목이 많아 잔가지를 헤치고 가면 바람 따라 우우 울어대며 전율하는 산죽 숲을 만난다.


885봉에서 바라본 죽변봉과 고성 앞바다. 가야할 길이 아득하다.


이윽고 750봉에 올라 지나온 길을 뒤돌아본다. 제일 뒤가 마산봉, 그 앞이 885봉이며 왼쪽으로 움푹 파인 고개가 대간령이고 마루금은 신선봉으로 이어진다. 송림사이로 고개를 내민 신선봉은 상봉을 거쳐 미시령으로 이어지고 내설악의 황철봉으로 연결된다. 등로 오른쪽으로 설악산 화채봉이 희미하게 보인다. 죽변봉 가는 등로는 편안한 능선 길을 유지하다가 약 200m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급경사 내리막길로 이어지고 마지막 봉우리 죽변봉은 아직도 먼발치에 있다. 수십 개 봉우리를 지나온 거칠었던 산세는 죽변봉에서 고개를 숙인 후 운봉산을 지나 마침내 고성군 토성 앞바다에 몸을 담근다. 동해 바다에 인접한 운봉산(285m)은 높지는 않지만 설악산과 동해의 조망이 뛰어나고 일출 명소여서 백패커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지나온 산그리메. 제일 뒤쪽이 마산봉, 그 앞이 885봉, 왼쪽 푹 파인 고개가 대간령이다.


강풍에도 여의치 않고 당당히 버티고 선 능선의 소나무를 따라 간다. 차디찬 바람 속에 버티고 선 소나무들은 아수라처럼 달려드는 바람의 울음소리에도 주눅 들지 않는다. 잠시 바람이 멎어도 소나무들은 눕지 않는다. 겨울 산의 능선에 서 있는 소나무들의 잔인한 버팀을 보면서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드디어 죽변봉에 도착한다. 오늘 마지막으로 오른 8번째 봉우리다. 신선봉에 올라 북쪽을 보면 멋드러진 산줄기가 나오는데 그 끝에 있는 예쁜 봉우리가 바로 죽변봉이다. 산정에 부는 초강풍은 산객을 날려 보내 산자락의 송지호에 빠뜨릴 것 같은 공포심에 젖게 한다. 돌아보니 지나온 검은 산이 흰 산 뒤에 숨어있다. 바라보는 산하는 흑과 백의 무채색 풍경화다. 겨울은 허허롭고 여백이 있어서 아름다운데 내 안의 빈자리에는 무엇이 차 있는가. 이제 녹녹해진 걸음들을 재촉해야 한다. 겨울 산에서 오후 일찍 사그라지는 햇살이 자꾸만 야속하기만 하다.


천신만고 끝에 오른 죽변봉(680m). 산정에 있는 동안 바람과 하나 된다.



죽변봉에서 학야리로 내려서는 산길에는 산그늘이 접혀 흐릿하고 잡목이 많아 가지에 매달린 산악회 리본에 의지하면서 내려온다. 숲에 부는 겨울바람도 거침이 없다. 미미한 바람이라도 텅 빈 숲속을 통과하면서 휘익휘익 울린다. 겨우 데워 놓았던 겨울 숲의 온기를 밀어내는 것도 바람이다. 바람에 이는 억새풀들의 우는 소리도 들린다. 지나간 모든 것들과 기꺼이 작별하라고 그 야위고 시린 손을 흔든다. 가도 가도 제 자리인 숲길을 벗어나니 해 질 무렵에야 학야리 마을 삼거리에 도착한다.

 

가파른 산봉우리와 무릎까지 쌓인 눈길을 8시간 넘게 오르내리다 보니 배낭 맨 어깨는 축 처지고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다. 그러나 학야리 삼거리에 뜬 초승달과 저 멀리 알 수 없는 별들로부터 뻗어오는 끓어질 듯 가련한 빛줄기는 산행에 지친 마음을 밝혀주고 밤의 산이 주는 고독과 적막감을 달래준다. 그래서 몸이 고단하면 영혼은 맑아진다고 했던가.

 

밤의 산이 떠나는 내게 속삭인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게 들어가는 것이야.”

 

먼 데서 바람이 불어와 내게 묻는다.

그대, 겨울 산에 다시 오르겠는가?”

 

무채색 북설악은 살아있었다.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1.01.18 11:11 수정 2021.01.18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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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