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찬의 두루두루 조선 후기사]
제36화 첩자
한국인은 첩보에 약하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일본인은 해외에 나가면 유학생이든 상사원이든 모두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국익을 위해 정보를 염탐해 일본 정부에 알린다고 합니다. 한국인은 정말 첩보에 약할까요? 거짓말을 하거나 남의 비밀을 캐는 행위를 비열한 짓으로 여기는 국민정서상 한국인은 아직도 첩자로서는 부족한 점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수십 배 월등한 전력의 수, 당나라와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유능한 첩보활동 덕분이었습니다. 신라의 김유신이나 김춘추도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장수이기보다는 머리를 써서 적의 약점을 알아내고 각종 술수로 교란하는 첩보전에 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려 때에는 문익점이 목화씨 세 알을 붓대에 숨겨 가져와 산업스파이 노릇도 했고 최무선은 원나라 기술자들에게 돈을 주어 화약제조법을 배워 화포 같은 화약 무기를 만들어 침범한 왜구들을 몰살했던 것입니다. 조선조에도 세종 임금이 첩자를 잘 활용해 여진족의 침범을 막았고 장영실로 하여금 선진국 명나라의 기술제조법을 배워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23전 전승의 이순신 장군도 전투에 나가기 전에 여러 번의 정찰과 첩보 활동을 통해 일본 수군의 허실을 파악하고 난 뒤에야 전투에 나섰습니다.
손자는 일찍이 손자병법 용간(用間)편에서 간첩은 천금이 아깝지 않은 군주의 보배라고 했습니다. 그는 간첩의 종류를 향간, 내간, 반간, 사간, 생간의 다섯 가지로 분류했는데 향간은 적의 주민을 활용하는 것이고 내간은 적의 관리를 포섭하는 것이고 반간은 적의 간첩을 이쪽 편으로 만들어 적정을 탐색하는 것이고 사간은 우리 첩자에게 가짜 정보를 주고 붙잡히게 해서 적의 판단을 그릇 치게 하는 것이고 생간은 적정을 탐지 후에 살아 돌아와 보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생간 같은 척후를 즐겨 택했다고 합니다.
조선 조 초기에는 고려의 도평의사사를 계승해 기밀업무를 보다가 중종 때 삼포왜란을 겪은 후에 만든 비변사를 만들어 방첩과 첩보활동을 강화했습니다. 이곳에서 비밀차지낭청(秘密次知郎廳) 일명 비변랑이라는 벼슬아치 12명이 전담했습니다. 이들은 이웃한 여진족과 일본, 명나라의 정보를 수집했는데 특히 중국의 변화와 움직임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역관도 첩보원 역할을 했는데 왜역은 왜관을 통해, 한역은 사신을 따라가서 각종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러면 명나라에서는 금의위라는 황제 측근의 조직에서 사신이나 역관의 움직임을 파악했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신이 오면 감시했습니다. 첩보과정에서 허위정보도 많았는데 의도적으로 엉터리 정보를 흘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임진왜란 전에 일본은 승려나 떠돌이 화공 등을 간첩으로 보내 염탐하는 한편 유구(오키나와)를 통해 일본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조선이 길 안내를 하기로 했다는 등 허위정보를 알려 명과 조선을 이간시켰습니다. 전쟁 중에도 일본은 조선인을 매수해서 정보를 입수해서 타격을 입히는 등 첩자활용을 잘했습니다. 붙잡힌 명군을 회유해서 조선으로 돌려보내 정보수집, 무기고 방화 등을 시켰으며 울산성 전투에는 우리 군이 가토 기요마사 군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조선인 수천 명으로 하여금 왜군으로 변장시켜 구원병으로 속여 아군이 철수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병자호란 때에는 후금이 상인들을 통해 정보를 입수하고 간첩을 보내 조선 사정을 파악 후에 공격해 왔고 효종 때는 북벌을 하려는 계획을 입수해 조정을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조정에서도 정보가 누설되는 것을 걱정하고 수상한 거동을 하는 자를 심문하고 중요한 곳은 계속 순찰하며 적의 간첩을 잡으면 크게 포상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방첩에 소홀했고 외국에 간첩을 보내 탐지하는 것에 소극적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간첩은 군주의 보배가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간첩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외국과의 관계를 최소화하고 우리끼리 사는 것을 좋은 방책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