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참 좋은 가을날 아 침, 경기 파주시 동패동 심학산 자 락‘어린농부학교’텃밭으로 7~10살 아이들 열두 명이 모여들었다. 조선 일보 교육신문과 주니어기자단의 두 번째 만남, 어린 농부 1일 체험을 위 해서다. 햇빛과 바람, 새소리 엮여 고요하던 텃밭이 아이들 맑은 웃음 으로 환해졌다.
오늘은 11월 김장 잔치를 위해 갓씨 앗을 뿌리고 쪽파 종구를 심는 날이다. 모자 눌러쓴 고사리 손에 맞춤 호미가 쥐어졌다. 무게는 가볍고 날은 무디게 만든 어린 농부들을 위한 호미다.
“이랑에는 채소들도 살지만 수많 은 미생물이 식구처럼 살아요. 우리는 밭에서 다니는 길, 도랑으로만 걷도록 해요.” 우와~우다다다다당! 한달음에 밭으로 달려가는 아이들, 텃밭의 기 운을 온몸으로 삼킬 기세다. “선생님, 이게 쪽파 씨예요?” 이현서(통일초등학교 3)기자는 씨 앗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말라 보이는 쪽파 종구가 성에 차지 않는지 질문이 쏟아진다.“이렇게 말라도 쪽파가 되요?” “11월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다자랄 수 있을까요?” 김단아(한산초등학교 2), 김도균(덕 이초등학교 2)
기자도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다. 쪽파 종구를 심고 갓씨앗 을 손에 나누어 쥐니 그제야 수긍하 는 눈치. 모든 채소를 씨로 뿌려 거두 지 않는다는, 작은 이치 하나를 얻었 다. 새 생명 품은 이랑에 촉촉이 물주 고 나니, 이제 밭에서 선물을 가져가란다. 도돌도돌 신기하게 옷 입은 여주 를 보고, 땅 맛을 알아 빨갛게 익은 고 추도 따고, 막 캐어 낸 당근도 만나니, 이거 마트 구경보다 재미지다. 아빠 팔 뚝만한 동아박 앞에서는 너나없이 휘 둥그래졌다. 지렁이, 풍뎅이, 잠자리같은 텃밭 이웃들을 쫓던 한준우(7세. 국제어린이집) 기자도 시선이 멈췄다. “버들주머니에서 씨앗이 떨어졌 는지, 심은 적이 없는데 저 혼자 꽃이 피고 이렇게 커다란 열매가 열렸어요. 신기하지요?”커다란 동아박 따고 싶은 마음을 참고, 아이들은 꼭 필요한 만큼 다양 한 채소를 개인 바구니에 담았다. 밭 이랑에서 한바탕 흙장난 치고 돌아온 아이들의 모습에 활기가 넘쳤다.
사람이 자라며 세상을 배우는 것을 공부라 한 다. 농사를 짓고 살았던 사람들은 모든 공부를 자 연으로부터 배웠다. 몸과 마음에 익힌 공부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관계의 단절, 마음의 병, 사회에 드러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많잖아요. 저희는 아이들이 흙과 자 연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이들 에게 자연을 돌려주어 더불어 사는 이치를 깨닫게 해주자, 의견을 모은 거지요.” 파주 어린농부학교 박명신(51세. 대표강사) 씨는 ‘씨앗도 즐겁게 뿌리면 놀이’ 라고 강조한다.배움은 무엇보다 관계다. 인간과 인간 사이, 인 간과 자연 사이도 서로 이해하고 배워야 깊어진다.생명을 돌보고 키우는 농사, 사람을 사람으로 성장 시키는 교육, 그래서 교육은 농사와 같다.“유기농 텃밭을 가꾸는데 최소한 3년 이상의 시 간이 걸립니다. 하물며 사람인데요. 저희는 연간 단위로 교육하지만 더 멀리, 길게 바라봅니다. 이 곳에서의 체험이 훗날 마음을 단련시켜 준다고 믿 기 때문이에요. 자연을 벗이라 생각할 수 있다면 누구 위에 군림하는 사람은 되지 않으니까요.” 헤르만 헤세는 <정원 일의 즐거움>에서 풀 한 포 기, 나무 한 그루가 이루어 낸 세상이 한 나라와 같 다고 했다.‘아주 이따금,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어느 순 간, 땅 위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유독 우리 인간 만이 이 같은 사물의 순환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사물의 불멸성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 번뿐인 인생 인양 자기만의 것, 별나고 특별한 것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세상을 이해하는 근육을 키우려면 하찮은 풀꽃 하나, 나무 한 그루를 자세히 보는 공부가 지금 필 요하다. 씨를 뿌리고 키우고 거두는 텃밭 생명들은 아이들도 나무처럼 자라게 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자라는가
어린농부학교는 온종일 즐거운 학교다. 텃밭을 가꾼 아이들이 숲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앞으로 나 란히 줄을 선 아이들이 눈을 감는다. “5초만 눈을 감아봅시다. 어떤 느낌이 드는지 세가지만 말해볼까요?” 바람소리요, 나뭇잎이 살랑 대요, 고요해요, 시원해요, 풀 소리와 바람소리가 섞여 있어요.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숲속은 이내 경쾌해졌다. “숲, 숲, 숲 대문을 열어라….” 숲 대문 놀이가 시작되자 텃밭에서는 새초롬하 던 김민선, 김민경(안곡초등학교 2) 쌍둥이 기자들 의 얼굴도 꽃처럼 활짝 피었다. 낯가림 하던 최지혜 (7세. 누리어린이집) 기자도 언제랄 것 없이 앞 친구 허리춤을 부여잡는다.
해먹에 들어가 꼬치 흉내도 내어본다. 흔들거 리는 줄사다리도 오늘은 왠지 무섭지 않다. “다람쥐가 좋아하는 도토리가 장난감이 됐어요.우와~ 진짜 잘 돌아가요!”이재원(통일초등학교 1) 기자는 빙글빙글 춤을추는 도토리 팽이에 흠뻑 빠졌다. 한편에서는 생태미술 놀이가 한창이다. 자연 은 세상에서 가장 큰 그림책, 자연물은 그 자체 로 최고의 미술 도구다. 아이들이 곱게 따온 꽃 과 잎을 종이에 붙이니 더 없이 훌륭한 작품이 완성.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감동을 표현하고, 더 오래 간직하고 싶은 아이들에게 멋 진 선물이 됐다. 햇살이 찾아든 숲은 아름답다. 천천히, 아주 천 천히 잎이 햇살 속으로 반짝이며 진다. 하늘을 지 붕 삼고 바람을 벗 삼아 신명 떨친 하루, 아이들은 즐겁게 웃고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