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진 넝쿨이 돌 비탈을 덮어 산사 가는 길 찾기 어려워라
산등성 그늘에는 겨울 눈 남았으나 모래톱 밝은 곳엔 아침 안개 흩어지고
샘물은 움푹한 구멍에서 솟아나며 종소리는 깊은 숲에서 울려 퍼진다
유람의 걸음을 두루 옮기리니 그윽한 곳 놀이의 기약을 어이 그르치랴
‘유수종사(游水鐘寺)’는 1775년 초봄, 운길산 아래 남양주 조안면 송촌리에 살던 정약용이 14세 때 수종사에 들러 지은 시다.
산수가 수려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가벼운 주말 산행지로 널리 알려진 운길산(610m)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兩水里) 북서쪽 지점에 있다. 산행 시간은 왕복 4시간 정도여서 누구나 무난하게 산행을 즐길 수 있고, 주위에 다산마을, 팔당호, 서울종합영화촬영소, 금남유원지 등의 관광지가 있으며, 산중턱에 수종사가 있어 볼거리도 많은 편이다. 특히 수종사에서 바라보는 팔당호의 모습은 세조 때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이 ‘동방 사찰 중 제일의 전망’이라고 격찬했을 정도이다.
산행은 주로 경의중앙선 운길산역 근처의 진중리에서 시작한다. 겨울 산에 들어서니 벌거벗은 낙엽송과 앙상한 나뭇가지, 등로에 쌓인 낙엽들로 스산함을 더한다. 급한 비탈을 치고 오르다가 계곡이 끝나는 곳에서 만난 암릉에 올라 잠시 숨을 고른다. 좌에서 우로 양수대교, 두물머리, 검단산, 한강, 예빈산과 예봉산으로 이어지는 파노라마가 눈앞에 펼쳐지고, 미세먼지 없는 맑은 하늘 아래 마루금으로 부는 바람조차 봄바람처럼 포근하다.
계곡 숲길 대신 수종사까지 이어진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면 수종사 주차장과 일주문이 나오는데, 불이문 위에 있는 급경사의 나무계단을 따라 꾸준히 오르면 작은 암릉들이 나오고 이어서 운길산 정상에 도착한다. 널찍한 나무데크가 설치된 정상은 조망이 뛰어나는데 서쪽으로 예빈산, 예봉산과 적갑산이, 남으로는 검단산과 양수리 일대의 한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내려와 수종사에 들어서니 대웅전 앞 뜨락은 비어 있지만 잔잔한 바람소리, 풍경소리, 새소리, 스님의 독경 소리, 들리는 모든 것들이 그저 조용조용 흐르듯이 산사는 아늑하고 향기롭다. 바로 텅 빈 충만이다.
절 이름에는 전설 하나가 전해온다. 세조가 오대산에 다녀오면서 운길산 자락을 지나는데 밤에 산에서 종소리가 나 알아보니, 전에 절이 있었던 산 중턱의 굴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들려서 이를 신기하게 여겨 절을 증축하면서 이름을 물 수(水), 쇠북 종(鐘)의 수종사(水鐘寺)라고 바꾸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절집은 하나같이 기막히게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수종사는 시원스레 트인 눈맛이 뛰어나 두물머리(兩水里)의 서정적인 풍광을 조망하는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소백산, 월악산, 치악산, 속리산의 정기를 담은 남한강과, 금강산, 설악산의 기운을 지닌 북한강이 조우하는 두물머리는 충만한 에너지를 모아모아 한강을 통해 서울로 흘러 보낸다.
수종사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다실 삼정헌이 있다. 주지스님께서 시(詩), 선(禪), 차(茶), 이 세 가지가 같은 맛이라 하여 이라 삼정헌(三鼎軒)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내부는 두물머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한쪽 벽을 통유리로 만들었다. 산사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함께 두물머리 풍광을 즐기면서 은은한 녹차 한잔 마실 때는 잠시 신선이 된다. 평소에는 절을 찾는 모든 이들이 차를 무료로 마실 수 있지만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다실을 개방하지 않고 다실 바깥 양지바른 곳에서 녹차를 제공하고 있다.
강진에서 다산과 인연을 맺었던 초의선사(草衣禪師)는 1830년 겨울 수종사에 머물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와 함께 사찰 내에 흐르는 석간수로 우려낸 차를 마시면서 사회 변혁에 대해 치열한 담론을 했다. 이렇게 다선묵객(茶仙墨客)들의 체취가 진하게 베여있는 수종사는 삼정헌이라는 다실을 지어 초의의 차 문화를 지금까지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절에서 만든 새해 달력까지 선물 받고 불이문(不二門) 돌계단을 내려가는데 사금파리 같은 햇살이 잔설 위로 내린다. 고개를 드니 눈 덮인 두물머리는 무심히 밝고, 북한강에 내려앉은 안개는 한낮 햇살에 걷히고 있다.
일주문에 내려서자 다산이 ‘자찬묘지명’에 남긴 글이 산바람이 우려낸 풍경소리에 실려 온다.
‘부지런히 노력하는 동안 늙음이 이른 것도 알지 못했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