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코로나를 헤치고 오른 설국 한라

여계봉 선임기자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겨울의 수묵화는 제주가 곧 한라산이요, 한라산이 곧 제주라는 걸 가식 없이 보여준다. 바다에서 곧추 솟아오른 한라산 정상으로 가는 들머리는 해발고도 700m의 성판악이다. 한라산 허리를 가로지른 5·16도로의 정수리인 성판악은 코로나19 여파에도 주차장은 차량으로 가득하고 산객들로 붐빈다. 11일부터 사전 예약제를 시행 중인데, 예약한 사람들에 한해 하루에 성판악에서 1,000, 관음사 방향에서 500명씩 산행을 할 수 있다.

 

제주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이후부터 제주 사람들에게는 한라산이 곧 제주도였다.


성판악에서 시작되는 숲길은 성널오름 자락을 끼고 삼나무 조림지인 속밭대피소를 지나 사라오름으로 이어진다. 성널오름과 사라오름은 한라산의 동서를 잇는 산줄기에 이웃해서 솟아 있다. 덩치로 치면 성널오름이 훨씬 우람해서 숲속에서도 그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등산로가 이어지지 않지만 사라오름 정상에 서면 둥그스름하게 솟아 오른 덩치를 실감할 수 있다. 본래 성판악 코스의 지명은 바로 저 성널오름에서 따왔다. 서귀포시 남원 지경에서 바라볼 때 오름 어깨춤에 수직 절벽이 병풍처럼 산자락을 휘감으며 솟아오른 모양새가 마치 나무판자로 성을 두른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를 한자로 차용하면서 성판악(城板岳)으로 불린다.


성판악-사라오름-정상-성판악으로 하산하는 약 21km, 8시간 정도 걸리는 원점회귀 산행이다.



돌계단과 목재 테크가 번갈아 이어지는 길은 지난 주 내린 폭설에 묻혀 있지만 그래도 낮은 산의 호젓한 숲길처럼 평탄하다. 성판악에서 사라오름과 진달래밭을 지나 정상에 이르는 코스는 한라산의 등산로 중에서 가장 길면서 완만하다. 사방이 훤히 내다보이는 전망대도 없이 숲길을 따라 이어지는 밋밋한 길은 어쩌면 설악산의 호쾌한 암릉이나 지리산의 장엄한 첩첩산줄기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시시해 보일 듯싶다. 그렇지만 한발 두발 내딛으며 숲길을 가득 메운 조릿대 댓잎을 스치는 바람소리와 나목의 울림을 느끼면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 있다.

 

나목 사이사이 앙상한 숲 곳곳에는 상록수이면서도 소나무와 달리 넓은 잎을 가진 굴거리나무는 고개를 숙인 채 제 몸을 움츠리며 혹독한 겨울을 난다. 눈 녹이는 봄 햇살이 숲속으로 스며들 때쯤이면 굴거리나무의 축 늘어진 잎들이 꼿꼿하게 선다. 누가 시키지도 않아도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자연의 섭리 앞에선 늘 경건해지는 법인가.

 

 

푸른 잎사귀를 늘어뜨린 굴거리나무가 엷은 햇살을 받으며 졸고 있다.

속밭대피소를 지나고 눈을 뒤집어쓴 구상나무숲을 지나면 산죽길이 꼬리를 문 뱀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눈 속에 한껏 고개를 내민 푸른 산죽은 난장이지만 또렷한 잎 매무새와 진한 초록은 은세계의 백미다. 그들 군락 앞에 다가가 눈 위에 무릎 꿇고 감상하며 저들이 뿜는 산소를 들여 마신다. 내 허파는 금새 혈당에다 불을 당겨 체온을 만든다.

 

사라오름 삼거리에서 오름쪽으로 난 나무데크를 따라 올라가면 사라오름 산정호수가 나온다. 사라오름 분화구에 물이 고여 습원을 이루는 산정호수는 둘레 250m, 직경은 80~100m 정도다. 얼음이 녹으면 백록담과 푸른 하늘의 반영이 환상적이라 하늘호수라고도 불린다. 시야가 확 트인 사라오름 전망대에 서면 서귀포 앞바다의 섶섬과 지귀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선다.


산정호수에 물 마시러 나타나는 노루를 한참 기다려본다.


사라오름에서 내려와서 연이어지는 계단을 올라서면 갑자기 시야가 트이는 평원에 들어선다. 해발 1500고지 진달래밭 대피소다. 대피소 주위는 봄철이면 털진달래와 산철쭉 붉은 물결이 어지러이 피어나 장관을 이룬다. 겨울에는 이곳에 12시까지 도착해야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여기 올 때까지는 늘 긴장감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 정상까지는 한 시간 남짓 끝없는 계단을 올라야 한다. 따사로운 햇볕에 하얗게 피어난 설화가 눈을 황홀케 만든다. 하얀 솜이 살포시 내려앉은 겨울의 한라산은 은은한 빛 감도는 한 폭의 수묵화다. 구상나무숲 사이로 이어진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구상나무에 눈이 쌓여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는 흰 괴물들이 나타난다. 옥의 티인가. 한라산을 오를 때마다 고산지대의 구상나무 군락지에 고사목이 늘어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저민다.

 

우리나라 고유종인 구상나무는 지구 온난화로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시야가 트이는 곳에서는 부드러운 초가집 모양의 백록담 정상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면서 귓불을 스치는 바람이 포근하기만 하다. 햇빛 좋고 그지없이 맑은 날 한라산을 오르는 행운에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고개를 들면 산정의 티 없이 깨끗한 하늘, 돌아보면 동부해안의 쪽빛 바다 풍광이 일품이다.

 

한라산이란 이름은 원래 은하수를 끌어당길 수 있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산이 높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밖에도 부악, 두무악, 영주산, 진산 등 아름다운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섬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이후부터 제주 사람들에게는 한라산이 곧 제주도였다.


시선 아래로 스쳐 지나온 성널오름과 사라오름이 내려다보인다.


원추형의 한라산 그 정점을 다섯 갈래로 분할하는 등산로 영실, 어리목, 돈내코, 관음사, 성판악 코스는 산으로 이어지는 길일 뿐만 아니라 백록담의 그 신성을 제주 사람들과 연결하는 질긴 끈이라 할 수 있다. 한라산 곳곳에는 화산 활동으로 생긴 수많은 원추형의 작은 화산들이 오름을 이루고 있는데 그 수는 무려 360여 개나 된다. 이들은 백록담을 호위하듯 솟아있다.

 

 

하얀 솜 같은 구름 사이로 간간이 푸르디푸른 하늘이 열린다.


고개를 들어 한라산 정상을 바라보면 한겨울에도 초록빛을 띠는 구상나무 주단을 깔고 백록담 외벽이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며 솟아있다. 맞은편으로는 성널오름과 논고악, 동수악을 비롯한 제주 동부지역의 오름이 한 눈에 잡힐 만큼 전망이 시원스럽다. 수평선 맑은 날에는 성산 일출봉과 우도가 아련하게 다가온다. 구름바다가 발아래 깔렸고, 그 너머로 푸른 바다가 아스라하다. 시나브로 왼쪽 구름 장막이 무너지더니 서귀포 앞바다 범섬까지 모습을 드러낸다.


정상에는 인증샷을 찍기 위한 줄이 계단까지 이어져 있다.



솜사탕 풀어놓은 듯 산자락을 휘감은 운해가 달팽이 걸음으로 느릿느릿 흘러갈 때, 구름바다 위로 도도록이 솟아 오른 한라산은 동화 속 신비한 나라의 궁전 같다. 하늘금을 그리며 해안선까지 완만히 이어지는 부드러운 산세는 궁전을 떠받치는 성채와도 같다.

 

드디어 산행 시작 3시간 반 만에 정상에 도착한다. 국토의 마침표 같은 섬의 한가운데 극적으로 솟아오른 한라산의 높이는 1950m로 남한 최고봉이다. 발 아래로 백록담의 드넓은 분화구와 능선이 구름바다 위에 왕관처럼 떠 있다. 한라산은 제주도 사람들의 숨결과 역사를 그대로 안고 있는 산이다.

 


코로나 때문에 몇 번 연기한 끝에 한라산에 오르니 감회가 더 새롭다.

동서로 600m, 둘레가 3km, 깊이 100m에 달하는 분화구는 그야말로 바람의 도가니다. 고대 로마 원형경기장의 힘찬 함성이 바람으로 들끓어 오른다. 분화구 사면의 골짜기엔 서설로 생긴 주름살이 그로테스크한 조각 같다. 왕관을 휘감은 운해가 수평선으로 구름 이랑을 갈아내며 검은 바위와 하얀 눈이 빚은 백록담 수묵화에 자막을 긋는다. 눈과 얼음 세상인 백록담 안으로 태초의 시간이 흘러들어간다.




백록담의 흰사슴(白鹿)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체온증환자가 발생하여 정상으로 출동한 119 헬기

 

정상은 날씨가 포근하고 바람이 유순해서 한낮의 햇살이 넘친다. 주위는 눈빛으로 하얗게 넘쳐나고 봄날같이 온기를 머금은 햇빛 때문에 몸이 저절로 녹는다. 산객의 헛욕심도 같이 녹는다.

 

성판악 하산 길에 지쳐 잠시 쉴 때, 구상나무 이파리를 살짝 비벼서 코끝에 대고 숨을 쉬니 이천m 산길을 허덕이던 내 몸은 날듯이 가벼워진다.



 





여계봉 선임기자


여계봉 기자
작성 2021.02.09 13:14 수정 2021.02.09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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