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기행] 역사와 예술의 고장 통영을 가다

이순신 장군의 혼이 서린 곳, 문인 예술가 많이 배출

통영을 동양의 나폴리라고 했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나폴리와 통영을 다 가본 사람이라면 차라리 나폴리를 서양의 통영이라고 해야 옳다. 한산도에서 여수까지 가는 물길인 한려수도의 시발점에 위치한 통영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들이 강구안에 정박한 배들 위에서 나부끼는 통영은 청마 유치환을 비롯하여, 박경리, 윤이상, 김춘수, 김상옥, 전혁림 등 수많은 문인 예술가들을 길러낸 예향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선수군의 통제영이 있었던 곳으로 이순신 장군의 혼이 서린 역사의 고장이다.

사진=코스미안뉴스 / 강구안 풍경


통영을 둘러보기 위해 고속버스로 남도의 항구도시에 도착한 시간은 점심 때 쯤이었다. 비릿한 갯내음이 원초적인 그리움으로 다가서는 강구안 문화마당에 섰다. 해풍을 쐬며 말라 가는 가자미의 속살이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데 천진한 아이들은 낚싯줄에다 미끼를 달아 작은 고기들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 강구안은 호수처럼 생긴 포구다. 예전엔 연안여객선부두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어선들만 정박하고 있다. 주변에 충무김밥집이 줄지어 있는데 그 내력을 알고 보면 재미있다.

사진=코스미안뉴스 /충무김밥집


여름날 낚시꾼들이나 여행객들이 섬으로 놀러 갈 때 김밥이 오래 동안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밥만 김에다 말고 반찬은 따로 싸서 주었던 것이 충무김밥의 효시다. 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바구니에 이고 팔러 다니던 할머니가 원조였는데, 원조 논쟁이 있는 곳은 어디나 그렇듯 다들 자기가 원조라고 하니 헷갈릴 뿐이다. 집집마다 맛은 비슷하지만 원래의 주꾸미 반찬 대신 지금은 싼 오징어 절임을 주고 있으니 원조는 없는 셈이다. 하기야 맛만 좋으면 되는 거지...... 도시 이름은 충무에서 통영으로 바뀌었지만 김밥은 영원히 '충무김밥'으로 남아 있다.

사진=코스미안뉴스 /남망산공원


강구안 문화마당에서 고개를 들면 건너편에 보이는 언덕이 남망산공원이다. 이곳에 올라가 조용히 내려다보니 통영항은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통영 시내와 미륵도 사이에 아스라이 걸린 통영대교 아래로 배들이 오고가고 수많은 갈매기는 정겨운 항구를 온통 부산하게 만들어 버렸다. 세계적인 조각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남망산 조각공원 너머 쪽빛 바다가 해거름 햇볕에 반사되어 은비늘로 부서질 즈음 바로 옆에 있는 중앙시장에 들렀다. 소주 한 잔에 곁들이는 막썰이 회 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나서 서울과 대전 쪽 사람들이 내려와 들쑤셔 놓은 통에 고기 값이 많이 올라 뒷맛이 개운치는 않았다.

 

사진=코스미안뉴스 /청마거리의 청마시비와 우체국

조선수군의 통제영과 객사가 있었던 세병관으로 오르는 길에는 에메랄드 빛 하늘 아래 빨간 우체통이 하나 있다. 청마거리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다고 속삭이는 유치환의 시 ‘행복’이 새겨진 시비 앞에서, 지나는 길손도 고개를 끄덕이며 잔잔한 행복에 젖고 말았다. 그래! 사랑은 원래 받는 것이 아니고 주는 것이니까.

사진=코스미안뉴스 / 세병관


청마거리가 끝나는 곳에 세병관(洗兵館)이 있다. 전쟁을 끝내고 병기를 씻어 창고에 넣어두고 평화를 염원한다는 두보의 시를 인용하여 붙인 이름이다. 조선수군의 통제영 객사였던 세병관 건물은 국보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영을 한산도에 두고 있었지만 전란이 끝나고 나서 조선 후기에 통제영을 이곳 통영의 두을포 강구안으로 옮겼던 것이다.


세병관에서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약 500미터쯤 가면 충열사가 나온다. 고즈넉한 오후 시간에 이순신 장군의 영정 앞에 옷깃을 여미고 섰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 황제가 보내왔다는 명조팔사품이 진품이라고 자랑하는 해설사의 모습에서 진정으로 애국이 무엇이며 향토사랑이 무엇인지 읽을 수 있었다.

사진=코스미안뉴스 / 해저터널 위에 있는 판데목은 착량이라고도 한다.


통영 시내는 걸어서 한 바퀴 돌아도 되는 아기자기한 도보여행 코스다. 충열사에서 다시 걸어서 서호시장을 지나 판데목으로 향하는데 바다 물때가 사리 때라 드러난 개펄에는 조개를 캐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질박한 노동의 호미질 끝에 불거져 나오는 저 조개들은 내일 아침이면 새벽시장에서 주당들의 속을 풀어주는 해장국으로 올라갈 것이다. 도심에서 조개를 잡는 풍경은 생경하기만 했다. 그 풍경의 끝자락에 육지와 미륵도를 연결하는 충무교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는 해저터널이 있다.

사진=코스미안뉴스 /착량묘


여기 좁은 해협을 이 고장 사람들은 '판데목'이라 한다. 파낸 곳에 있는 병목이라는 뜻이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착량(鑿梁) 혹은 착포량(鑿浦梁)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 한산대첩에서 패한 왜군의 시체가 떠밀려 와서 꽉 메웠다고 하여 송장목으로도 불렸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 당국이 자기들 조상의 혼영을 조선 사람들이 밟고 다닐 수 없다고 하여 해저터널을 뚫어 바다 밑으로 다니게 했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다시 위로 밟고 다니라고 만든 다리가 충무교인 ‘폰데다리’다. 이곳 통영에는 아직도 아래 아 발음이 남아 있다. 판데다리를 폰데다리라 하고 팔은 폴, 파리는 포리, 팥은 퐅이라고 발음한다. 판데목은 한문으로 착량이고 여기 착량 언덕에 이순신 장군의 영을 모신 사당이 착량묘(鑿梁廟)다. 좁은 판데목을 바라보고 있는 착량묘에는 노산 이은상이 글을 쓴 한산대첩비가 그날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착량묘에 참배하고 해저터널을 지나 건너편 도남동으로 넘어갔다.

사진=코스미안뉴스 / 효봉 대종사 석상


해는 서산에 걸리고 산그늘이 바다로 내려올 즈음에 봉평동 산자락의 용화사를 찾았다. 판사로서 독립군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는 인간적 고뇌를 이기지 못하여 엿장수가 되어 전국을 떠돌다가 금강산 유점사를 거쳐 여기 통영까지 왔던 위대한 선승 효봉 선사가 주석했던 절이 용화사다. 한국전쟁의 혼란기에 화가 이중섭이 잠시 통영에 들러 효봉 선사를 만나보고는 "차암 맑으신 분이더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섬 이름도 미륵도이고 산 이름도 미륵산이니 언젠가는 미래불이 오실 곳으로 점지된 섬인지 모르겠다. 땅거미를 따라 하산하는 등산객들 틈에 끼어 저무는 항구로 슬며시 빨려들었다. 술만 시키면 싱싱한 해물 안주를 무한정으로 주는 통술집인 '다찌집'에서 통영 여행을 마무리했다. 판데목 좁은 해협에 늘어선 가로등 불빛이 정겨웠다.

이정민 기자
작성 2021.02.10 10:41 수정 2021.02.10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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