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고려산에 진달래꽃 없어도 서러워마오

여계봉 선임기자


겨울 산이 후르르 떤다. 하얀 눈 위에 상흔처럼 남겨진 자국을 훑으며 빈 나무가지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봄이 멀지 않았지만 야무지고 당찬 모습으로 거듭나기 위한 추스름이던가. 눈꽃 이불 덮고 한 줌 햇살 아래 모여 있던 낙엽들은 봄을 준비하러 사갈사갈 눈을 털어낸다.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인 강화도에는 진달래군락지로 유명한 고려산이 있다. 고려산의 원래 이름은 오련산(五蓮山)이다. 고려왕조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도읍지를 38년 동안 강화도로 옮긴 적이 있었는데, 이때 오련산이 고려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고구려 장수왕 때 인도에서 온 천축조사가 산정의 연못 오련지에 피어난 적, , , , 흑색의 다섯 송이 연꽃을 허공에 던져 그 꽃들이 떨어진 곳에 적련사(현 적석사), 황련사, 청련사, 백련사, 흑련사(묵련사) 5개 사찰을 지었고, 산 이름도 오련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현재 고려산에는 백련사와 청련사, 적석사 3개 사찰만 남아 있는데, 정상 북쪽에 백련사, 동쪽에 청련사, 그리고 서쪽 낙조봉 아래에 적석사가 있으며, 3개 사찰은 곧 고려산의 산행기점이기도 하다. 사라진 황련사는 강화읍 국화리 연화동 옛 보만정 자리에, 흑련사는 혈구산 서영동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왼쪽부터 큰 법당, 선원, 원통전. 청련사는 강화도 유일의 비구니 사찰이다.


오늘 산행 들머리인 청련사를 가려면 읍내에서 남쪽 고비고개 방향으로 가다가 고비고개 전에 청련사 입구임을 알리는 표지판 방향으로 좁은 도로를 따라 산 쪽으로 한참 올라가면 청련사가 나온다. 오늘은 청련사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건너편 능선에 있는 백련사에 들린 후 오련지를 지나 정상의 헬기장에 오른 다음 진달래군락지와 고인돌군, 낙조대를 거쳐 적석사로 하산한다.

 

청련사는 강화읍 서쪽 고려산 기슭에 창건한 사찰로 강화 유일의 비구니 절이다. 큰 법당 안에는 고려시대 불교미술의 높은 품격과 세련미를 볼 수 있는 보물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본존으로 모셔져 있고, 불당의 벽면에는 탱화가 걸려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천축조사가 고려산에서 날린 파란 연꽃이 닿은 자리에 청련사를 지었다. 그런데 절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원통한 마음에서 위쪽에 작은 암자를 다시 짓는 바람에 원통암이 되었다고 한다.

 

산길은 청련사 우측으로 나 있다. 나무데크를 따라 완경사의 산길을 조금만 오르면 백련사와 정상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백련사 방향으로 길을 잡고 숲으로 들어서자 눈 위에는 눈 위에는 길짐승, 날짐승들이 어지러이 쏘다닌 자국들이 낭자하다. 산허리를 두서너 개 돌아가니 숲이 울창한 곳에 자리 잡은 절집 앞에 수령 450년 된 할배느티나무와 할매느티나무가 산객을 반겨준다.

 

백련사. 진달래군락지와 가까운 사찰이라 진달래 축제 때는 많은 등산객으로 붐빈다.


겨울 산사에 들어서니 삭발승은 묵언정진(默言精進) 중인지 인기척이 없다. 침묵 속에서 암자와 스님은 꼼짝달싹하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기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지 겨울 산사는 적막강산이다.

 

백련사는 한때 팔만대장경을 보관했던 사찰이었고 고려 불상과 부도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상당한 규모의 대찰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절에는 1989년에 보물로 지정된 고려불상 철아미타불좌상이 있었는데, 보물로 지정된 그해 12월 안타깝게도 도난당해 지금은 볼 수 없다.

 

고려산은 진달래 외에도 신비한 전설과 유적지를 많이 가지고 있어 유서 깊은 곳이다. 백련사에서 정상을 향해 산길을 넘어가면 포장도로가 나오는데 도로를 따라 오르다보면 작은 연못 오련지가 나온다. 고구려 장수왕 때 천축조사가 이 연못에 피어난 적, , , , 흑색의 다섯 송이 연꽃을 허공에 던져 그 꽃들이 떨어진 곳에 다섯 개의 사찰을 지었던 것이다.


오련지. 산정의 이 우물에서 고려산에 5개 사찰이 생겨났다.


오련지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 더 오르면 첫 번째 전망대가 나온다. 바로 앞에 고려산 진달래군락지가 보이고 북서쪽에는 강화의 휑한 너른 벌판 뒤로 별립산이 우뚝 서있다. 별립산은 비록 해발 400m가 채 안 되는 산이지만 봉우리 주변에 희끗희끗 암벽을 드러낸 산세가 제법 우람하다. 별립산(別立山)은 강화 군내의 유명산인 고려산이나 혈구산, 퇴모산 등과 연결되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홀로 우뚝 선 별립산. 그 너머로 교동의 화개산이 보인다.
진달래군락지 대형 브로마이드. 이곳에는 사시사철 진달래꽃이 피어있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곳에 있는 헬기장에 서니 한반도 중심인 혈구산(466m)이 모습을 드러낸다. 퇴모산, 혈구산, 고려산을 잇는 연봉들은 아름답고 부드러운 곡선들을 드러내놓고 자랑하고 있다. 서쪽으로 석모도와 교동은 물론이고 북쪽으로는 황해 연백 일대의 북한 땅이 아스라이 펼쳐지는데, 날씨가 맑은 날은 개성의 송악산까지 보인다. 진달래군락지 너머로 낙조대로 가는 기나긴 능선이 이어지고 석모도 상봉까지 아련하게 보인다.


혈구산은 고비고개를 사이에 두고 고려산과 남북으로 이어져 있다.
진달래군락지 가는 길. 지능선이 끝나는 곳이 낙조봉이다.


진달래군락지로 가는 나무데크 중간에 고려산 정상 표지판이 있다. 고려산 정상(463.6m)은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어 진달래군락지(376.5m)가 정상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낙조봉까지 4정도의 능선길이 이어진다. 능선의 송림이 내뿜는 솔향기는 산의 맥박이고, 바람의 속삭임은 산의 숨결이다. 봄맞이 준비로 지금 겨울산은 쉴 새가 없다. 산은 억겁의 세월을 살았으되 젊다. 항상 바쁘고 쉬지 않는다. 그래서 겨울산은 자지 않는다.

정상을 대신하고 있는 진달래군락지의 정상 표지판


능선 길은 부드러운 흙길인데다 울창한 송림으로 가득하고, 중간 중간 고인돌군이 나타나 역사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다. 강화에는 고인돌이 모두 120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30기는 고려산 능선에 있다.

 

강화의 역사 문화적 가치는 지정학적 요충에 있다. 바다와 강을 통해 서울에 입성할 수 있는 곳이어서 언제나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다. 몽고양란에 맞선 대몽항쟁의 격전지일 뿐만 아니라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제국주의의 무자비한 침탈에 맞서 싸운 기념비적인 장소다. 거기에 한일병합의 전초인 강화도조약을 맺은 치욕의 장소이기도 하다. 요컨대 강화도야말로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동아시아 역사의 배꼽이자 한반도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저항의 메카인 것이다. 그래서 길가의 돌 하나 풀 한 포기에도 서러운 사연이 서려 있지 않은 곳이 없다.

 

능선 길에 있는 고인돌군. 역사와 문화가 깃든 길이다.

 

낙조봉 가는 등로 왼쪽으로 퇴모산과 혈구산의 연릉이 따라온다. 송림 속 길을 따라 제법 긴 오르막과 내리막의 반복하면 이 능선의 끝부분에 낙조봉이 자리한다. 낙조봉에서 오던 방향으로 계속 내려가면 미꾸지고개로 떨어지고, 왼쪽으로 틀어 가파르게 내려가는 좁은 등산로로 5분 정도 가면 적석사의 낙조대를 만난다. 낙조대에는 관음상이 서 있고 그 관음상 방향으로 펼쳐지는 서해의 낙조는 가히 절경이다. 전망대에 서면 마니산, 진강산, 혈구산, 고려산, 봉천산, 별입산, 화개산, 해명산 8개 산의 능선과 바로 아래 내가 저수지, 그리고 멀리 일렁이는 서해바다까지 볼 수 있다.

 

일몰 명소인 적석사 낙조대는 강화팔경 중 하나다.

낙조대에서 적석사까지는 금방이다. 고려산 서쪽 기슭의 적련사가 지금의 적석사인데, 절 이름에 '붉을 적()' 자가 들어 있어 산불이 자주 난다고 하여 '쌓을 적()' 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대웅전 옆의 감로정은 나라에 변란의 조짐이 생기면 우물이 마르거나 물이 흐려져 마실 수 없게 된다고 전한다.

 

절 마당의 부부나무 사이로 적석사 대웅전이 보인다.

적석사 마당에 서니 남쪽에서 마니산이 고개를 내민다. 이제 강화의 겨울산들은 오장육부를 비워내고 새봄 맞이할 준비에 한창이다.

 

귀가 길에 강화풍물시장에 잠시 들러 이곳 별미 밴댕이회와 회무침에 강화인삼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적신다.

 

강화 포구에는 한겨울의 동면에서 벗어난 철새와 고깃배들이 포구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고, 강화대교를 지나면서 바라보는 저녁놀은 아름답고 경이롭다.

 

오늘은 곧 다가올 봄에게 자리를 내어줘야 하는 강화도 겨울산의 서정을 마음껏 즐긴 하루였다.

 

 

 

여계봉 선임기자

 





여계봉 기자
작성 2021.02.26 12:48 수정 2021.02.26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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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