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터 가는 길은 스님도, 지나가는 사람도 하나 없는 적막한 오솔길이다. 그 옛날을 덮어버린 폐사지에 가면 듬성듬성 박힌 주춧돌이 모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무성히 자란 담쟁이 넝쿨이 석물을 타고 오르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저절로 스산해진다. 단청 화려한 건물에 금색 빛나는 불상을 모셔 놓은 절집에서 느낄 수 없는 처연한 정서가 있고, 인적 사라진 고요한 절터에는 사색으로 이끄는 침묵이 있다.
사라진 절집 앞에 버티고 선 말없는 저 느티나무는 묵언수행의 표상처럼 보인다. 바람이 불어오면 그저 슬며시 잎새를 나부껴 수백 년을 살아온 비결이 부동의 묵상에 있었음을 암시할 따름이다. 그런데 이런 묵상을 즐기기에는 봄 햇살이 요란스러울 정도로 화창하다.
여주시 북내면 혜목산 동쪽에 자리 잡은 고달사(高達寺)는 통일신라시대 764년에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이 절의 전성기였던 고려시대 때는 사방 30리가 모두 절 땅이었고 수백 명의 스님들이 도량에 넘쳤다는데, 원종대사가 입적하고 난 뒤 언제 어떻게 폐사가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향화(香火)가 멈춘 지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은 절터마저 한갓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 이곳을 아는 이조차 드물다. 그러나 이곳에는 호방했던 고려시대 선문(禪門)의 정신과 면모를 알려주는 뛰어난 문화재들이 드넓은 절터 곳곳에 숨겨져 있다.
늙은 느티나무에게 배례하고 절집으로 들어서서 지정된 관람로를 따라 걷는다. 사찰이 번성했을 당시 수조로 쓰였을 석조는 그 크기가 엄청나 과거 이 절의 규모가 대단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절의 역사를 증언해 주는 각종 석물 조각들이 여기저기 허망하게 누워 있는데, 이런 상처를 부둥켜안고 천년이 넘는 긴 세월을 말없이 버텨온 절터가 애잔하면서도 대견스럽다.
옛 영화는 간데없고 아련한 흔적만 남은 절터의 가운데를 걷노라면 휑한 벌판 한가운데 거대한 불상 받침대를 발견한다. 높이가 1.5m에 달하는 사각형의 석불 대좌는 그 크기나 장중함으로 보아 그 위에 앉아 있었을 주존불 역시 규모나 조각기법이 매우 뛰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불상은 어디 가고 거대한 대좌만 남았는가. 지그시 눈을 감고 대좌에 손을 대니 사라진 석불의 모습이 실루엣처럼 아련하게 떠오른다.
남한강 강가의 신륵사가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의 수호사찰로 번성을 누린 절이라면, 이곳 혜목산 기슭의 고달사는 한때 영화를 누렸으되 지금은 사라져버린 절집이다. 너른 절터에는 기둥을 세운 흔적과 건물 흔적들이 뚜렷하다. 이쪽이 대웅전이었을까, 그렇다면 이쪽은 아마도 나한전 자리였을 터다. 폐사지에 들면 이렇듯 사라진 절집과 석불들을 상상의 나래를 펴서 지어볼 수 있다.
절집은 모두 사라진 폐사지 중앙부에 탑이 홀로 우뚝 서 있다. 석불대좌에서 20m쯤 오르면 원종대사탑비(혜진탑비)가 있다. 고달사는 고려 태조부터 광종 때까지 왕실의 돈독한 신임을 받은 원종국사가 고달사 주지로 있을 때 전국 제일의 선찰로 면모를 갖추었다고 전해진다. 975년에 세워진 원종대사비는 1915년 봄에 넘어져 비신이 8조각으로 깨어지는 바람에 귀부와 이수만 남긴 채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을 거쳐 여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었는데, 2014년 문화재청에서 비신을 똑같이 복제하여 귀부, 이수와 연결하여 원형의 모습으로 재현하였다. 귀부(龜趺)는 거북을 비의 받침으로, 이수(螭首)는 이무기를 지붕으로 삼아 붙여진 이름인데, 거북은 지상과 하늘을 잇는 매개이면서 천년 수명을 누리는 장수의 상징이고, 이무기는 하늘을 나는 용의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둘 다 신성하기 이를 데 없는 영물이다.
드넓은 절터에 수백 년 묵은 고목이 마른 가지를 떨어뜨리고 깨진 기왓장과 석물들이 발목을 건드릴 때 잠시 폐허의 슬픔이 밀려온다. 그러나 참담하게 마멸된 절집의 석물은 바로 수행정진의 표상이다. 폐사지에 오면 늘 몸이 낮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가질 것도, 버릴 것도 더 없어서일까. ‘폐허의 미’는 상실감 대신 오히려 깊은 충만감을 준다. 그래서 이곳은 더 이상 적막하거나 쓸쓸하지 않다.
고달사지에서 가장 유명한 고달사지승탑을 보기 위해서는 고달사터에서 동쪽으로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야 한다. 승탑 가는 숲길로 들어서면 멀리서 강바람이 달려와 산죽 숲을 흔드니 바람이 지나가면서 천 수백 년 전 고려 석공의 망치소리를 실어다준다.
고개를 올라가면 웅장하고 기품 넘치는 승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국보 4호로 지정된 고달사지승탑이다. 누구의 것인지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고 고려 초 원감국사의 부도로 추정만 할 뿐이다. 높이가 3.4m에 달하는 거대한 승탑은 단지 크다는 것에서 놀랄 뿐만 아니라 그 절묘한 솜씨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형태는 여러 개의 돌로 짠 지대석에서부터 탑신과 옥개석까지 모두 8각형이다. 전체적인 균형도 좋지만, 몸돌에 새겨진 용의 모습이 단연 압권이다. 네 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 노니는 모습은 참으로 역동적이다.
고달사지 승탑에서 오른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평지로 내려오면 당시 고달사를 고려시대 삼대 사찰로 만든 원종대사부도가 있다. 이 승탑은 고달사지승탑과 매우 비슷한 팔각원당형 구조인데, 승탑의 기단부에 조각된 용이 위의 고달사지 승탑을 공손하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제자가 스승을 대하는 존경심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절터를 한 바퀴 다 돈 뒤 절집 입구에 있는 늙은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넓은 평원에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대찰의 영화를 잠시 상상해본다.
남한강을 통해 물산을 실어 나르며 이문을 남기고자 하는 상인, 새로운 문물을 찾아서 청운의 꿈을 안고 길 떠나는 청년,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불공드리러 찾아온 자식 등 숱한 민초들이 이곳을 찾아 부처에게 공양을 올렸을 것이다.
부처는 그 넓은 절집 마당의 석불 대좌에 앉아 절집을 찾는 백성들을 오늘 봄바람처럼 훈훈한 미소로 맞이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몇 백년간 고달사는 사람으로 가득하였을 것이다.
그 옛날의 사연을 떠올리며 폐사지를 바라보고 있으니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이 밀려온다. 매화나무가 눈 쌓인 깊은 산중에 숨는다 할지라도 골짜기를 타고 흘러가는 자신의 향기는 숨길 수 없듯이 석불 대좌만 남은 고달사 절터에도 부처의 향기가 흘러넘치는 듯하다.
부처는 천년의 바람이 지워버린 폐허 위에도 있다.
마음이 청산이라면 거기가 바로 법당이고 무문관이기 때문이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