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봄을 기다리는 파주 파평산

여계봉 선임기자


봄날은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다. 꽃 피우지 않으면 건너뛸 수 없는 봄, 마음이 몸을 솟구쳐 뛰게 만들지 않으면 바람 한 점 피워낼 수 없는 것이 봄이다. 그래서 아직 봄바람 앞에서는 마음이 설렌다.

 

파주 파평면으로 가는 임진강 강가는 햇빛이 쏟아져 내리고 봄기운이 완연한 들녘에는 아낙들이 파릇파릇 돋아난 냉이와 쑥을 캐고 있다. 봄은 어느새 소리 없이 우리 곁에 다가왔다.

 

파평산은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에 있는 산이다. 근처에 있는 100대 명산 감악산에 가려 잘 알려진 산은 아니지만 날씨가 맑은 날 정상에 오르면 북녘 땅 개성과 서해의 강화도, 그리고 서울 북한산까지 조망되는 전망이 뛰어난 산이다.

 

엄청나게 추웠던 40여 년 전 겨울, 81mm 박격포 소대장으로 동계훈련 차 소대원들과 함께 그 무거운 박격포를 어깨에 메고 양주 송추에서 출발하여 파평산 정상까지 올라갔던 애증어린 추억이 담긴 산이라 그런지 유달리 정이 가는 산이다.

 

정상(동봉)에 서면 골프장 너머로 파주의 진산 감악산과 고대산, 금학산이 보인다.


산 이름은 옛날 파평(坡平) 현청이 있었던 지명에서 유래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파평산(坡平山)을 본래는 미라산(彌羅山)이라 불렀다 한다. 미라(彌羅)가 한자로는 '두루 사방으로 퍼진다'는 뜻이지만 우리말은 용()을 뜻하는 '미르'가 된다. 따라서 파평산을 '용의 산'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산 아래에 있는 용연(龍淵)’이란 지명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파평산 산행기점은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의 파평체육공원이다. 잘 단장된 인조 잔디 축구장에서는 지역 주민들의 게이트 볼 시합이 한창이다. 체육공원에는 화장실이 갖춰진 주차장이 있는데 원점회귀 산행의 경우 이곳에 주차시켜 놓는 것이 편리하다.

 

주차장을 출발해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우측으로 인조 잔디 야구장이 나오고 이어서 작은 쉼터 앞에 파평산 산행 안내도가 그려진 대형 입간판이 나온다. 계속 길을 따라 가면 파평산토지지신(坡平山土地之神)’이라 적힌 비석이 서있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왼쪽은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오르는 2코스, 오른쪽은 임도와 계곡을 따라 정상으로 오르는 3코스로 가는 길이다.


파평산 산행 안내도. 좌측 2코스로 올랐다가 우측 3코스로 하산한다.

파평 윤씨 시조 윤신달(尹莘達)은 태조 왕건을 도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하는 데 공을 세운 개국공신이다. 전설에 따르면 파평산 기슭의 용연(龍淵)이라는 연못에 금궤가 떠있었다. 금궤를 여니 그 속에는 겨드랑이에 잉어 비늘을 지닌 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이 아기가 파평 윤씨의 시조가 되는 윤신달이었다. 그래서 파평산은 파평 윤씨의 본향이다.


삼거리에는 ‘파평산토지지신(坡平山土地之神)’이라고 적힌 비석이 있다.

2코스로 길을 잡으면 곧이어 사방댐이 나오고 계곡을 건너서 통나무를 이용해 만든 계단 길과 너덜지대를 지나면 오롯한 숲길이 펼쳐진다. 오르막은 계속되지만 숲의 청신한 기운을 호흡하며 오르다 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파평산 정상으로 가는 능선 길과 계곡 길 두 갈래 길인데, 오늘은 조금 더 긴 능선 길을 택해서 오른다.

 

제법 경사가 있는 능선을 타고 오르면 시멘트로 만든 벙커가 나타난다. 원래 벙커 지붕에서 바라보는 용연, 장파리, 임진강, 북녘 땅의 전망이 압권인데 오늘은 미세먼지가 심해 조망이 별로 좋지 않다. 왼쪽으로 파주의 진산인 감악산은 손에 잡힐 듯 시야에 들어오지만 임진강 너머 개성 송악산과 닭벼슬 능선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파평산은 개성 송악산의 닭벼슬 능선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산이다.

파평산은 근처 감악산과 함께 전략적 요충지다. 그래서 등산로 주위로 벙커와 교통호가 많이 보인다. 벙커 주위는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가 나있고 등산로와 같이 사용된다. 능선의 도로를 따라 가면 팔각정과 쉼터가 있는 임도 삼거리가 나온다. 6.25때 중공군과 아군과의 격전지인 이곳에서 작년까지 유해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안내판이 서있어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든다. 여기서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 오르막을 올라가면 시야가 훤히 뚫린 개활지가 나온다. 파평산 동봉 정상 아래 너른 분지는 규모는 작지만 제주 한라산 윗세오름 정상과 풍경이 비슷하다.


팔각정이 있는 삼거리. 1, 2, 3 코스로 나눠지는 분기점이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이 파평산 바로 앞의 고랑포에서 임진강을 도하하여 파평산과 비학산을 넘어 고려산 앵무봉을 거쳐 서울 북한산으로 침투하게 되는데, 그래서 파평산은 이른바 '김신조 루트'에 속하는 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맑은 날 파평산 정상에 오르면 김신조 루트에 속하는 지역과 산들을 모두 조망할 수 있다.


정상 아래 분지 오른쪽으로 미사일봉과 실제 정상인 서봉이 보인다.


분지에서 정상에 오르면 전망데크에 정상석과 팔각정이 세워져 있다. 파평산은 정상은 동봉과 서봉으로 구분되는데 서봉 정상은 군 시설로 출입금지 지역이라 동봉이 정상을 대신하고 있다. 동봉의 오른쪽은 천애의 낭떠러지인데 바위절벽이라 병풍바위라고도 부른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은 윤선달이 말을 달리며 무예를 연마했던 치마대(馳馬臺)로 알려져 있다. 전망 역시 대단히 좋아 멀리 연천 고대산, 금학산에서 출발하여 서울 도봉산과 북한산까지 조망된다. 오늘은 미세먼지 때문에 근처 감악산과 비학산, 고대산, 금학산만 보여주는 바람에 서운한 마음 달래려고 나무데크에 앉아 한참 동안 봄 햇살을 즐긴다.

 

동봉 정상(457m). 정상석에 적힌 495m는 실제 정상인 서봉의 높이다.
파주 진산 감악산. 통신시설이 있는 정상(675m)과 임꺽정이 보인다.


하산을 위해 정자와 쉼터가 있는 임도 삼거리로 내려온다. 임도 삼거리에서 숲길로 들어서서 조금만 내려가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호젓한 숲길을 더 즐기기 위해 계곡을 경유해서 돌아가는 3코스를 택한다. 계곡으로 가는 길에는 임도와 숲길, 그리고 로프가 설치된 가파른 내리막 등이 반복된다. 3월이면 숲은 어디서나 질척인다. 잡목 사이로 마치 가을 숲을 연상할 만큼 낙엽이 두텁게 깔린 숲 아래에는 곧 피어날 봄의 생명들이 숨 쉬고 있다. 중간에 만난 숲속 쉼터의 벤치에는 허허로움과 여유로움이 함께 넘쳐난다.

 

이제 봄바람 타고 하나 둘 꽃이 피어나면

가지마다 연분홍 꽃송이는 봄꽃 물결로 일렁이고

피면서 내리는 꽃비는 봄바람 타고 정처 없이 흩날릴 터

 

봄은 오지만 마음속의 봄을 만나지 못해

가눌 수 없는 허허로움에 빠져든 사람아

 

한 마리 나비 되어 봄소식 대신 전하니

마스크 속에서도 가끔은 웃으면서

다가올 찬란한 봄날을 기다려보시게

 

계곡으로 내려가는 낙엽 쌓인 숲길에 들면 잠시 계절의 혼돈에 빠진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산길을 내려서면 끝을 알 수 없는 기나긴 계곡이 갑자기 시야에 들어온다. 햇빛조차 잘 들지 않는 깊은 계곡인지라 얼음으로 가득한 이곳에는 봄이 아직 멀리 있다. 조심조심 계곡의 암반지대를 통과하는데 숲길이 희미해지면서 길이 사라진다. 계곡으로 내려가 없는 길을 만들어서 걷다보니 오른편 숲에 나무계단으로 된 등산로가 보인다. 이 길을 따라 계곡을 한참 내려가는데 계곡의 규모를 보아 여름에는 수량이 대단할 것 같다. 제법 규모가 큰 사방댐 옆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니 체육공원으로 가는 이정표가 나오고, 작은 고개를 넘으니 거친 임도를 만난다. 잔돌이 많은 임도를 따라 가니 제법 너른 공터와 삼거리가 나오는데 주위에 돌탑이 많이 세워져 있다. 왼쪽 구릉지에는 파평산 실향민 공원묘지가 모습을 보인다. 공원묘지를 왼쪽으로 끼고 20여분 내리막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좌우로 잘 자란 잣나무가 도열하여 피톤치드를 내뿜으며 산행의 노곤함을 씻어준다. 산을 내려가면 이 숲이 그리울 것 같다. 이윽고 산을 오를 때 만난 비석이 있는 삼거리가 나오고 계속 내려오면 산행기점인 파평체육공원에 도착한다.

 

잣나무 숲 사이 임도에는 봄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코로나 때문에 좌절했던 날들이 지금도 계속되지만 봄을 떠올리니 그냥 마음이 설렌다. 그럴 수밖에. 저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순들이, 저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새싹들이 우리를 마냥 들뜨게 하지 않는가. 겨우내 움츠렸던 우리의 몸과 마음도 이제 서서히 풀어지리라.

 

파평산은 겨울의 끝마디를 참아 내면서 그렇게 자신의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계봉 선임기자

 

 

 

 




여계봉 기자
작성 2021.03.13 10:18 수정 2021.03.13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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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