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를 향해 자유로를 달리다 보면 왼편으로 우뚝 솟은 오두산 전망대가 나오는데 이 부근에서 한강은 임진강을 품에 안는다. 한강은 강의 흐름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데 비해 임진강은 급격한 구부러짐의 연속이다. 그래서 임진강은 일곱 번 구부러진 강이라 하여 예부터 칠중하(七重河)로 불리어왔다. 그 칠중하 하구에서 다섯 번째 구부러진 자리, 모래톱이 호로병처럼 생긴 그곳에 호로고루가 자리 잡고 있다.
임진강의 연천은 고구려와 신라, 백제 삼국의 힘이 마주치는 치열한 곳이었다. 임진강 건너 북에 위치한 고구려의 성과 남쪽에 위치한 신라의 성은 남진과 북진의 세력이 마주치는 전쟁터였다. 그리고 당시 최대 무역항이었던 고랑포가 있어 전술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경기도 연천에는 산성, 보루, 토성 같은 성터가 25개나 된다. 대부분 수직 절벽 위의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에 우뚝 서있다. 그 중에서도 이름만으로는 낯설게 들리는 호로고루(瓠蘆古壘)는 경기도 연천의 장남면 임진강변 현무암 절벽 위에 있다. 호로고루의 어원에 대해서는 이 부근의 지형이 표주박, 조롱박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불린다는 설과 '고을'을 의미하는 '홀(호로)'과 '고성'을 뜻하는 '고루'가 합쳐졌다는 설이 있다.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전시관 위로 난 농로를 따라 가면 드넓은 초원 위에 제주오름 같이 생긴 작은 성이 나타난다. 임진강 가장자리에 삼각형 모양의 평지에 마련된 고구려성인 호로고루는 우리나라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구조다. 성의 남쪽과 북쪽은 동서방향으로 길게 뻗은 15m 높이의 임진강 자연절벽을 성벽으로 활용했다. 진입이 가능한 동쪽 방향에 길이 90m, 높이 10m, 폭 40m의 견고한 성벽을 쌓아 방어기능을 갖췄는데 가장 높은 동벽 정상부와 서쪽 끝부분에 장대(將臺)가 설치되어 있다. 성문은 사라졌지만 1,500년 세월을 버틴 동문 부근 성벽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동벽의 남쪽을 따라 돌면 임진강이 거대한 강줄기를 이루며 동쪽에서 휘몰아쳐 원을 그리며 호로고루를 지나간다. 강폭은 좁아도 30~40m 수직 단애 아래 급류가 흘러 천연 장벽을 이룬다. 이 수직단애는 자연장애물이자 천혜의 요새를 구축할 수 있는 입지를 형성하여 임진강은 6세기 중엽 이후 200여 년 동안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하천 역할을 해 왔다. 특히 이 지역은 수심이 낮아 임진강을 쉽게 도강할 수 있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한강 이남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고구려가 임진강 일대까지 밀려나 쌓은 최후의 보루다. 성벽은 고구려가 쌓았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뒤 신라가 보수해서 계속 사용했다.
성벽 밑에서 보면 잔디로 덮인 성벽 위로 드넓은 하늘이 펼쳐져 가슴이 시원해진다. 계단을 올라 전망대에 서면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과 강가의 두지포구와 고랑포구가 보인다. 성 아래 펼쳐진 넓은 초원과 그 너머로 파평산과 감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가에서 한가로이 노닐던 물새들이 무엇에 놀랐는지 동시에 하늘로 비상하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임진강 주상절리와 절벽이 임진강과 어우러져 독특한 풍광을 연출한다. 삼국시대 치열한 접경 지역이었던 이곳에서 누군가의 남편, 아버지이자 아들이던 병사들은 떠나온 고향의 가족들을 절절하게 그리워했으리라.
전망대에서 북벽을 끼고 돌아 동벽 북쪽 치로 내려온다. 너른 들판에는 목책유구와 대형 집수시설, 우물이 있던 터가 있고 목책 내부에는 초병들의 숙소로 사용된 토광이 있다. 근래 실시된 수차례의 발굴 작업을 통해 많은 기와와 토기류, 석기, 철기 등 다양한 고구려유물과 난방과 취사를 위한 온돌시설까지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당시 성내 규모가 대단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북에서 보내준 광개토대왕비와 이 지역 주민들이 세운 통일바라기 비가 서 있다. 여기서 북쪽으로 4km만 더 가면 북한 땅이다. 고구려와 신라가 치열하게 대립했던 이 지역은 지금은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해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최전방 지역이다. 나그네는 1500년이란 세월의 무심함에 그저 말을 잃는다.
돌아가는 길에 두지나루터에 잠시 들러 장남교 아래를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를 바라본다. 바람을 따라 임진강을 오르내렸던 황포돛배는 돛을 접은 채 나루터에 묶여 있다. 뱃사공은 어디가고 돛대에는 갈매기들만 가득하다.
강가에 서니 그리움은 애절한 강물이 되어 흐른다. 산다는 건 가슴 저며 오는 일이다. 격변의 세월을 견뎌낸 이 땅의 기묘한 풍광에 서러움이 밀려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