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서해안에 돌출한 변산반도는 산악지대를 내변산이라고 하고, 바깥쪽 해안 일대를 외변산이라 부른다. 따라서 변산(邊山)하면 변산반도 일원을 말하며, 내변산의 쌍선봉이 주봉 역할을 한다. 내변산의 산들은 비록 300~400m 높이로 높지 않으나 첩첩한 산과 울창한 숲, 깊은 골짜기는 심산유곡을 방불케 하고 골짜기 곳곳에는 폭포와 담(潭), 소(沼)가 걸려 절승을 연출한다.
가을 산사 찾아가는 산행은 남여치-월명암-직소폭포-관음봉-내소사 코스로, 총 11km 거리에 약 4~5시간이 소요된다.
산들머리 남여치에서 쌍선봉(458m)을 향해 본격적인 산오름이 시작된다. 쌍선봉은 입산 금지구역이라 우회하여 월명암으로 향한다. 경사진 듯 평탄한 듯 쭉 곧은 듯 구부러진 듯 완만한 진입로에 기분 좋게 다져진 흙길을 넉넉한 마음으로 천천히 걷다 보면 산사 찾는 감칠맛이 느껴진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오가면서 흘렸을 땀과 그들이 남긴 발자욱들, 아름다운 추억과 간절한 기도가 배어 있는 비단길이다.
남여치를 출발한 지 1시간 약간 넘게 걸려 천년고찰 월명암에 도착한다. 해발 300m 고지에 위치한 월명암은 신라 신문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데, 절 마당은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호젓하고 스산하면서도 희한한 아름다움이 밀려온다.
대나무 능선에 이어 암릉으로 이루어진 등로가 이어진다. 내변산의 봉우리들은 주로 편마암과 변성암으로 되어 있어 기이함이 더하고 잘 미끄러지지 않아 산 타기가 쉽다. 산은 육산(肉山)과 골산(骨山)으로 나뉘는데 내변산은 골산이라고 할 수 있다. 골산은 바위의 기가 세서 이를 누를 수 있는 강하고 어진 현자(賢者)를 만나면 훌륭한 수도처가 되고, 반대로 기(氣)가 약한 사람이 살면 가위 눌림이나 사고를 당한다는 속설이 있다.
오늘 등로는 산상호수로 내려가 직소폭포까지 갔다가 다시 산오름을 계속하여 뒤쪽의 산 능선을 따라서 왼쪽 위 관음봉까지 계속 가야 한다.
봉래구곡 삼거리로 내려서면 이정표가 나오고, 푸른 화살표 방면으로 30분 정도 가면 내변산 매표소가 나온다. 자연보호 기념비가 있는 소공원 삼거리에서 내소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깊은 계곡의 작은 소를 휘돌던 물이 넘쳐 바위를 타고 흐르다 직소폭포에서 떨어져 분옥담과 그 아래의 선녀탕으로 이어지고 이 물은 기암괴석과 푸른 숲을 끼고 크고 작은 담과 소로 이루어진 봉래구곡을 거쳐 마지막으로 부안군민의 식수원인 부안댐까지 흘러든다.
맑은 물길을 따라 올라간 길 끝에 조그만 언덕을 넘으면서 그림 같은 호수를 만난다. 거울 같은 수면에 산 그림자를 담고 호수는 비단결을 펼쳐 놓은 듯 아름답다. 호숫가 길을 따라 오르면서 바라본 주변의 경관에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온다.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직소(直沼)폭포는 30m 높이에서 수직으로 물줄기가 쏟아지는데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아래에서 보면 마치 하늘에서 바로 물이 떨어지는 듯하고 물줄기가 떨어져 고이는 둥근 소는 깊이를 알 수가 없을 정도로 깊다.
재백이고개 능선에서 계단를 내려와 암릉을 올라서면 길 앞에 우뚝한 관음봉이 막아선다. 이정표에서 정면으로 20분 정도 가면 관음봉(424m)이 나오고 이어서 세봉까지 등로가 연결된다. 내소사로 내려오는 중간에 돌아본 관음봉은 두 개의 암봉이 낙타등처럼 치솟아 있다.
등로 오른쪽으로 서해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바닷물에서는 쪽빛인지 청보리 빛인지 푸르스름한 방광이 일고 크고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쭉 뻗으면 닿을 듯 청옥빛 바다 위에 옥색 비단에 고운 장신구처럼 박혀 있는 작은 섬들과 그 사이를 유영하는 고깃배들이 보인다. 기암괴석의 산자락은 해안가에 치마폭을 담그고 있다. 산하의 수목들은 머릿결처럼 살랑거리고 잎새의 잔물결들은 아름다운 율동을 만들어낸다.
내소사는 선운사(禪雲寺)의 말사로, 백제 무왕 때 승려 혜구두타가 처음에는 소래사(蘇來寺)로 창건하였다. 절 뒤 관음봉을 능가산이라고도 하는 까닭에 보통 '능가산 내소사'로 부른다. 산 속의 길이야 어느 곳에서든 푸르겠지만 이곳의 산색은 특히 아름답고 명산의 푸르름 또한 한결 같으니 멀지 않은 곳에서 넘실대고 있을 파도와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산자락 속에 자리한 내소사에서는 누구라도 마음이 편안해 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고려 때 시인 정지상은 오늘 같은 가을날, 내소사에 들러 시 한 수를 읊조렸다.
옛 길은 적막하게 솔뿌리 엉겼는데
하늘이 가까워 북두칠성을 만질 수 있네.
뜬 구름에는 흐르는 물, 객(客)이 절에 이르고
붉은 단풍 푸른 이끼에 중은 문을 닫았구나.
가을바람 선선한데 지는 해에 불고
산달이 점점 밝아오니 잔나비 맑은 울음 운다.
기이하다. 수북한 눈썹의 늙은 중이여.
오랜 세월을 인간 세상 꿈꾸지 않았구나.
내소사의 일주문부터 천왕문까지 약 600m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은 150년생 전나무 500여 그루와 단풍나무가 어우러져 정말 매력적이다. 단풍 질 무렵이거나 낙엽이 휘날리는 요즘 이 길을 걷노라면 몸에는 진한 나무 내음이 배이고 경내에 들어서기 전에 벌써 마음이 정갈해진다.
산문을 나서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불끈 솟은 관음봉도 높은 산에 비하니 그 높이가 별것 아니고, 높게 보이던 직소폭포도 그 위에 오르니 발 아래 하천일 뿐이다.
직소폭포에서 흐르는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니 자재(自在)이고, 월명암에 밝혀진 불은 수명 다해 꺼지니 이 또한 자재이다.
삼라만상의 자연은 모두가 자유자재이거늘 인간만이 사소한 것에 마음의 덫을 걸어 그 마음을 가두니 안타까울 뿐이다.
삶이란 고해(苦海)이자, 화택(火宅)이다.
가을 산사로 가는 길은 이 화택에서 잠시 벗어나는 일이다.
방하(放下)!
만추(晩秋)에 젖은 내변산의 입구가 밝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