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프로젝트] 스물, 그 서사의 시작

나연우



어릴 적부터 난 글쓰기를 좋아했다. 손 글씨가 예쁘다며 칭찬해주는 어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을까.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건 내가 글쓰기를 좋아했다는 것과 아주 오랫동안 글을 써왔다는 것이다. 상상 속에서 난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때론 아주 달콤한 상상도 해보고 아주 슬픈 상상도 해 보았다. 모든 사람들은 나처럼 상상을 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생각 저 생각에 푹 빠지는 그 순간이 바로 상상을 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일상 속에 녹아든 그 상상을 끼적여 내는 것. 그것이 바로 내 글쓰기였다.


이제 겨우 삐뚤빼뚤 글씨를 쓸 수 있었던 나이. 벌써 희미해져버린 빛바랜 기억에서부터 일기나 편지와 같은 글들을 써왔었다. 그러다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그리고 스물. 언제부턴가 난 생각에서 멈추는 사람이 되었다. 글을 쓰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리 바쁘지도 않았다. 밥도 잘 챙겨먹었고 좋아하는 음악도 듣고 영화도 자주 보러가곤 했다. 그러면서도 늘 바쁘단 핑계를 대며 내 생각과 느낌을 남겨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순간은 흐려져 갔다. 다시 그 순간을 남기기로 마음먹은 건 우연한 계기였다.


사람이 변할 수 있는 골든타임은 가장 낮은 곳까지 무너졌을 때라고 누군가 그랬던가. 십대의 끝자락. 한바탕 폭풍처럼 사춘기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 다 끝난 줄 알았건만 오춘기가 오기라도 한 건지, 사춘기로 폐허가 된 마음 한구석이 망가져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공허함과 방황이 시작되었다. 가장 쉽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가장 어려운 것이 되어버리고, 나의 전부라고 여겼던 것들은 어느새 티끌만큼 작아져 있었다.

웃는 모습이 예쁘다 해주던 사람들은 더 이상 내 웃음을 보지 못했고, 선한 인상이 매력적이었던 내 얼굴은 차가운 인상으로 변해버렸다. 크고 작은 일들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모두 짊어지고 있던 난 더 이상 반짝거리지 않았고 한 순간 저 아래로 추락해있었다. 가장 낮은 곳에 다다르고서야 깨달은 건 내가 얼마나 높은 곳에 있었는가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당연한 것처럼 누리고 있었던 가였다.


위로가 필요했다. 나의 회복을 위해 이것저것 많은 것을 해 보았다. 재밌는 영화를 보기도 하고 좋은 음악을 찾아 듣기도 하고 무작정 밖으로 나가 화려한 조명이 켜진 거리를 걸어보기도 했다. 친구도 만나보고 맛있는 음식을 마구 먹어도 보았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아니, 순간의 위로일 뿐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의 불이 켜지면 또 다시 공허했고, 흘러나오던 음악이 멈춘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화려한 조명이 켜진 거리를 거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캄캄한 밤공기에 또 다시 맘이 시렸다. 친구와 하하호호 떠들다 헤어지고 나면 외로웠고 맛있는 음식을 먹은 후엔 미처 소화되지 못한 음식물이 속에서 부대껴 답답했다.


특별한 것으로부터 특별한 위로를 바랬던 것, 그게 문제였다. 내게 위로가 된 건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이야기였다. 누구에게나 있는 감정들과 그런 이들의 일상 속 스쳐지나간 시간들. 내게도 분명 언젠가 머물렀던 혹은 머무르고 있거나 머무르게 될 그저 평범한 말들이 내게 위로가 되었다. 사람 사는 이야기 다 똑같다는 말은 정답이었다.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내겐 가장 큰 위로와 행복이었다. 별 것 아닌 대화 몇 마디의 평범함이 사실은 제일 빛나는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이렇게 위로를 받았으니 이젠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방법은 간단했다. 내가 받은 위로 그대로를 돌려주는 것. 나의 평범한 스물 인생의 전부를 담아내는 것. 그 시간 속에 살아 숨 쉬었던 나의 수천가지 감정들과 생각들. 그것을 나누고 싶었다.

 

20181115일 대수능을 치른 후, 내 일상은 여느 또래들과는 많이 다르게 흘러갔다. 수능이 끝난 후 부터는 온전한 성인으로써 정서적,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교육관 덕에 남들보다 아주 빨리 독립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중앙대학교 연극학과에 입학하게 되었고 본가가 부산인 탓에 부모님과 떨어져 기숙사에서 살게 되었다. 아직까지 적응이 되지 않는 학과 생활과 20살의 과도기에서 빚어지는 성장통, 끝없이 쏟아지는 일들에 파묻혀 1월 중순쯤부터 잔병치레가 잦았다. 하지만 힘들다고 주저앉을 수 없는 것이 나의 처지였기에 진통제로 하루하루를 버텨내기 일쑤였다.

세 번씩이나 쓰러지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그렇게 일상을 살아내다 48일 새벽, 결국 응급실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진료를 본 의사선생님의 첫 마디는 이 몸 상태로 일상생활이 가능해요?”였다. 그런 것 따위 상관없었다. 내 몸 상태와는 무관하게 해내야만 하니까 하는 것 뿐 이었다. 당장 정밀검사를 받고 입원하라는 의사선생님의 만류에도 다음 날도 평소처럼 학교를 갔고 일을 했다. 하지만 그 날 새벽, 또 다시 40도까지 열이 끓어올랐고 식은땀이 흘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온몸이 아파왔고 찢어질듯 한 복통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결국 다시 응급실을 찾았다. 그 날, 정말 많이 울었다. 부모님도 없는 타지에서 혈관조차 없어서 팔과 손이 주사바늘로 난도질당하고 이마와 목에서 겨우 찾은 혈관으로 피검사를 해야 하는 내가 가여웠다. 병명은 다양하기도 했다. 식도염과 위경련에 급성 인후염과 편도염이 겹쳤고 유행이라는 독감까지. 뿐만 아니라 난소에 혹이 생겨 그 혹이 맹장을 누르고 있어서 맹장 끝 부분에 회장이 부풀어 올라 염증이 생겼다고 했다. 그 염증이 생긴 지 꽤 오래되어 골반염까지 생긴 상황이었다. 즉시 심장마비와 쇼크사의 부작용을 감안하고서라도 정밀검사를 받겠다는 동의서를 작성하고 온갖 약물을 투여했다.

이후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아침마다 엑스레이 촬영과 CT촬영, 피검사가 이어졌다. 내분비과부터 소화기과,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신경과까지 대학병원을 투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나보다 훨씬 심각한 환자들도 많이 보았고 걷지도 못하고 숨조차 쉬지 못해 보조 장치를 끼고 있는 내 모습에 숨죽여 눈물만 흘리는 엄마의 모습도 보았다.

수술과 검사의 연속이었던 입원 기간 동안 참 많은 것을 느꼈다. 다신 아프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온전한 나를 위해 오직 나만이 나를 지켜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것조차 기적임을, 내가 살아내는 오늘이 누군가에겐 간절히 염원하던 내일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세상이 나에게 호의적이라는 것과 노력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는 것.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좋은 사람들이 곁에 참 많다는 것도. 아직 건강이 온전치는 않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려한다.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때 가장 나다운 법이니까 말이다. 사소한 기쁨과 감사함을 허락해주시고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을 위해. 내가 건강해야, 내가 온전해야, 내 사람, 내 가족들도 내 주님도 행복할 테니.


이 글은 평범하지만 반짝 반짝 빛나는 내 열아홉의 이야기이며 평범하지만 따뜻한 모든 이들의 이야기이다.

 

 

글 : 나연우


전명희 기자 

 



정명 기자
작성 2020.09.13 10:45 수정 2020.09.13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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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