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3월
24일(갑신) 나라의 제삿날1)이라 업무를 보지 않았다. 우후 [이몽구]가 수색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다. 순찰사 [이광]과 도사2)의 답장을 [군관] 송희립3)이 함께 가지고 왔다. 순찰사의 편지 내용 중에 “영남방백4)이 보낸 편지에 ‘대마도주의 서계5)에 「일찍이 배 1척을 내보냈는데 만약 아직 귀국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바람에 부서졌을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하니 그 말이 지극히 흉악한 거짓이다. 동래에서 서로 바라보이는 바다이므로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데도 이처럼 말을 꾸며대니 그 거짓됨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주]
1) 세종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제삿날이다.
2) 관찰사의 보좌관 역할을 하던 종5품 벼슬로서 실무와 감찰 등을 담당하고, 관찰사와 함께 수령들의 근무성적을 평가하였으며, 관찰사 유고 시에는 그 직임을 대행하기도 하였다.101 당시의 전라도사는 최철견(崔鐵堅)으로서, 그의 자는 응구(應久), 본관은 전주(全州), 생몰년은 1548년~1618년이다.
3) 송희립(宋希立)의 자는 신중(信仲), 본관은 여산(礪山), 생몰년은 1553년~1623년이며, 옥포해전, 당포해전, 노량해전 등에 참전하였다. 『난중일기』에는 그의 형 송대립과 동생 송정립의 이름도 보인다.
4) 원문 ‘方伯’은 ‘한 지방의 가장 높은 사람’이란 뜻으로서 관찰사의 별칭이다. 당시의 경상관찰사는 김수(金晬)로서, 자는 자앙(子昻), 본관은 안동(安東), 생몰년은 1547년~1615년이다.
5) 일본과 주고받던 공식 외교문서를 말한다. 막부의 장군과 주고받은 문서는 국서(國書)로, 막부의 관리들이나 대마도주와 주고받은 문서는 서계(書契)로 표기하였다. 당시의 대마도주는 소 요시토시(宗義智)로서 우리나라에는 주로 종의지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원문] 二十四日甲申 以國忌不坐 虞候搜討 無事還來 廵使都事答簡 宋希立並持來 廵使簡中 嶺南方伯致簡曰 島主書契 曾有一船出送 而若未到貴國 則必爲風所敗云 其言極凶詐 東萊相望之海 萬無如是之理 而作辭如此 其爲譎詐難測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