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구 칼럼] 꽃 보고 놀랜 가슴

문경구

 

테이블 위 화초가 창가를 향해 긴 목을 빼고 꽃봉오리를 준비하고 있다. 영사기 불빛 같은 햇살이 거실 안부터 시작되자 한 마리 달팽이의 몸에라도 도움을 청하여 창밖으로 나가고 싶은 모습 같다. 창밖에서 피워대는 꽃의 세상으로 찾아가기 위하여 몸담고 있는 화분을 벗어 버리고 파란 하늘이 부르는 밖을 향해 떠나고 싶다.

 

양동이로 퍼부어 대는 밖의 파란 녹음들은 나의 청춘이 되어 나를 불러대고 꽃봉오리에 마음이 설레던 그 여름도 누구나 부러워하던 내 젊은이였다. 펌프로 퍼 올린 세숫대야 물속으로 하늘이 내려앉던 여름날, 거울 같은 내 젊음을 닦는 새수를 하면 풋풋함이 그대로 대야에 녹아 있었다.

 

물 위로 비친 젊은 날의 내 얼굴이 꽃과 비교해 한치도 다름이 없던 때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거울 속에 내 얼굴은 모르는 타인의 모습이다. 시든 꽃잎이 바닥에 누울 때까지 지켜볼 즈음에도 내 젊음만큼은 영원할 줄 알았다. 한번 피웠다가 열흘도 붉지 못하고 지고 마는 꽃은 나의 자존감과 다른 줄 알았다.

 

예전에 주변에 계셨던 어르신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한 시절을 꽃만 보면 붉게 달아오르던 자신의 얼굴을 지켜보려고 매일 거울과 함께 살았는데 지금은 마치 험상궂은 불도그 한 마리에 놀란 자신의 현실을 거울 속에 멈춰진 기억으로 묻어두고 싶었다고 했다. 시들어가는 꽃주름의 얼굴을 보면서 하루살이 다음으로 오래 사는 꽃의 운명이 무엇인가 깨달았다고 했다. 그래서 꽃의 화려함보다는 잔잔한 얼굴로 세상을 보니 모든 것이 편한 만큼 허망함도 따라와 있다고 말했다.

 

꽃 같은 얼굴로 한 백 년쯤 살 것 같았던 그 노인분을 나는 꼭 다시 만나고 싶다. 그 노인을 만날 때마다 나는 노인처럼 절대로 늙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던 내가 지금 그 노인의 얼굴이 되어있다. 왜소한 몸과 흰 머리까지 고귀해 보였던 분의 모습을 왜 그때는 긍정의 거울로 볼 수 없었을까. 클레식음악 악보 같은 주름살을 활짝 펴고 행복한 웃음을 지으셨던 흑백영화 속 여주인공 노인을 마지막 뵌 일이 엊그제만 같다. 엊그제라고 하면 그리 멀리 가지 않았을 그 노인을 달려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만나서 그때 노인을 이해하지 못한 죄스러움을 사죄드리고 싶다.

 

그때 왜 노인은 노여움은 애써 감추시고 꽃의 자태만 지켜내시려는 그 속내를 떠나신 뒤에야 알게 되었다고 꼭 전하고 싶다. 늙어가는 자신을 애써 참던 그 내면의 자태를 바로 지금 내가 연습하고 있다고 위로해 드리고 싶다. 삶의 절제를 갖추신 그 노인의 삶이야말로 아름다운 꽃의 인생이셨고 내게는 늙음의 교훈을 주고 가셨다.

 

사람이 떠난 후에 남겨진 것은 사랑의 기억뿐이라고 하는 말은 그 노인을 두고 한 말이다. 어느 세월에도 탈색되지 않은 꽃의 순수를 그대로 지니고 가신 그 노인이 그리워진다. 자꾸 멀어져 가는 신문 속 글씨를 애써 잡으려는 내가 노인처럼 사랑만 보일 수 있을지는 보장할 수 없다.

 

젊음이 가버렸다고 반드시 치매를 앓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을 명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그 노인의 말처럼 살아야 한다. 백 년을 살고 싶다면 당연히 치매 없이 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꽃다워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꽃처럼 열흘 깔끔하게 피고 자신의 추함을 모르고 떠나야 하는 거다. 무작정 백년화만 고집하며 치매 꽃을 피우느니 열흘이라는 청춘을 꽃으로 마감한다는 것은 역시 꽃다운 위상이다.

 

나는 그 해답을 받아낼 수 있을 것 같다. 화분 속 꽃들처럼 잔잔한 우아함 속에 그런 큰 답이 있었다. 아무 어려움 없이 평생을 우아하게 사는 화원의 꽃들이 척박한 사막 땅에서 물 한 방울도 신의 눈물처럼 기다리며 살아야 했던 나의 의미를 어찌 알겠냐고 나는 말했었다. 나의 의지 하나만 믿고 살아온 나는 겉과 속이 다른 사막에 핀 오만의 꽃이었다. 친구들이 찾아와 옛 모습의 나를 쉽게 찾을 수 있을 마지막 숙제가 남았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치매의 두려움의 엄습을 만나기 전에 떠날 수 있는 꽃과 같은 운명이고

싶다. 나는 어떻게 살았냐고 그들이 물으면 대답해 줄 거다. 뜨겁던 사막 땅의 싸늘한 밤기운을 맞으면서도 어렴풋이 남은 어린 시절의 실낱같은 기억을 잊지 않고 살았다고 할 거다. 그래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고 내 곁엔 늘 나를 치매로부터 지켜주는 글쟁이가 함께 해주었다고 말할 거다.

 

떠나가신 그 노인처럼 어제를 꽃의 시인처럼 살았고 오늘을 꽃의 화가로 산다면 치매는 나에게 말도 꺼내지 못하고 돌아갈 거다. 꽃다운 자신의 모습을 찾지 못해 안타까워 꽃만 보면 놀라던 그 노인을 이해할 수 있게 한 꽃은 나의 스승이다. 눈 부신 햇살도 그 어느 날의 천둥도 우리 모두가 피워 낼 수 있는 열흘 동안의 생명을 위한 하늘의 뜻이다. 어제의 젊었던 청춘을 한탄하지 않고 희망도 절망도 꽃의 색으로 표현하면서 꽃답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처음 화원에서 데려올 때처럼 시들지 말고 그 모습 꼭 그대로 지키라고 한 나의 말 지키지 못했다고 냉정하게 처 버린 꽃들, 나의 젊음도 함께 따라 내쳐졌던 세월의 의미를 깨달았다. 내삶의 힘듦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고 반듯하게 살다가 신이 보내주신 사신을 얼른 알아보고 반갑게 따라나선 그 노인의 철학은 신의 경지였다.

 

아무리 꽃처럼 살았어도 치매에 걸려 사신도 못 알아본다면 신 앞에서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평생을 꽃을 바라보며 살다가 한 장의 시든 꽃잎처럼 가벼운 몸으로 돌아가는 각오를 꽃은 내게 일러 준다. 그것은 그대로 간직하는 내 모습의 꽃을 그리는 화가로 살다가 떠나고 싶다.

 

어제 핀 꽃도 기억하지 못하는 청춘은 속절없이 가버린 젊음을 탓하지 말고 거울 속의 나를 보고 놀라지 말아야 한다.



[문경구]

화가

수필가

코스미안뉴스 칼럼니스트

문경구 kimurgin@hotmail.com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5.25 12:12 수정 2021.05.25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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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