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역사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1592년 4월 18일(음력)

이순신 씀 / 윤헌식 주해

사진=코스미안뉴스


1592년 4월

18(정미) 아침에 흐렸다. 이른 아침에 동헌에 나가서 업무를 보았다. 순찰사 [이광]의 공문이 왔는데 발포권관이 이미 그만두었으므로1) 가장2)을 정해서 보내라.”고 하기에 그날로 나대용3)으로 정하여 보냈다. 오후 2시경에 영남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동래 또한 함락되었고 양산과 울산의 두 수령4)도 조방장으로서 성에 들어갔으나 모두 패하였다.”고 하여 그 분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경상좌]병사, [경상좌]수사가 군사를 이끌고 동래 뒤쪽에 이르렀다가 이내 회군했다.”고 하여 더욱 통탄스러웠다.5) 저녁에 군사를 이끄는 순천의 병방이 석보창6)에 머물러 있으면서 [군사를] 보내지 않았기에 잡아다 가두었다.

[]

1) 원문 汰去의 용례를 실록에서 찾아보면 자리에 적절하지 못한 사람을 처벌이나 불이익 없이 내보내다라는 의미로서 도태와 그 뜻이 유사하다.

2) 가장(假將)은 임시로 진을 통솔하는 장수를 말한다.

3) 나대용(羅大用)의 자는 시망(時望), 본관은 금성(錦城), 생몰년은 1556~1612년이며, 1591년부터 전선 제조를 담당하는 군관이 되어 판옥선 및 거북선의 생산과 개발에 공헌을 하였고, 옥포해전, 당포해전 등에 참전하였다.

4) 당시의 양산군수는 조영규(趙英圭)이며 울산군수는 이언함(李彦諴)이다. 조영규는 동래성이 함락될 때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전사하였으며, 이언함은 포로가 되었으나 왜군이 조선조정에 전달할 서계를 주고 풀어주었다. 조영규의 자는 옥첨(玉瞻), 본관은 직산(稷山)이며, 생몰년은 1535~1592년이다.

5) 당시의 경상좌병사는 이각(李珏)이고 경상좌수사는 박홍(朴泓)이다. 이각은 동래성으로 달려왔다가 부산성 함락 소식을 듣고는 본진으로 도망쳤으며, 이후 임진강 부근에 나타나자 조정에서 선전관을 보내어 처형하였다. 박홍 또한 양식과 기계를 불태우고 곧바로 달아났다.

6) 지금의 전남 여수시 여천동에 있는 사적 제523호 여수석보(麗水石堡)이다.


[원문] 十八日丁未 朝隂 早朝 出東軒公事 廵使關來到 鉢浦權管 已爲汰去 假將定送云 故羅大用即日定送 未時 到嶺南右水使關 東萊亦爲陷沒 梁山蔚山兩守 亦以助防將入城 並爲見敗云 其爲憤惋 不可勝言 兵使水使領軍到東萊後面 遽即回軍云 尤可痛也 夕 順天領軍兵房 留在石堡倉 不爲領付 故捉致囚禁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5.29 12:24 수정 2021.05.29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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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