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같은 열기! 점심 식사를 마치고, 광기의 더위를 피해 건물 안으로 들어왔었는데…. 현관을 나서니 어느덧 하루해가 저물고 있다. 그토록 뜨거웠던 대기가 허허니 피부에 와닿는다. 허전한 느낌이 콱, 와닿는 것이다. 왜 그런 걸까.
하루의 이행이 마치 한 계절의 이행인 것처럼 느껴졌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올 때의 그 낯설고도 허전한 느낌. 그것을 오늘 하루의 이행 속에서 느낀다. 가을이 올 때의 상쾌함, 시원함, 편안함보다도, 이글이던 태양이 서서히 식어갈 때의 아쉬움 그것이었다. 바로 한 계절을 장악했던 장렬함이 시간 속에 사그라드는 것에 대한 아쉬움, 그런 기분이었다.
사실 오늘 ‘시간의 향기’로 인해 많은 시간을 빼앗겼다. 아마도 오래전 읽었던 글이거나, 빌렸던 책이라고 짐작된다. 아쉽게도 출처를 명확히 기재해놓지 않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다. 다행히 작가 울리히 슈나벨(Ulrich Schnabel)을 오랜만에 소환했고, 메모에는 그의 ‘시간관’이 요약되어 있었다.
“시계가 발명되지 않았던 시절 사람들은 아주 평안한 삶을 살았던 게 틀림없다. 밤낮의 변화나 계절의 변화, 사냥과 추수도 자연적 리듬에 맞춰 생활했으므로, 시간은 정확하게 왔다가 돌이킬 수 없이 사라지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았으며, 그저 평화로운 흐름으로서 사람들은 이 흐름에 맞춰 유연하고 너그럽게 살았을 것이다.”(『휴식』, 174)
시간이 빠르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한 해가 시작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유월의 반을 달리고 있지 않은가. 오후 6시라는 한 시점에 하루를 마무리하고, 달력을 들쳐 보니 벌써 6월에 진입해 있다. 어느덧 한 해의 중심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주 단위로는 한 주의 획을 긋는 금요일이고, 또 다른 시간의 경계에 서서 안과 밖을 서성이게 된다.
하루의 이행 속에서 한 계절의 느낌을 받고, 한 주를 보내면서는 달력을 넘겨 한 해의 중심을 확인한다. 흐르는 시간 속에 가슴이 허허한 이유는, 아마도 시간 속에 무엇이 남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일 것이다. ‘무엇을 남길까’ 하던 생각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희미해진다. 오히려 시간 속에 ‘무엇이 남겠는가’ 하는 반문이 생긴다. 로렌스(D.H. Lawrence)는, 시간은 우리 인간에게서 단물만을 빼앗아 먹고 종국엔 인간을 폐기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We think of ourselves as a body with a spirit or a soul or a mind in it. Mens sana in corpore sano. The years drink up the wine, and at last throw the bottle away, the body, of course, being the bottle.
우리는 정신이나 영혼이나 지성이 우리 몸 안에 깃들어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건장한 신체의 건강한 남자. 그런데 “세월은 와인을 비우고, 종국엔 빈 병을 내던진다, 술병으로서의 우리 존재를”.
오늘 집에 들어가는 길에는 달콤한 와인 한 병 사 들고 가야겠다. 와인을 조금씩 음미하며 순간의 행복을 느끼다가, 와인 병을 걷어차 볼 요량이다. 어차피 시간에 의해 폐기처분 될 인간으로서, ‘시간의 향기’를 위안 삼으면서.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