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코스미안의 탈잡초타령

이태상

 

202176일자 한국일보 뉴욕판 오피니언 칼럼 <한마디> ‘잡초에 필자 김홍식 은퇴 의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무엇이 잡초이며, 그것을 누가 결정하며, 또 그것을 정리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를 생각해봅니다. 풀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도 서로 모양은 다르지만 같은 정원에 이웃하면서 오손도손 잘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누가 와서는 자기를 잡초라고 하여 제거해버리면 어떻겠냐는 것입니다.

 

서로가 너나 잘해하면 문제가 없으련만 유독 한국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남의 것인데도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간섭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잡초는 나쁜 것이지만 대다수의 경우는 잡초 자체에 의한 피해보다도 그것을, 더 더구나 자기 정원의 경우도 아닌 것을 뽑으려 옥신각신하는 문제로 인한 피해가 훨씬 많음을 봅니다.

 

내가 속한 기독교계를 예로 든다면 구교는 자기 정원도 아닌 신교를 잡초 이단이라고 하고, 신교 역시 자기 정원도 아닌 구교를, 또 같은 개신교 안에서도 자기와 다르다며 서로 상대방을 잡초 이단이라고 합니다. 특히 한국의 유튜브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한국 개신교에는 하나님이 너무 많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누가 잡초인지 결정하는 것 자체도 문제인데 그 결정 과정 역시 성경이 기준이 되기보다는 소위 민주주의식이라 하여 다수결로 결정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 좁은 문과 넓은 문의 경우처럼 다수는 거의 항상 잡초 이단이요 소수만이 천국에 가게 되어있으니 오히려 다수를 따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우리 한국인의 가장 큰 단점이요, 반드시 시정해야 할 것 중 하나가 핏속에 흐르는 구별 차별 정죄사상이라는 것 동의할 것입니다. 같은 정원에 자라는 식물들 중 어느 것이 잡초인지의 감별 방법은 누구든 스스로가 정원사를 자처하며 옆 동료를 제거하려는 그가 바로 그 정원의 잡초라고 보면 거의 틀림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 아닌가. 얼마 전 미국 NBC방송경연 프로그램 아메리카 갓 탤런트의 녹화현장에서 초대 심사위원으로 나선 레노는 제작 프로듀서 사이먼 코웰의 반려견 그림을 보며 한식당 메뉴에 있는 음식과 닮았다는 농담을 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인종차별로 미주한안위원회CKA는 물론 미국인 정의 증진AAJC 등 아시안 단체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NBC에 레노의 퇴출을 촉구했었다.

 

우리 냉철히 한번 따져보자. 육식을 하는 한 우린 모두 식인종과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설혹 채식만 한다 해도 식물도 느낌이 있는 생물 sentient being’이라는 생물학자들의 주장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인종주의자 human racist’가 아닌가.

 

어렸을 때 읽은 동화였는지 콩트(이야기란 뜻의 프랑스어 Conte)가 평생토록 잊혀지지 않는다. 의인화擬人化한 바퀴벌레 가족 이야기다.

 

여러 해 전에 돌아가셨지만 언젠가 나보다 열 살 위의 도닦던 형님이 서울에 있는 조계사에 들러 청담 스님과 더불어 여러 가지 토론을 하셨다고 한다. 한참 열띤 토론 끝에 더 이상 말로 이야기가 될 수 없자 형님이 한 스님보고 수고스럽지만, 뒷간에 가서 똥물 한 바가지만 퍼갖다 달라 하시고는 바가지에 담긴 똥물을 천천히 쭈욱 다 들이키셨단다. 모르긴 해도 그 자리에 있던 스님들은 하나같이 옛날에 원효대사께서 해골바가지에 고인 빗물을 마시고 크게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일화를 생각하게 되었으리라.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선도 악도 없다. 사람의 생각이 선도 악도 만든다. There is nothing either good or bad but thinking makes it so.’라고 했다는 것처럼 형님도 세상에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없다는 것을 말 대신 행동으로 역설하신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절대적인 선도 악도 없는데 사람이 제멋대로, 편리한 대로, 형편 따라 선이니 악이니 하며 아전인수식으로 억지 부리고 우겨온 것 같다. 특히 서양의 기독교에서 악마니 천사니, 흑이니 백이니, 선민이니 이방인이니,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 죄다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히 저주받을 이교도로 낙인찍는가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위한 제물로 다른 동식물 자연 만물을 창조하셨다느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천하의 얌체 같은 소리를 벌써 몇천 년째 해오고 있지 않은가?

 

기독교인들이 식탁에 앉아 일용할 양식을 주셨다고 하나님이나 주님께 감사 기도할 때 식탁에 오른 제물들 입장에서 보면 이 얼마나 가증스러울까. 이는 마치 해적이나 강도, 강간범들이 실컷 노략질, 강도질, 계집질해 놓고, 저희들 운수 좋았다고 저희들이 섬기는 귀신한테 고사 지내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어디 그뿐이랴. 서양 사람들이 예수의 상징이라는 양고기를 즐겨 먹으면서 동양 사람들이 개고기 먹는다고 야만이니 동물학대니 떠들어 대는 것이나, 저희들이 믿는 것은 종교요 신앙이고,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은 사교邪敎나 미신迷信이라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쓴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같이 배고파 빵 한 쪽 훔쳐 먹어도 평생토록 벌 받는 세상에 전 세계 땅덩이를 거의 다 훔치고 약탈하며 천하의 못된 짓은 다 해온 자들이 대속代贖한다는 예수의 피로 속죄 받아 지옥에 안 가고 천당 가겠다는 발상부터가 너무 너무 뻔뻔하고 가소로운 서양사람 기독교인들의 육갑아닌가?


그보다는 우리 동양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의 이치가 훨씬 더 자연스럽고 무리가 없는 것 같다. 어두운 밤은 밤이고, 밝은 낮은 낮이지, 어떻게 어둠은 악이고 빛은 선이라 할 수 있으며, 산은 좋고 계곡은 나쁘다 할 수 있나? 그래서 하늘 천, 천국이니, 땅 지자 지옥이란 말이 생겼는지 몰라도, 남자는 선이고 여자는 악이란 말인가? 세상에 어둠이 없으면 빛도 있을 수 없고, 여자가 없으면 남자도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둘이 서로 보완하고 서로에게 절대불가결인 동전의 양면 격인데 어쩌자고 이쪽 아니면 저쪽, 나 아니면 남, 백이 아니면 흑이라 하는가? 이런 유치한 억지놀음인 서양육갑골빈당처럼 맞장구치지 말고 우리 동양고유의 음양육갑떠는 것이 천만 배 낫지 않을까? 그리고 고양이가 쥐 사랑하듯 이웃 사랑하는 대신 이웃을 존중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이 창조되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인간 특히 서양의 백인, 그 중에도 유태인들이 저희들 형상대로 저희들 하나님 여호와를 만든 것임이 분명하다. 저희들의 단군신화를....

 

어디 또 그뿐이랴. 우리 가운데 가장 천대받는 사람으로 창녀가 있다. 하지만 그런 창녀조차 예수의 처(?)가 아니면 벗이 아니었나. 신약성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 말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저지른 것은 이루 필설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잔악무도하고 천인공노할 남성들의 만행이 정복이니, 승리니 하는 영광된 훈장으로 장식돼 왔다. 창녀는 몸을 판다기보다 서비스를 제공한다. 창녀의 서비스는 다른 많은 직업적인 서비스보다 솔직하다. 눈가리고 야옹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선적이고 자비롭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직업적인 날강도, 날도둑, 날사기꾼이라 할 수 있는 일부 정치인, 실업인, 종교인이 부리는 농간에 비하면....

 

파는 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창녀나 장사꾼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좋든 싫든 뭔가를 팔아먹고 산다.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감정노동이든 노동을 파는 것이 노동자라면 예술을 파는 것이 예술인이고, 법률지식이나 의료기술을 파는 것이 변호사나 의사라면 하느님이나 귀신 또는 성인, 성자, 예수, 석가모니 등의 이름을 파는 기도 장사꾼이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독교와 천주교에서 성찬식으로 예수의 살과 피를 상징한다는 빵과 포도주를 나누지 않는가? 그렇다면 예수야말로 인류의 대속代贖을 위해서이건 아니면 그의 과대망상증에서였건, 또는 예수 자신의 꿈보다는 기독교인들의 이기적인 해몽이든 간에 어떻든 제 몸을 그 누구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오래도록 팔아 온 남창 중의 남창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단군할아버지와 곰할머니의 후손이든 아니면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든 또는 닭의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라 태조 박혁거세의 후예이든 숫처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예수의 제자들이든, 그 어떻든 간에, 우리 모두 따져보면 다 일종의 창녀나 남창들이 아닐까?

 

다만 보통 사람들은 그 속살과 피(붉은 피든 흰 피든 간에) 만 즐기는데 성인聖人 아닌 性人들은 그 껍데기 털까지 좋아하는가 보다. 예수는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은 막달라 마리아의 죄를 사하여 주었다 했고, 한때 우리 사회에 물의를 빚었던 용화교 교주 서백일(본명 한춘)은 수많은 여신도들을 농락 겁탈하고 그들로부터 뽑은 음모陰毛로 만든 음모방석을 즐겨 깔고 앉았었다 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 어서 서양육갑졸업할 일이어라.  

 

지지난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많은 행사가 있었고 여러 사람들의 글이 각종 언론 매체에 게재되면서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반추하는 계기가 되었다.

 

약육강식의 자연계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의 인류 역사를 통해서 보면 흥망성쇠와 생사여탈은 계속되고 있다. 가까운 예로 같은 민족인 고구려, 백제, 신라가 원수처럼 각축을 벌였던 시대가 있지 않았는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친중, 친일, 친러, 친미를 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

 

조선 왕조 때에는 당파싸움으로 국력을 탕진하다 못해 일본의 속국으로 36년 동안 지배를 받았다. 1945년에 해방을 맞았으나 미소 냉전의 분출구로 한국전이라는 동족상잔까지 겪었고 그 후유증이 71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징병과 징용, 성노예 등으로 잡혀간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어두운 역사의 가장 큰 피해자들임에 틀림없지만, 따지고 보면 평범한 일본인들 역시 2차대전의 희생자요 피해자들이다.

 

이런 질곡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없을까?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고 자연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해 온 서양 물질문명의 원죄의식선민사상에서 탈피하여 우리나라의 홍익인간/홍익만물과 인내천 사상을 온 세상에 펼치는 것이 답이 되지 않을까.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나그네인 코스미안의 참된 소명이고 친인親人, 친지親地, 친천親天파가 되는 길이 아닐까.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인류역사상 세계 최대의 쓰나미Tsunami를 맞은 이 시점에時點에 지난 75년 아니 2천여 년의 세월을 돌아보면서 2020년 초에 출간된 우생愚生의 졸저拙著 유쾌한 행복론에 실린 졸문拙文 코스미안 비전은 온 인류의 시대정신時代精神 zeitgeist’과 지난 가을에 나온 영문판 코스미안 랩소디Cosmian Rhapsody’에 수록된 코스미안 비전이 열쇠Cosmian Vision Is the Key’ 그리고 코스미안 구도求道의 길The Cosmian Way Is the Way to Seek’을 관심 있는 독자들을 위해 아래에 옮겨보리라.

 

코스미안 비전은 온 인류의 시대정신時代精神 zeitgeist

 

8·15 광복과 함께 질풍과 노도처럼 한반도에 밀어닥친 미-소 냉전의 광풍狂風 속에 휩싸인 가운데 서양풍西洋風 사대주의 사조事大主義思潮에 맞서 역풍逆風을 일으킨 인물 두 사람을 들라면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문선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전자前者는 공산주의가 아닌 골찬주의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주창했고, 후자後者는 분쟁과 파쟁을 일삼는 세상의 모든 종교를 통일하는 통일교統一敎를 창시했으니까. 그 내용이나 결과는 차치물론且置勿論 내버려 두고 문제 삼지 않기로 하고, 그 이름만으로도 큰 박수를 받을 만하지 않은가. 역사적인 평가는 후세 사가史家들에게 맡긴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제시한 비전만 큼은 우리가 기꺼이 기탄忌憚없이 적극 수용受容/受用/收容 /收用할 수 있지 않으랴. 우리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 /홍익만물弘益萬物 그리고 천도교天道敎의 인내천人乃天, 곧 코스미안사상으로서 말이다.  

 

영국 시인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은 그의 대서사시 실낙원Paradise Lost (1667)에서 악마의 광란, 침울한 우울증, 그리고 달빛을 쏘여 실성失性한 광증狂症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30여 년 전 영국의 TV에서 영국의 젊은이들이 통일교에 포섭 세뇌되어 이용 착취당하고 있다는 프로가 방영된 후 영국의 신문마다 ‘Moonie’라는 통일교가 반사회적反社會的이니, 가정을 파괴한다느니 야단이었다. 이 와중渦中에 통일교 신자가 된 손자를 둔 한 영국 할아버지가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가 영국의 진보주의적 전국지 신문 가디언 The Guardian에 실렸었다.

 

내 손자는 현재 21세로 3년 전 통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의 규칙대로 술, 담배, 마약, 문란한 섹스 성생활을 기피해왔습니다. 이와 같은 규율이 반사회적이란 말입니까. 그 아이 부모 말로는 이웃들도 자식들이 술집이다 디스코다 싸돌아 다니면서 마약 밀매꾼들의 밥이 되는 대신 차라리 통일교도들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답니다. 내 손자는 6주마다 집에 오면 행복하고 화평한 얼굴로 집안 궂은일 다 맡아 하고, 옛날에는 긴 머리 장발에다 막살던 아이인데 지금은 복장과 외모부터가 아주 참하고 생기있는 딴사람이 되었답니다. 대화를 해 봐도 그가 세뇌됐다는 아무런 낌새를 찾아볼 수 없고, 그가 믿게 된 통일교의 교리가 기독교의 기존 정통파 교리와 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통일교가 가정을 파괴한다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당시 18세에 어려서부터 주일학교와 교회를 다닌 끝에 세례받고 침례교 신자가 되었을 때 나야말로 세뇌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중 매스컴을 통해 인체에 해롭고 반사회적인 술과 담배 선전광고로 우리 모두 잘못 세뇌되어 오고 있지 않습니까?"

 

공교롭게도 또 그 몇 년 전 영국의 국영방송 BBC ‘리스The Reith Lectures’ 공개강좌 연사로 초빙된 미국의 그 당시 미시간 대학 알리 마즈루이(Ali Mazrui 1933-2014) 교수는 최근에 서방국가에서 전도(傳道)하며 개종(改宗)시키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출신 선교사들은 그동안 오래도록 서양사람들이 처방해 온 약()을 그들 자신들에게도 맛보게 해주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의 문선명 목사가 이끄는 통일교 운동에 모여드는 서양의 자식들 부모가 느끼는 억하심정(抑何心情)을 자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마즈루이 교수는 말한다.

 

내게는 아들 셋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으로 나는 태어났고, 내가 아직도 아프리카에 살고 있었다면 내 아들들도 선교사들의 전도 대상이 됐을 것입니다. 물론 선교사들은 서양의 백인들인 감리교나 가톨릭 계통이었을 것입니다.”

 

서양 백인들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질서에 쉽게 또 빨리 현지 원주민들을 굴종 예속시키기 위해 백인 선교사들은 사랑과 친절, 용서와 인내 등 여성적 미덕(美德)을 주입 세뇌시켜 이들의 반항심과 투쟁 정신을 약화시켜 정신무장을 해제시킨 후 백인들의 세계 지배를 가능케 했다고 정치학 교수인 그는 본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 및 호주와 뉴질랜드 원주민들의 고유한 정신문화는 백인들의 독선독단적인 종교적 과학적 물질문명의 세속적 침공을 받아왔음을 상기시키면서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이러한 침공에 대응, 처음으로 역침투, 역선교의 역공(逆攻)을 개시한 것 같다고 마즈루이 교수는 관찰한다.

 

만약 세계 2차대전에서 일본이 승리했다면 아마도 일본의 신도(神道 Shinto) 신사참배(神社參拜)에 앞장섰을 한국 사람들이 오늘날 한국과 미국 등지에서 교회에 많이 다니고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서양의 해적들이 총칼은 물론 원자폭탄으로 세계를 정복하지 못했었다면 저들의 종교 기독교가 오늘날처럼 세계 도처에서 판치게 되지 못하였으리라. 이렇게 볼 때 서양 백인 선교사들에 의해 개종된 모든 유색 기독교인들을 좀 극단직으로 표현해서 정신적으로 거세(去勢)당한 일종의 정신적인 내시(內侍)’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미 고인(故人)이 되셨지만, 그분이 아직 살아 계실 때 27년 전 나는 아래와 같은 편지 한 통을 문선명 교주님께 띄웠다.

 

문선명 선생님께

 

문 선생님과 일면식은 물론 통일교에 대해 아는바 아무것도 없는 무지한 소생이 극히 외람되나마 삼가 이 글을 올립니다. 뭣 보다 통일교의 통일이란 이름부터가 분열될 대로 분열된 온 인류에게 가장 호소력 있고 매력적입니다. 지난해 전 세계 140개국 8만 명의 지성들이 자리를 같이한 제1회 세계 문화 체육대전이 한국에서 개막됐다는 뉴스(아니 이야말로 복음(福音)이라 해야겠지요)를 접했을 때 정말 가슴 벅찬 감격에 환호성(歡呼聲)의 경탄성(敬歎聲)이 절로 나왔습니다.

 

세계 규모에 걸치는 획기적인 대전(大展)에서는 국제과학통일 회의, 세계평화교수협의회 세계대회, 세계평화종교연합, 세계평화연합, 세계평화여성연합, 대학원리연구회 세계대회, 체육대전, 등의 행사와 실로 장관(壯觀)일 수밖에 없는 3만여 쌍 6만여 명의 국제합동결혼식이 베풀어졌다는 보도에 이 대전(大展)의 창시자인 문 선생님께 큰 박수와 진심으로 깊은 경의(敬意)를 표해 마지않으면서 이 모든 행사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이름뿐인 아닌 문자 그대로 명실상부(名實相符)한 결실(結實)맺기를 축원하는 바입니다.

 

지난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나라 없는 사람이란 표제로 구()소련연방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 - )의 실각을 다룬 커버스토리 기사를 읽고 어떤 한 독자가 보낸 다음과 같은 글이 타임지에 또한 실렸습니다. (타임지 1992113일자) ‘고르바초프에게 편지를 띄울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쓰겠다는 요지였지요.

 

당신은 결코 나라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계가 당신의 나라이고 우리 모두 충심으로 당신을 환영합니다. 당신은 그 짧은 시간에 그토록 큰일을 했고 앞으로도 더욱 많은 일할 사람입니다. 온 인류를 청중으로 세계란 강당에서 당신의 비전과 지혜를 나눠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위대하고 최고의 찬사를 받을 만합니다.”

 

어쩌면 이 말을 문 선생님께도 그대로 해드릴 수 있겠습니다. 반세기에 걸쳐 꽁꽁 얼어붙었던 동서냉전의 빙산을 고르비가 녹여 버렸다면 2천여 년에 걸쳐 동서양 간에 쌓이고 내려 깔려온 어둠의 장막을 문 선생님께서 걷어 올려주시고 우리 모두의 가슴 속의 빙산을 하루빨리 녹여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물질과 탐욕에 어둔 눈을 뜨고 참빛을 보아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대단히 무엄(無嚴)한 표현이 되겠으나 남성 상위를 영어로는 선교사 체위(Missionary Position)’라 하지요. 우리말 감투거리와는 정 반대되는 뜻으로요. 그리고 영어에는 스스로를 낮추어 아랫사람에게 짐짓 겸손하게 은혜나 베푸는 듯이 겸허한 덕색(德色)질을 하고 생색(生色)낸다는 뜻으로, 함께(con)와 내려간다(descend)란 두 단어를 합성한 condescend란 복합어가 있지요. 본래 선교사란 종교를 널리 전도 전파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었겠지만 주로 기독교의 외국 전도에 나선 사람을 지칭해 그렇게 불러온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선교사들은 어디까지나 condescend하는 입장에서 무지몽매(無知蒙昧)하고 미개(未開)한 야만인(野蠻人)들을 계몽(啓蒙)하고 교화(敎化)시킨다는 소명감(召命感)과 사명감(使命感)에 불타는 광신적(狂信的), 정신적(精神的) 십자군(十字軍)이 아니었습니까.

 

예수가 사람의 탈을 쓰고 지상에 나타난 하느님으로 고자세(高姿勢)를 취했었다면 문 선생님께서는 저자세(低姿勢)를 취해 주십시오. 사람에서 출발해서 우리 모든 사람 아니 우주 자연 만물이 하나의 하나님됨을 밝혀 보여 주십시오. 진정한 세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통일운동은 재래식(在來式) 기독교의 condescend하는 선교 사업으로는 절대로 안 될 일이고, 그 정 반대로 함께 오르는 conascend 하는 것이라야 할 것 같다는 우견(愚見) 아닌 현견(賢見)을 감()히 말씀드려 보는 것입니다.

 

나와 너, 남과 여, 백과 흑, 선과 악, 하늘과 땅, 선민과 이방인, 따로따로 상()과 하()로 분리되는 약육강식(弱肉强食), 마치 고양이가 쥐 사랑하듯 하는 인류애나 이웃사랑이 아닌 참사랑으로 인종과 국적, 사상과 종교, 남녀성벌, 직업의 귀천, 사회계층 불평등과 빈부격차(貧富隔差)의 양극화(兩極化)를 죄다 타파(打破)하고 초월(超越)해 온 인류를 그야말로 한 인간가족으로 통일하는 통일운동에 박차를 가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다 함께 향불처럼 승화되어 하느님으로 피어오르도록 말입니다. 그러면 비틀즈의 일원이었던 존 레넌(John Lennon 1940-1980)이 그의 상상해보게(Imagine)’란 노래로 꾼 꿈이 하나의 예언 같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소아(小我)를 벗어난 대아(大我), 곧 천인합입(天人合一)의 무궁(無窮我) 코스미안으로 무궁화(無窮花) 아니 코스모스 동산에서 만세동락(萬歲同樂) 할 날이 어서 오기를 고대합니다.

 

 

해심(海心) 이태상(李泰相) 배상(拜上)

 

Cosmian Vision Is the Key

 

 

Are Koreans geniuses in concocting trendy catchphrases? They are like “TWIWOL” (“트인낭” in Korean), initials for “Twitting Is Waste Of Life,” and “KAFAIN depression” (“카페인 우울증” in Korean), for Kakao (the operator of Korea’s dominant mobile messaging app Kakao Talk), Facebook and Instagram depression. Many SNS users are reportedly becoming addicts and ending up depressed.

 

 

This must be a reflection of the reality we are experiencing these days. The number of Twitter followers of Trump, the embodiment (to some, if not most, people) of abnormality, absurdity, untruth is said to be in the 57,300,000s and his supporters are to be 40% to 50% of U.S. voters.

 

One may recite this cry along with ‘THE MADMAN: His Parables and Poems’ (1918) by Kahlil Gibran (1883-1931):

 

“THE PERFECTWORLD”

 

God of lost souls, thou who art lost amongst the gods,

hear me:

Gentle Destiny that watchest over us, mad, wandering spirits,

hear me:

I dwell in the midst of a perfect race,

I the most imperfect.

I a human chaos, a nebula of confused elements,

I move amongst finished worlds

peoples of complete laws and pure order,

whose thoughts are assorted,

whose dreams are arranged,

and whose visions are enrolled and registered.

Their virtues, O God, are measured,

their sins are weighed,

and even the countless things that

pass in the dim twilight of neither sin nor virtue

are recorded and catalogued.

Here days and nights are divided into

seasons of conduct and governed by

rules of blameless accuracy.

To eat, to drink, to sleep, to cover one’s nudity,

and then to be weary in due time.

To work, to play, to sing, to dance, and then

to lie still when the clock strikes the hour.

To think thus, to feel thus much,

and then to cease thinking and feeling

when a certain star rises above yonder horizon.

To rob a neighbor with a smile,

to bestow gifts with a graceful wave of the hand,

to praise prudently, to blame cautiously,

to destroy a soul with a word,

to burn a body with a breath,

and then to wash the hands

when the day’s work is done.

To love according to an established order,

to entertain one’s best self in a preconceived manner,

to worship the gods becomingly,

to intrigue the devils artfully

and then to forget all as though memory were dead.

To fancy with a motive,

to contemplate with consideration,

to be happy sweetly,

to suffer nobly-

and then to empty the cup

so that tomorrow may fill it again.

All these things, O God, are conceived with forethought,

born with determination, nursed with exactness,

governed by rules, directed by reason,

and then slain and buried after a prescribed method.

And even their silent graves that lie within

the human soul are marked and numbered.

It is a perfect world,

a world of consummate excellence,

a world of supreme wonders,

the ripest fruit in God’s garden,

the master-thought of the universe.

But why should I be here, O God,

I a green seed of unfulfilled passion,

a mad tempest that seeketh neither east nor west,

a bewildered fragment from a burnt planet?

Why am I here, O God of lost souls,

thou who art lost amongst the gods?

Nevertheless, crying and wailing over the reality we are facing will be so futile.

Since there’s no answer to our questions, we’ve got to answer them ourselves.

Even though ours is not “the perfect world,” we are born with perfect key to turn our chaotic world into Cosmos. The key is none other than one’s Cosmian Vision of Love Arainbow.

 

The Cosmian Way

 

“I’m bored.” It’s a puny little phrase, yet it has the power to fill parents with a cascade of dread, annoyance, and guilt.

 

Thus begins The New York Times Sunday Review (February 3, 2019) Opinion Column article “Let Children Get Bored Again” by Pamela Paul, the editor of The Book Review and a co-author of the forthcoming book ‘How to Raise a Reader’ by Maria Russo and Pamela Paul (published in September 2019). “Boredom spawns creativity and self-sufficiency,” she argues.

 

‘The Artist’s Way’ by Julia Cameron (1948 - ) has sold more than four million copies, as the author puts it, “that has been a lodestar for blocked writers and other artistic hopefuls for more than a quarter of a century.”

 

The first printing was about 9,000 copies, said Joel Fotinos, formerly the publisher at Tacher/Penguin, which published the book. According to Mr. Fotinos, there was concern that it wouldn’t sell. “Part of the reason,” Mr. Fotinos said, “was that this was a book that wasn’t like anything else. We didn’t know where to put it on the shelves-did it go in religion or self-help? Eventually, there was a category called “creativity,” and “The Artist’s Way” launched it.”

 

Now an editorial director at St. Martin’s Press, Mr. Fotinos said he is deluged with pitches from authors claiming they’ve written “the new Artist’s Way.” “But for Julia, creativity was a tool for survival,” he said. “It was literally her medicine and that’s why the book is authentic, and resonates with many people.”

 

Needless to say, this must be the case for everybody, young and old, not just for writers and so-called “artists.” Each and every one of us was born with “creativity” in order to swim, not to sink.

 

Just as Kahlil Gibran (1883-1931) comments in this book of aphorisms, poems, and parables, ‘Sand and Foam (1926):

 

I am forever walking upon these shores,

Betwixt the sand and the foam.

The high tide will erase my foot-prints,

And the wind will blow away the foam.

But the sea and the shore will remain

Forever.

Once I filled my hand with mist.

Then I opened it and lo, the mist was a worm.

And I closed and opened my hand again,

and behold there was a bird.

And again I closed and opened my hand,

and in its hollow stood a man with a sad face,

turned upward,

And again I closed my hand,

and when I opened it there was naught but mist.

But I heard a song of exceeding sweetness.

You may have heard of the Blessed Mountain.

It is the highest mountain in our world.

Should you reach the summit

you would have only one desire,

and that to descend and

be with those who dwell in the deepest valley.

That is why it is called the Blessed Mountain.

Every thought I have imprisoned in expression

I must free by my deeds.

This is rather The Cosmian Way, methinks.

Cosmian Way Is the Way to Seek

 

“Nobody knows everything about anything.”

 

This is one of the principles of General Semantics launched in 1933 by Polish American originator Alfred Korzybski (1879-1950) with the publication of ‘Science and Sanity: An Introduction to Non-Aristotelian Systems and General Semantics’.

 

In other words: “We cannot imagine, think, say, understand, know all about anything or anyone including ourselves.”

 

길 없는 길” (The Way Without a Way) is a four-volume narrative written by South Korean writer Choi In-ho (1945-2013) about the life journey of the famous Korean Buddhist Seeker 경허(Gyunghuh 1849-1912).

 

The core message of this book ‘Cosmian Rhapsody’ (2020) may be put this way: Cosmian Way is the way for us all to seek.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7.08 11:03 수정 2021.07.08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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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