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산사 기행] 대마도 수선사

전승선

사진=코스미안뉴스/대마도


대마도 수선사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은 고통에 탐닉하는 법을 알고 있다. 바짝 마른 겨울나무처럼 볼품없는 육신의 바닥을 헤매다가 의식의 반작용으로 고통의 축제에 뛰어들어 말라비틀어진 쾌락을 한바탕 불사르고 난다. 그래,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의 시간은 쾌락과 고통이 춤추는 광란의 축제다. 나는 종로에서 고통과 뒹굴고 영월에서 쾌락과 뒹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이천십구년이 내게로 왔다.

 

오감은 살아서 시의 본적지를 물으며 세포의 기억을 부활시킨다. 무모하다. 무엄하고 괘씸하다. 내 몸에 눌러앉은 시를 기억하는 오감의 세포들은 분별없이 일어섰다가 다시 주저앉으며 뜨거운 피를 나르는 푸른 동맥의 길목을 사정없이 찔러댄다. 미안하다. 나의 시들아. 나의 기억들아. 나는 오랫동안 너무 게을렀다. 나를 없애는 위험한 공간에서 진이 빠지도록 머물러 있었다. 더 덜어낼 것도 없는 나의 마음의 창고는 비어만 가는데 하릴없이 존재 밖을 서성이고 있었다.

 

심장아 나대지 마라

 

시를 써야 한다. 절박하고 절실하게 써야 한다. 밥줄이니까. 정신줄이니까, 자꾸 심장이 나대며 내게 속삭였다. 뜨거운 피를 운반하라고, 쾌락의 고통을 즐기라고, 쓰지 않고 배길 수 있냐고 다그쳤다. 나의 심장이 나대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며 살아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나는 심장에게 맞은 뺨을 대마도에서 화풀이하려고 마음먹었다. 대마도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옆집 친구처럼 거기 앉아 있는 대마도를 한 바퀴 돌아와서 오감을 기억하는 세포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시라는 이름의 고통의 참맛을 기꺼이 느끼고 싶었다.

 

밤 열두 시 넘어 경부고속도로를 정신없이 달렸다. 밤의 고속도로는 첫사랑의 달콤한 기억처럼 짜릿하다. 페달을 밟는 발의 경쾌한 리듬이 온몸의 세포들을 깨우며 살아있음의 환희를 느끼게 한다. 밤을 지나 새벽으로 달려가서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는 설레임 때문에 바다를 사랑했는지 모른다. 아름다움과 경건함을 풀어놓은 바다는 무당의 주술처럼 저릿저릿하다. 나는 그래서 바다가 좋다. 그래서 태양이 좋다. 처음 같은 느낌, 처음 같은 설렘처럼 우주의 처음이 그러했을까. 생명의 처음이 그러했을까. 펜 끝에 붙어 쓰인 첫 시의 문장이 그러했을까.

 

부산항은 아직 미명에 잠겨있었다. 어둠이 밝음을 밀어내며 서서히 도시를 깨우는데 태양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발버둥 치는지 바다를 검붉은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도시에 갇혀서 살던 나는 이 순간을 위해 떠나왔는지 모른다. 부산과 대마도 사이에 있는 이 바다를 보고 싶었을 것이다. 모든 바다를 경외하면서도 부산과 대마도 사이의 바다는 내 헛헛한 마음을 삼켜버리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 헛헛함을 부산 앞바다에 버리고 대마도행 배에 올랐다.

 

대마도는 일본 땅, 독도는 우리 땅이라며 그냥 일없이 흥얼거렸던 노래처럼 가깝고 가까운 이웃 땅의 친근함은 옆집에 놀러 간 것처럼 편했다. 도시 안쪽에 있는 수선사에 들렸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는데 문 열어주는 이도 없고 스님들도 없는데 낮게 부는 겨울바람만 수선사를 흔들고 있었다. 절이 싫은 중이 떠났는지 중이 실은 절이 떠났는지 모르겠지만 혼돈의 역사를 머리에 이고 앉아 수선사라는 이름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 시절이 그러한데 어쩌겠는가. 종교도 떠나고 철학도 떠나는 시절, 떠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건 이미 떠난 것이 아니겠는가.

 

대마도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한국 관광객들만 속절없이 왔다가 속절없이 간다. 무너져가는 나라를 바라보며 볼모로 잡혀 왔던 최익현 선생의 순국기념비만 하염없이 대마도 바람을 맞고 있었다. 역사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흐르다가 어느 시절에 역류하다가 또 어느 시절엔 순류로 돌아서며 흐르고 흐르는 것이 아니던가. 대마도 수선사에 있는 최익현 선생의 순국기념비를 바라보면서 나는 이 세상에 흐르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사진=코스미안뉴스/대마도 수선사


일본의 사찰 문화가 그러하듯이 대마도의 수선사도 죽은 영혼들을 위한 곳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출가수행을 하지 않는 일본의 사찰들은 그래서 좀 밋밋하고 재미가 없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 스님의 현현한 눈빛을 볼 수가 없다. 깊은 심연의 바닥을 끌어 올리는 염불 소리가 없다. 정토종인 수산사의 정토는 없었다. 중국에서 발전한 정토종이 우리나라에 와서 싹을 틔웠지만, 종파로 발전은 하지 못했다. 일본은 정토사상을 독자적으로 꽃을 피우며 종파로 발전시켜 원효의 사상을 재정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사찰들은 종교라는 문화만 남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수선사 앞에서 발길을 잃었다. 대웅전 부처님께 두 손 모아 합장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닫힌 문틈 사이로 일본 특유의 정갈한 정원만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문화로 남은 절이든 믿음으로 현존하는 절이든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들에게 종교의 믿음보다 더 간절한 신사의 믿음이 있다고 해도 나무랄 일이 아니다.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려야 문화다.

 

시가 내게로 오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고통이라 말하지 않기로 했다. 시가 내게로 오지 않으면 내가 시에게로 가면 되는 일이다. 이제 시는 시를 통해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전승선 기자
작성 2021.07.09 10:23 수정 2021.07.0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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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